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핵심
1. 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은 최근 들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되풀이된 현상입니다. 혁신도시처럼 인위적으로 인구를 재배치하거나, 공장이나 학교 등의 수도권 진입을 규제하거나, 지방 정부에 더 큰 권한을 이양하는 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시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2. 인구 감소가 반드시 문제는 아닙니다. 인구가 줄면 생활이 더 쾌적해지기도 합니다. 인구가 줄어 가장 큰 문제를 겪는 이들은 자신들의 자리가 줄어드는 정치인과 행정가들입니다. 이 집단들이 지역소멸의 위험성을 과장하거나 지역 이기주의를 조장하고 자기 지역에서 인구가 가장 많았던 시점을 기준으로 삼아 관성적으로 정치적 결정을 내립니다. 이를 멈추게 해야 합니다.
3. 인구 감소가 정말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가족주의, 남성중심주의, 순혈주의를 넘어서야 합니다. 그리고 기존의 도심 바깥에 택지를 새로 개발하는 대신, 기존 도심을 압축도시콤팩트시티화해야 합니다. 신도시를 만들면 인구가 늘어난다는 과거의 경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4. 지역을 도·시·군 단위, 즉 면적面積으로 생각하면 한국 도시의 미래를 올바로 예측할 수 없습니다. 선거를 의식해서 자신들에게 투표할 시민들이 주소를 둔 면적인 ‘단위’만 강조하는 정치인과 행정가들의 생각과 달리, 도시민은 여러 곳의 행정구역을 넘나들면서 선적線的으로 살아갑니다. 도시민의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여러 도시도 교통망과 산업권을 따라 초영역적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메가시티입니다.
5. 도시민과 농산어촌 주민의 이해관계는 같지 않으며, 심지어 대립하기도 합니다. 도시 주변부에 택지를 개발하면 농산어촌 주민들이 그곳으로 이동해서 지역 소멸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도시민과 농산어촌 주민을 모두 만족시키는 정책을 수립하기 쉽지 않습니다. 도시와 농산어촌 두 지역 모두 인구 증가를 끌어낼 여건은 대부분의 지역에 갖추어 있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상호 모순적인 두 유형의 주민을 모두 포함한 도농복합 행정구역들이 연합해서 메가시티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여러 지역의 정치인과 행정가들이 주장하는 행정 통합이나 메가시티 구상이 실패하는 이유입니다.
6. 한국의 인구는 세 개의 메가시티와 몇몇 소권역들로 집중될 것입니다. 서울 핵심 지역의 가치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강남을 대체할 곳은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확장 강남은 현재 경부선·KTX·SRT를 따라 경기도를 넘어 충청남도 천안·아산까지 다다르고 있습니다. 또한, 서울 송파구 잠실지구에서 완성된 강남적 삶의 양식이 전국의 신도시로 보급되고 있습니다.
7. 여러 지자체는 자기 지역이 지역 소멸의 최대 피해자이며 자기 지역에 혜택이 주어지는 것이 바로 지역 소멸을 막는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여러 지자체는 대서울권에 맞서 연합하는 전략을 펴야 하지만, 현실은 이와 반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동남권 신공항 선정이나 광주 군 공항 이전 같은 사안처럼, 지역 간 또는 지역 내에서 일어난 갈등이 해결되지 못하고 갈등이 전국화되는 양상이 곳곳에서 확인됩니다.
8. 현대 한국 정부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시민 복지가 아니라, 북한이라는 특수한 집단에 맞서 국가를 생존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행정수도 세종시의 탄생 과정이 상징하듯이, 현대 한국에서 도시가 형성되고 성장해온 배경은 안보와 국제 정세였습니다. 조선 시대부터 식민지 시기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를 지배한 역대 정부들이 시민 개개인에게 보여준 것은 각자도생의 세계관뿐이었습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어디서 살면 안 되는지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안보·재난·오염 등의 위험 요인은 무의식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무시되어 왔고, 이러한 위험 요인들을 알고 있는 시민들이 이를 모르는 시민들에게 위험을 떠넘기는 폭탄 돌리기가 계속됐습니다.
