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정의를 향한 겸손한 구도자
지금 대한민국은 역사적인 전환기를 맞고 있다. 전지구적 기후위기, 가파른 고령화와 저출생, ‘챗 GPT’로 대표되는 AI시대의 개막….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안팎의 사회분위기 속에서 그에 걸맞은 새로운 가치혁명이 필요하고, 사회시스템의 기조에서 운영방식까지 실로 많은 것들이 바뀌어야 하는 시점이다.
2021년 7월, 195개국이 가입한 유엔무역개발회의UNCATD는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격상시켰다. 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을 거쳐 마침내 국제사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140여 국가들 중 유일한 케이스다.
대한민국은 해방과 동시에 분단·전쟁·백색독재·군부독재·산업화·민주화의 힘겨운 도정을 거쳐왔고, 좀 더 소급하면 기나긴 조공의 세월과 35년 식민지배의 굴욕을 겪었다. 한반도는 아직도 분단 상태이고, 전시작전지휘권도 회수하지 못한 상태이며, 친일잔재와 군사정권의 적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진국 대역에 올라선 것은 국가적인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앞에 놓인 시대적 과제들을 현명하게 해결하고 국제사회를 이끄는 리더 국가가 되느냐 여부는 지금과 같은 대전환기를 이끌어갈 지도자와 정부의 역량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1천년 동안 겪을까 말까 하는 역경과 시련을 우리는 10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한꺼번에 겪어왔다. 실로 만만치 않았던 그 시절을 통과하여 마침내 선진화를 이뤄낼 수 있었던 핵심 키워드는 단연코 ‘민주화’일 것이다. 민주화로 인해 사회가 유연해지면서 문화·예술을 비롯한 많은 분야에서 한민족 특유의 창의력이 발휘되었고, 경제발전에도 윤활유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곧 민주화의 역사이며, 그 도정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희생이 깃들어 있다.
예수의 길, 정의의 길
박정희 군부독재가 절정에 이르렀던 1970년대와 전두환 신군부가 살육을 일삼던 198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동안 사제복을 입고 정의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겸손한 구도자가 있다.
불의한 집단이 총칼을 꿰어 차고 세상을 지배하면서, ‘유신만이 살길이다’ 또는 ‘정의사회 구현’ 따위의 통치 용어가 마치 시대정신인 양 변주되면서 이 땅은 중세를 방불케 하는 암흑기로 빠져들었다. 잔인한 마녀사냥이 버젓이 자행되고, 성경을 손에 든 몽상가와 연금술사들이 서울 요지에 바벨탑을 쌓아 올리고, 한때 멀쩡했던 교계의 지도자들이 국가원수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어 독재자의 만수무강을 축원했다. 17세기 유럽의 ‘장미십자가 사건’을 방불케하는 사건들이 잇따랐고, 그 이념적 광기는 여차하면 북쪽을 향한 새로운 ‘십자군 전쟁’도 불사할 태세였다.
그러나 이러한 야만의 시기에도 깨어 있는 성직자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있었고 특히 학생과 노동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의 치열한 반독재투쟁과 김재규 장군의 거사가 마침내 유신의 심장을 멈추게 했고, 몇 년 뒤에는 노도와 같은 6월항쟁으로 기어이 살인마의 폭정을 정지시켰다.
이후 이른바 ‘1987년 체제’가 만들어졌고 몇 차례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유신과 5공의 물적·인적 토대 위에 들어선 ‘민주화’는 너무나도 허약해서, 시대를 건너고 세대를 가로지르는 동안 발전과 퇴보, 혁신과 수구가 반복되었다. 마치 해방 후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친일잔당이 주류가 되었듯이, 유신과 5공의 미청산으로 인해 그들 변통세력이 주역 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의’라는 불쏘시개를 들고 광야를 쉼 없이 순례하는 성직자가 바로 함세웅 신부다. 세월이 흐르면서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제가 걷던 길에서 이탈했어도 그는 특유의 온화함과 명징한 시대정신으로 초지일관 예수의 길, 역사의 길, 정의의 길을 걷고 있다.
