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온 코끼리
초록길도서관이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어깨까지 머리를 늘어뜨린 청년이 날마다 목발을 짚고 찾아와 도서관 한쪽에서 조용히 책을 읽었다. 불광천에서 자전거를 타다 다리를 다쳐 일을 못 하고 쉬고 있다고 했다. 커피 한 잔을 대접하며 친분을 쌓았다. 이 청년은 머지않아 어린이들을 사로잡아 초록길도서관의 실세가 된다.
이 청년의 직업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놀이설계자라고도 했다가 골목놀이연구소 소장이라고도 했다. 쌤쌤이라 불리기도 하는 그의 이름은 ‘고길희’, 아이들은 줄여서 ‘고기’라고 불렀다. 1년쯤 지나서야 고길희는 코끼리를 따서 만든 가명이고 박종원이라는 실제 이름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 TV 인기 드라마에 고길희와 딱 들어맞는 캐릭터가 나온 적이 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9회 방영분에서 학원 차를 빼돌려 아이들을 데리고 산으로 가서 노는 바람에 재판에 넘겨진 자칭 어린이해방군사령과 ‘방구뽕’이라는 등장인물이다. 나는 이 캐릭터가 고길희를 보고 쓴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방구뽕이 초등학교 때부터 입시를 준비하는 강남학원의 아이들과 함께 놀았다면, 고길희는 아이들이 행복하길 바라며 만든 동네 작은도서관을 찾아왔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방구뽕은 아이들과 즐겁게 논 죄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고길희는 초록길도서관의 엄청난 스타가 되었다. 솔직히 지금도 고길희의 사고방식을 오롯이 이해하진 못한다. 그래서일까? 프로그램을 기획하거나 진행할 때 나와 몇 번 부딪친 적도 있다. 나는 도서관 프로그램이 좀 더 계획적이길 바랐고, 무엇보다 안전과 질서를 우선시했다. 반면 고길희는 무계획과 자유로움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번번이 내가 졌다. 고길희의 뒷배가 초록길도서관의 어린이들이었으니까.
고길희는 아이들과 반말로 대화하고 또래처럼 싸우기도 했다. 주말이나 방학이면 아이들을 모아서 산으로 들로 놀러 다녔다. 특별한 놀잇감 없이 흙을 파고 놀거나, 나무에 밧줄을 걸어 그네를 타기도 하고, 다 함께 물총놀이도 했다. 여름이면 바닥분수가 있는 상암동 월드컵공원까지 가서 한바탕 놀거나 북한산 계곡으로 물놀이를 나섰다. 아이들과 무엇을 하며 놀았는지 세세하게 알지는 못한다. 나를 끼워주지 않았으니까. 내가 고길희에 대해 확실히 아는 건, 아이들과 함께 약속을 정하고 약속을 어기는 아이가 있으면 싸운다는 것이다. 고길희는 아이를 혼내는 게 아니라 싸웠다. 다 큰 어른이 아이들과 종종 싸우는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했다.
나와 도서관 운영위원들과 부모들은 간식이나 보탤 뿐 개입할 수 없었다. 끼어드는 순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고길희와 아이들의 세계를 침범하는 상황이 돼 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초록길도서관은 원래 시끄러운 도서관이었는데 고길희가 오면 한층 더 시끄러워졌다. 이 때문에 동네 주민의 민원도 여러 차례 받았다. ‘골목길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녀야 정상이죠. 아이들 소리 듣기 싫으면 시골로 이사 가시든가요!’ 이건 속엣말일 뿐, 항의하러 오시는 분들껜 주의를 주겠다는 말로 무마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길희가 해도 해도 너무한 사고를 치고 말았다. 도서관 앞 길바닥에 분필로 선을 그어 사방치기를 하거나 낙서하는 정도는 괜찮은데, 한겨울 서울 한복판 주택가에서 불을 피운 것이다. 고길희는 어디서 깡통을 주워 와 나무를 넣고 불을 피웠다. 그 불에 양미리라는 꽁치같이 생긴 생선을 굽고 귤도 구워 아이들과 나눠 먹으며 논 것이다. 노는 데 진심인 건 알겠는데, 도서관 앞에서 불까지 피우다니, 관장인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 여기서 자꾸 이러시면 도서관 문 닫아야 합니다!”
다행히 불을 피우는 사고가 다시 벌어지진 않았다. 고길희가 친 대박 사건은 아이들에겐 엄청난 즐거움을 선사하며 짙은 추억을 남긴 반면 관장인 나와 운영위원들에겐 아찔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후로도 초록길도서관에서 고길희와 아이들이 벌인 신나는 모험과 놀이는 한가득이다.
도서관의 주인은 누구일까? 제안하고 만든 사람일까? 자기 시간을 내어 도서관을 운영하는 사람일까? 즐겁게 이용하며 추억을 쌓는 사람일까? 어느 날 도서관을 찾아온 코끼리는 나에게 숱한 질문을 남겼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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