들어가는 말
분자를 조각하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상을 실물로 봤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머릿결, 옷 주름과 같은 디테일부터 성스러운 표정까지 한데 담겨 있는 아름다운 대리석 조각은 없던 신앙심까지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피에타 상을 완성했을 때의 미켈란젤로의 나이는 고작 24세. 천재는 천재다.
나도 조각을 한다. 물론 미켈란젤로의 조각과는 많이 다르다. 내가 조각하는 것은 화합물이다. 주어진 물질에 탄소나 산소, 수소 같은 원자를 붙이거나 제거하면서, 또는 다른 커다란 분자를 연결하면서 적당한 모양을 완성한다. 내가 만드는 조각품의 최종 목적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나쁜 단백질에 찰싹 달라붙어 기능을 못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사람들은 보통 이런 화합물을 약이라고 부른다.
그래도 본질은 비슷하다. 미켈란젤로가 최고의 원석을 고르기 위해 로마 근교의 대리석 산지를 돌아다니고 잘 손질한 조각 기구와 함께 작업장에 들어선 것처럼, 나는 좋은 약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시약회사 홈페이지를 돌아다니고 플라스크와 시약을 가지고 실험대 앞에 선다. 그리고 하루하루 열심히 분자를 다듬는다. 나는 분자 조각가다.
내가 조각하는 물질이 아직 미켈란젤로의 작품처럼 감동을 준 적은 없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수많은 분자 조각가들이 있고, 그들이 만드는 물질은 환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1980년대 후반에 만성 골수성 백혈병chronic myeloid leukemia, CML의 원인 단백질이 밝혀졌을 때, 사람들은 그 단백질의 기능을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전적인 분자 조각가들은 구조를 바꾸고, 활성을 검색하고, 합성법을 개선하고, 회사 경영진을 설득하고, 환자를 모집하고, 임상시험을 진행하면서 기적의 항암제 글리벡Gleevec, 성분명 이마티닙(imatinib)을 조각해냈다.
열정적인 제약회사 연구진이 만들어낸 글리벡은 만성 골수성 백혈병의 원인 단백질과 완벽하게 결합하여 활성을 멈추게 하였고, 기대 수명이 4년에 불과했던 환자들은 별다른 문제없이 지금도 잘 살아가고 있다. 물론 날마다 약을 하나 먹는 일상이 추가되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2023년을 지나고 있는 현재, 글리벡은 일반인들에게도 비교적 친숙한 의약품이 되었다. 아마도 글리벡을 먹고 삶을 연장한 환자들에게는 이 약의 구조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보다 더욱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실제로 글리벡의 주성분인 이마티닙은 아름다운 분자 조각의 결정체이다. 탄소 10개, 수소 9개, 질소 3개로 이루어진 최초의 화합물(C10H9N3)에서 미약하나마 원하는 활성을 찾아낸 후, 많은 전문가들이 달려들어 이 물질을 다듬기 시작했다. 화학자, 생물학자, 의사, 심지어 환자들까지 포함된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결국 탄소 19개, 수소 22개, 질소 4개와 산소 하나가 추가된 화합물(C29H31N7O), 이마티닙이라는 물질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기적이 되었다. 처음 조각을 시작할 때의 원석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거대하고 정교한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2001년 글리벡의 발매에 맞춰 〈타임〉은 표지 기사에서 이 물질을 ‘마법의 탄환magic bullet’이라고 소개하면서 인류가 암과 싸울 수 있는 새로운 무기를 개발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글리벡의 제조사인 노바티스Novatis의 보고에 따르면 글리벡 한 품목의 2022년 매출이 9800억 원에 달한다. 참고로 한국 바이오의약계의 선두 주자 격인 셀트리온의 2022년 전체 매출액이 2조 2000억 원가량 된다. 시간이 지났지만 글리벡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글리벡에 내성을 보이는 백혈병 환자도 많아져서 새로운 약에 대한 수요 또한 늘어나고 있다. 분자 조각가들의 신약 개발 연구는 현재 진행형이다.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 조각상
아프면 병원에 간다. 병원에서 증상을 이야기하면 의사가 진단을 한다. 보통 일차적인 진단은 문진이나 청진기, 혈액 검사 등이다. 검사로 끝나지는 않는다. 필요한 경우 메스를 들어 수술을 한다. 의사의 도구들이다.
보다 세밀한 차원으로 들어가면 생물학의 영역이다. 현미경으로 세포를 관찰하고 병균을 검사한다. 항체를 이용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병원체를 판별하기도 하고, 좀 더 전문적인 장비를 이용하여 단백질이나 유전자의 이상을 확인한다. 생물학자의 도구들이다.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면 화학의 영역이다. 화학자들은 단백질이나 유전자를 탄소나 질소, 산소의 차원에서 판별하고 어떤 부분에 이상이 발생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화학자들 역시 그들 나름의 차원에서 치료 방법을 연구한다. 그리고 화합물을 조각해 의약품을 만들고자 한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화합물을 어떻게 조각하는 것일까? 눈에 보이지도 않는 크기의 분자를 조각할 수 있는 조각칼은 없다. 영화에 등장하는 나노머신은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런 기계 역시 없다. 칼도 못 만드는데 기계를 어떻게 만들겠는가. 줄기세포의 핵을 스포이트피펫로 치환하는 실험 장면을 미디어에서 자주 접하는 까닭에 화학자들도 그렇게 작업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상은 전혀 다르다. 아스피린 한 알에 들어 있는 주성분의 양은 천문학적으로 많다. 화학에서는 분자의 숫자를 세기 위해 ‘아보가드로수Avogadro constant’라는 상수를 사용한다. 고등학교 화학 시간의 기억을 대충 떠올려봐도 분자의 개수라는 것이 스포이트로 일일이 조작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화학자가 화학반응을 설계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적절한 시약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시약과 플라스크, 유기화학 교과서. 화학자의 도구들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렇게 분자를 조각해가는 방식은 신비한 과정이기도 하다. 화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분자 구조의 특성을 이용해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는 시약을 넣어주는 일이 전부다. 보통 생각하는 이미지와는 달리 막상 화학자가 반응 실험을 하는 것을 보면 한가하기 짝이 없다. 시약을 넣고 교반기를 이용해 섞기만 하면 된다. 교반기의 스위치만 켜면 알아서 시약들이 섞이며 반응이 진행된다. 특별히 위험한 반응이 아니라면 화학자가 굳이 교반기 앞에 서서 지켜볼 이유는 없다.
화학자의 능력이 교반기의 성능과 상관있을 리는 없다. 교반기는 다 거기서 거기다. 중요한 것은 어떤 합성 전략을 짜느냐다. 운전자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경로를 생각하듯이, 화학자들은 만들고자 하는 화합물로 도달할 수 있는 최적의 합성 경로를 고민한다. 그러므로 화학반응은 일종의 길 찾기인 동시에 고차원적인 퍼즐이다. 중간에 어떤 장애물이 있을지, 어떤 구조가 불안정할지를 예측할수록 경로 짜기는 쉬워진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분자를 연필로 그려가며 분자의 특성을 이용해 원하는 모양으로 조각하는 일은 경이로운 작업이다. 그리고 완성한 구조를 확인하는 순간의 희열은 그 어떤 성취와도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짜릿하다. 분자 조각은 어려운 작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재미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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