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사람들 이야기
이란주
이주 인권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저서로 제2의 ‘전태일 평전’이라고 평가받은 『말해요, 찬드라』와 『아빠, 제발 잡히지 마』, 『나의 미누 삼촌』, 『이주노동자를 묻는 십대에게』, 『나는 미래를 꿈꾸는 이주민입니다』, 르포 소설 『로지나 노, 지나』 등이 있다.
〈오징어 게임〉 199번 참가자 알리는 나이 든 한국인 남성들을 ‘사장님’이라 부른다. 자영업자 비율이 원체 높으니 사장님이 매우 흔한 사회이기는 하지만, 알리의 사장님 소리는 맥락이 좀 다르다고 봐야 한다. 적절한 상황이든 아니든 이주노동자가 한국인을 ‘사장님, 사모님’이라 칭하는 일은 흔하다. 일터에 붙박여 바깥 사회를 경험하거나 이웃을 만나 관계를 맺을 기회가 별로 없으니 다른 호칭을 익히지 못해서다. 그 배경에는 이주노동자는 일이나 하라는, 이웃과의 친교도 사회 참여도 필요 없다는 한국 사회의 경박한 요구와 정책이 작동하고 있다.
한국인 다수는 알리의 ‘사장님’ 소리가 불편하지 않다. 이렇게 ‘사장님 마인드’는 미디어를 통해 재현되고 더 깊이 내면화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한국인의 마음 밑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고는 자주 튀어나와 이주자에 대한 무시, 차별, 혐오, 기피, 배제와 같은 형태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한편 이주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 ‘사장님’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 노력은 번번이 실패한다. 이주노동자 시인 람 꾸마르 라이는 이렇게 읊었다.
사장 아버지 / 나는 내 젊음과 목숨을 바쳐 / 할 수 있는 만큼 몸과 마음을 다해 / 당신의 얼굴에서 / 만족한 행복을 찾으려 했습니다 / 하지만 이제 알게 되었어요 / 그것은 단지 부질없는 노력이었음을 / 단지 실패한 노력이었다는 것을요.
― 「실패한 노력」 중에서.
시인은 사장 아버지 마음에 들기 위해 날마다 밤마다 자신을 혹사하며 일한다. 그러나 사장 아버지는 하필 힘들어 허리를 펴는 순간 들어와 책망하는 눈빛으로 쏘아보고, 화장실 갈 때만 들어와 시인이 마냥 기계를 세우는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거듭되는 실패 끝에 노동자는 결국 알아 버린다. 사장 아버지는 끝내 만족하지 않을 것임을. 자신이 허리를 펴지 않고 화장실을 가지 않아도 결코 인정받지 못할 것임을.
우리 사회는 이주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 일하러 왔는지 관심 두지 않는다. 어떤 미래를 꿈꾸는지 알고자 하지 않는다. 소용이 다하면 국경 밖으로 내치고 새로운 노동자를 들여오면 그만이다. 가까이서 태어나고 늙어 가고 죽는 것을 바라볼 필요가 없다.
이런 표현은 전혀 과하지 않다. 실제 고용허가제는 18~39세 사이의 노동자를 3년 단위로 교체하는 제도이다. 원칙적으로 사업장 이동을 허용하지 않고, 가족 동반을 허용하지 않으며, 정주 또한 허용하지 않는다. 차별 없이 적용해야 할 〈근로기준법〉의 일부 조항은 망설임 없이 유예한다. 짧은 시간 일 시키고 내보낼 것이므로 사회 통합을 고민하지도 않는다. 성원권을 인정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무엇 하나 온당치 않다.
이주자는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이주민, 이주노동자, 결혼이주자, 귀환 동포, 난민, 그리고 그 자녀들. 이주자들은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나 이 사회는 호락호락 허용하지 않는다. 노동력을 뿌리까지 뽑아낸다. 저임금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옭아매고,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가난은 동정한다. 세금은 가져가되 복지 체계에서 배제하고, 지원이 필요한 상황에 놓이면 민폐 덩어리로 취급한다. 시인의 말을 다시 들어 보자.
결코 패배하지 않았음에도 / 당신의 눈에는 한참 부족한 / 당신의 마음에는 언제나 패자인 / 불행한 사람 /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 「실패한 노력」 중에서.
이주자는 따뜻한 숨을 쉬고, 웃고, 사랑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자 하지만, 그것은 이 사회가 알 바 아니다.
우리 사회에 이주자가 들어온 지 30년이 훌쩍 넘었다. 그 수가 꾸준히 늘어 지금은 인구의 약 4퍼센트에 해당한다. 앞으로는 더 심각해질 인구구조 변화와 인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이주자를 받아들일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처럼 이주자를 잠깐 쓰고 버려도 되는 일회용으로 여기는 것은, 더 이상은 곤란하다.
어떤 자세로 이주자를 초대할지에 대한 원칙을 이제라도 세워야 한다. 그 원칙에는 이주자가 안고 오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의 일생에 대한 환대가 담겨야 할 것이다. 이주자의 존엄에 대한 인정, 평등한 분배와 인권과 다양성 존중이 녹아 있어야 할 것이다. 이주자와 더불어 사회적 동질성을 찾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함께 미래를 구상해 가야 할 것이다.
이런 현실과 바람을 담아 우리는 지금 여기 ‘이주자의 삶’을 기록한다. 살아남으려 열성을 다하고 자존하려 애쓰는 이주자의 삶, 발 걸려 넘어질 때마다 재게 일어나 묵묵히 살아 내는 이주자의 삶을 오롯이 드러내고자 한다. 이런 이야기가 어쩌면 불편할 수도 있다. 차별당하는 삶이 자주 드러날 것이고, 고단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굴곡진 생애사가 짜증날 수도 있고, 뭐라도 해줘야 할 것 같아 마음에 부담이 생길 수도 있다. 혹은 이주자의 존재 자체가 두려워질 수도 있다.
설사 그렇더라도 책장을 덮지 말고 계속 읽어 내기를 청한다. 이주자는 저어한다고 지워질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이 읽기를 지속한다면, 그동안 무심코 스쳐 갔던 이주자가 분명한 온기를 가진 사람으로 새로이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할 당신을 환대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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