9. 북한의 세계 전략 변화 특히 핵무기 개발에 따라, 역설적으로 한강 이북 지역의 개발 가능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새롭게 열린 한강 이북 지역이 강남의 확장과 맞물려, 대서울권으로 인구 집중 현상이 심화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대서울권으로 인구 집중 현상이 심화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대서울권이 군사적 긴장 관계에 처해 있어 반사이익을 얻어온 대서울권 이외의 지역들은 진정한 도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10. 미국과 중국의 대립,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등은 새로운 냉전 즉 신냉전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국제 정세 변화에 따라 중국과 러시아와 관련해 지역 개발을 꾀하는 전략도 30여 년 만에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특히 서해안권과 동해안권은 다시 최전방이 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11. 신냉전이 시작된 지금, 통일과 남북 화해는 단기적으로는 물론 중기적으로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통일과 남북 화해를 지역 발전과 연계하여 생각하면 안 됩니다. 1970년대 말에 통일이 비현실적이라고 결론 내리면서 국토의 중심에 임시행정수도가 설계되었으며, 이것은 세종시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국가나 지방 정부가 통일과 남북 화해를 내세우면서 SOC 사업을 일으킬 경우, 명분과 실체를 구분해서 그 사업의 실현 여부와 효과를 판단해야 합니다.
12. 한국의 국토가 좁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 강박관념 때문에 택지를 만들고 철도·고속도로 등의 교통망을 부설한 뒤 사용할 방법이 없어 그냥 버려두는 상황을 전국에서 무수히 확인합니다. 국토가 좁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고 압축도시 건설, 대중교통 시스템 개선 같은 구체적인 정책을 추진해야 합니다. 뚜렷한 전망을 세우지 않고 이루어지고 있는 SOC 사업은 수십 년 내에 지방자치단체들의 재정을 압박할 것입니다.
13. 행정과 정치의 난맥상만 줄여도 한국 도시의 미래는 밝아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특히 지방자치단체 레벨에서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민들은 정치와 행정이 자신의 삶과 자기가 사는 도시의 미래를 책임지지 않으리라 판단하고, 이러한 각자도생의 상황에서 살아남을 힘을 길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이 책을 쓴 이유입니다.
1장
국제 정세
한국 도시의 미래를
결정하는 국제 정세
한국 도시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책에서 국제 정세를 논하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디서 살아야 하는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국제 정세는 한국 도시의 운명을 결정해왔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강원도에서 손꼽는 규모의 대도시였던 철원이 6·25 전쟁 때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어 지역 소멸을 겪은 일과 1970년대 말 북한의 위협이 커져 새로운 수도를 만들기로 결정한 것이 30여 년이 흐른 뒤 세종시를 탄생시킨 일이 있습니다.
책이 출간될 2023~2024년 겨울 시점에 러시아의 침략을 받아 한때 멸망 직전에 몰렸던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독립을 지켰고, 점령된 지역들을 되찾기 위해 반격하고 있습니다. 6·25 전쟁과 비교하면 1950년 겨울쯤과 비슷합니다. 6·25 전쟁이 이로부터 2년 이상 이어진 것을 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지금까지 흘러온 시간의 최소한 두 배 이상은 걸려야 어떤 형태로든 끝이 보일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한국 방산업체들의 호황도 이어질 겁니다. ‘한국판 록히드마틴’을 꿈꾸는 한화그룹이 자리한 창원 등의 남부 도시는 미국 방산업체들이 밀집한 워싱턴 DC 일대 같은 위상을 띨 것입니다. 창원은 1970년대에 박정희 정부가 핵무기를 개발했던 도시입니다. 그 창원이 이번에는 서방 진영에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핵심 거점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