시대의 징표를 깨닫는 것은 신앙인의 책무다. 시대와 무관한 삶이 불가능하듯 시대와 무관한 신앙인은 존재할 수 없다. 시대의 징표란 바로 세상 한가운데서 하느님을 깨닫게 하는 하느님 자신의 표지이기도 하다.
― 함세웅, 「정의구현운동의 시대적 배경」 중에서
함세웅 신부의 생애는 시대의 징표를 찾고 실천하는 구도자의 삶이었다. 그는 세속에 사는 사제이지만 속되지 않았고, 80세의 연치에 이르렀지만 노쇠하지 않았다. 중책을 맡은 과제들이 산더미인데도 일처리에 삿됨이 없는 모습은 한 시대의 가치기준으로 삼기에 조금도 모자라지 않을 터이다.
그의 생애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 민주회복국민회의 대변인, 두 차례 투옥, 가톨릭대학교 신학과 교수, 평화신문·평화방송 대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위원회 공동대표,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원 원장,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인권의학연구소 이사장 등으로 이어져왔다. 큰 줄기만 헤아려도 이렇다. 하나같이 아무나 하기 어려운 일들이고, 함부로 맡기지도 않는 자리다.
그는 간판과 허울에 집착하는 여느 ‘명사’들과는 달리 열과 성으로 맡은 소임을 다한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하지 않는 성실성을 보인다. 민주화운동에 나섰던 명사들 중 더러는 지치고, 상당수는 관복을 입고, 혹자는 변신하여 반동적 수구파가 되고, 일부는 얼치기 진보 행세를 하며 진영을 마치기도 했다. 야만성이 짙었던 오랜 격동기에 지명도 높은 인물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품격 있게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신념과 명징함을 잃지 않고 스스로의 신념을 확산시키고자 노력해왔다. ‘정의’라는 시대적 가치로 정신무장을 단단히 한 까닭이리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한국 사회에는 아주 오래되고 견고한 가치관이 하나 있다. ‘긍정적 마인드’가 그것이다.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 특히 강조하는 것인데, 일체의 비판이나 반대를 삼가고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와 달리 ‘부정적 마인드’는 탈락의 대상이 된다. 회사 직원뿐 아니라 주변의 친구나 동료들을 평가할 때도 ‘긍정적’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긍정적인 기준으로 널리 사용된다.
과연 옳은 가치관일까?
진리에 이르는 방식인 ‘정-반-합’의 변증법 이론이 아니더라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길이 반드시 긍정적이어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 선조들은 재주가 있고 태도가 올곧은 청소년을 “품행이 방정方正하다”라고 평가하였다. 해방 후부터 1970~80년대까지 초등학교 상장에도 종종 쓰이던 표현이다. ‘방정’이란 “언행이 바르고 의젓하고 점잖음”국어사전이라는 뜻이다. 방정의 ‘방方’은 사각형의 모가 난다는 뜻으로, 순종과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가 나는 비판적·합리적 인물보다 둥글둥글한 순종형을 선호한다. 부려먹기가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일제와 독재자들이 원했던 인간형이 알게 모르게 우리의 내면 깊숙이 각인되어온 것이다.
프랑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장 프랑수아 칸은 《인류 역사를 진전시킨 신념과 용기의 외침 NO!》라는 방대한 저술을 통해 기원전의 테베에서 20세기말의 천안문까지, 인류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반역과 저항 사례들을 제시하였다. 노예제도에 대한 ‘No’, 봉건제도에 대한 ‘No’, 드레퓌스파의 고귀한 ‘No’ 등 30여 가지의 ‘No’에 관해 쓰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들의 용감한 외침이야말로 우리의 무사안일과 순응주의를 깨뜨리는 쇠망치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