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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록
이태준, 범우사, 1993
고수의 맛
문장이 빼어나고 사유가 그윽하며 펼치는 곳마다 머물러보고 싶은 산문집을 고르라면 단연 『무서록』이다. 제목이 근사한 산문집을 고르래도 『무서록』이다. 『무서록』은 소설가 이태준이 그의 나이 37세에 발간한 산문집이다. 마흔두 편의 짧은 산문을 순서 없이 실은 글이라고 ‘무서록’이라 했다. 발간 연도가 1941년이니 80년 된 책이다. 그때도 반짝이는 생각을 맛깔나게 쓰는 청년 작가가 있어 그의 기록을 21세기 카페에 앉아 읽는 일이라니!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은 책을 마주하는 일은 놀라운 경험이다.
이태준의 산문은 밋밋한 접시에 툭 얹어낸 요리 고수의 음식 같다. ‘멋’이나 ‘체’ 없이 기품이 있다.
가을꽃들은 아지랑이와 새소리를 모른다. 찬 달빛과 늙은 벌레 소리에 피고 지는 것이 그들의 슬픔이요 또한 명예다.39쪽
이런 구절은 감탄과 함께 무릎을 치게 만든다. 달빛과 벌레 소리에 꽃이 피고 진다니 시에 가깝다.
나는 좋은 산문의 조건을 이렇게 꼽는다. 말하듯 자연스러울 것, 관념이나 분위기를 피우지 않고 구체적으로 쓸 것, 작가 고유의 색이 있을 것, 읽고 난 뒤 맛이 개운하고 그윽할 것. 『무서록』은 이 조건을 모두 갖추고도 다른 장점이 많다. 좋은 작가의 글이 그렇듯 소소한 소재로 뜻밖의 깊이를 끌어낸다. 고아한 문체를 뽐내지만 친근하다. 한자어와 고유어가 균형 있게 쓰인, 옛 어투를 읽는 재미가 있다. 인스턴트만 잔뜩 먹다 뚝배기 우렁된장에 쌈밥을 먹을 때처럼 흡족한 기분이 든다.
『무서록』은 손바닥 크기의 작고 얇은 책이다. 값도 아주 싸다. 가방 없이 훌훌 나서는 산책길 외투 주머니에 쏙 넣어 가기 딱 좋다. 일제강점기를 사는 소설가의 들뜸도 과장도 없이 툭툭 펼쳐놓는 이야기에 쉽게 빠져들게 한다. 게다가 ‘무서록’이니, 아무데나 펼쳐 마음에 드는 제목의 글부터 편히 읽기 좋다.
음악의 시작이 그렇듯이 글의 시작은 중요하다. 허공을 가르고 ‘새로운 생각’이 태어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첫 문장이 매력적인 글이 많은데, 가령 이런 식이다.
찰찰하신 노주인이 조석으로 물을 준다.「화단」, 23쪽
미닫이에 불벌레와 부딪는 소리가 째릉째릉 울린다.「가을꽃」, 37쪽
책(冊)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책」, 69쪽
하 생활이 단조로운 때는 앓기라도 좀 했으면 하는 때가 있다.「병후」, 88쪽
‘찰찰하다’ ‘째릉째릉’같이 입으로 소리 내보게 만드는 신선한 어휘가 수두룩하다. 돌, 벽, 병, 만년필, 물, 파초, 소설 쓰기, 독자의 편지, 낚시 등 평범한 소재가 그의 손을 거치면 특별한 옷을 입은 듯 반짝인다.
요새는 누구나 다투어 산문을 쓰고 책을 낸다. 그만큼 쓰는 데 진입 장벽이 낮아졌다는 소리다. 시나 소설보다 산문을 찾는 독자가 많다고 하니 가히 ‘산문시대’다. 산문의 세계로 뛰어드는 많은 이들에게 한국 산문의 『무서록』 일독을 권한다. “일단 한번 잡숴봐!” 촐랑대는 약장수처럼 외치고 싶다. 시시콜콜하게 살아가는 일은 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삶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해주는 책이다. 무엇보다 킬킬대며 소비해버리고 마는 마음이 아니라 어디 종지만한 그릇에라도 담아두고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책이다.
고전에서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편견이다. 이태준 역시 「고전」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완전히 느끼기 전에 해석부터 가지려 함은 고전에의 틈입자闖入者임을 면하지 못하리니 고전의 고전다운 맛은 알 바이 아니요 먼저 느낄 바로라 생각한다.”115쪽 그러니 좋은 책은 알아먹기보단 우선 ‘느껴보기’가 먼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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