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앞줄에서 알려드립니다
우리는 그저 앞줄에서 먼저 바이러스를 만난 것뿐입니다. 그래서 뒷줄에 서 계신 당신들께 알려드립니다. 우리가 먼저 경험한 것들을, 느끼는 것들을, 필요한 것들을 말이지요.
‘한국청소년·청년감염인커뮤니티 알’의 활동가들은 코로나19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범유행의 첫해인 2020년 7월 ‘후천성면역결핍증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 AIDS, 에이즈 예방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단체 의견서 초안에 이와 같이 썼다. 이 문장들은 의견서를 수정해나가는 과정에서 그 흐름이 조금 달라졌지만, 나는 여기에 아주 깊은 진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신종 호흡기 감염병이 대유행하는 와중에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 사람면역결핍바이러스/AIDS 인권 활동가들은 자신과 동료 감염인들을 앞줄에 선 사람으로, SARS-CoV-2라는 새로운 바이러스와 마주쳐 크게 놀란 사람들을 뒷줄에 선 사람으로 부른다. 앞줄에 선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뒷줄의 사람들은 앞줄의 사람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일까? 여기서 앞줄과 뒷줄의 구분은 단순히 바이러스 감염 여부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나는 감염이라는 우연한 계기로 앞줄에 서게 된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보며, 경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한 공간에 있는 ‘우리’를 나누어 구별하는 선, 함께 있어서는 안 된다는 금지가 어떻게 감염을 계기로 선명하게 생겨나고 이렇게 오래 유지될 수 있는지가 다시금 생경하게 느껴졌다.
HIV에 감염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결과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크게 달라져왔다. 1980년대 미국을 시작으로 이 새로운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갈 때, HIV 감염은 생명을 위협하는 여러 심각한 병을 일으켰다. 후천성면역결핍증은 하나의 증상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HIV 감염 이후 장기간 치료를 받지 못할 경우 나타날 수 있는 특유의 여러 질환을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1987년 HIV 치료에 활용할 수 있는 약제가 처음 파악되었고, 이후 여러 치료 약제가 개발되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여러 항바이러스제를 동시에 사용하는 효과적인 치료 방식이 자리 잡으면서 HIV 감염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결과가 크게 달라졌다. 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하는 효과적인 약물 치료를 받으면, HIV 감염은 더 이상 면역 기능 저하와 그에 따른 심각한 감염성 질환 및 암의 발병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의학적으로 HIV와 AIDS는 더 이상 HIV/AIDS라고 꼭 붙여 쓸 필요가 없을 만큼 서로 거리가 멀어졌다. 감염과 발병 사이의 연결선을 완전히 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HIV 감염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훼손으로 오인誤認될 때, 먼저 감염한 사람들은 이미 스러진 사람이자 아직 감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불행을 전파할 위험한 존재가 된다. ‘오인’, 즉 어떤 사물이나 사실의 본래 속성을 다른 것으로 착각하는 일은 지식의 부족이나 의도하지 않은 실수로 일어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한 사회의 상징 구조를 통해 강제되는 일에 더 가깝다. 바이러스가 야기할 수 있는 질병의 속성이 크게 달라졌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HIV를 위반에 대한 경고로, 두려움을 느끼라는 강력한 신호로 읽는다. 이 낡은 상징 구조에 기대어 만들어진 감염한 인간에 대한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잔혹한 상상은 아마 좀비일 것이다. 많은 좀비 영화가 바로 이 앞줄과 뒷줄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며 시작한다. 갑작스럽게 무언가가 사람들을 덮치고, 뒷줄에 있던 사람 중의 하나가 결국에는 좀비와 맞서 싸우는 주인공이 된다. 주인공은 혼란의 한가운데에 있지만, 자기 앞의 사람들이 먼저 공격을 당하는 사이에 상황을 모면하고 탈출할 겨를을 얻는다. 앞줄에 있던 사람들, 낯선 그 무언가에 먼저 휘말린 사람들은 이제 장면에서 사라질 차례이다.
운 좋게 뒤에서 도망칠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우연히 앞에 서 있었던 사람의 시점에서 상황은 매우 다르게 펼쳐진다. 누군가는 결국 앞에 서게 될 수밖에 없는데, 앞과 뒤의 구분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지은 죄가 많아서, 경솔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잘못해서 앞줄에 서 있는 게 아니다. 새로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여기에 가장 먼저 휘말리는 사람들이 바로 경계의 시작 선,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프런티어에 서게 된다. 좀비 아포칼립스라는 장르는 감염의 우발성을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는 새로운 기준으로 만들고, 감염한 존재에게는 들여다보고 의미를 읽어내야 할 표정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의 얼굴은 인체의 특징을 유지하기는 하나 오로지 두려운 것, 더럽고 추한 것이지 표정을 가진 누군가의 얼굴은 될 수 없다. 얼굴에 표정을 부여하는 순간, 말의 가능성, 소통의 가능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좀비와 같이 위험한 존재를 만들어내는 그 무엇은 감염성이 있는communicable 것으로 여겨지지만 동시에 감염한 존재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을 할 수 없는, 즉 소통 능력을 상실한 사물로 전환된다. 그래야만 이미 감염했다고 특정된 존재를 회피하거나 제거해야 하는 대상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HIV/AIDS 인권 활동가들이 앞줄과 뒷줄을 구분할 때의 위치 감각은 바로 이 새로운 출현이 동반하는 우발성과 경계 짓기의 폭력 속에서 사물화되어야 했던, 그래서 얼굴을 잃어야 했던 집합적 경험에서 나온다. 낙인의 작동 방식이 바로 이러하다. HIV라는 바이러스를 먼저 만났다는 이유로 한국의 감염인들은 정상성의 규범에서 벗어난 존재이자 질병 확산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문란하고 위험한 일탈자라는 낙인을 부여받았다. 이 차별의 인장은 그 무늬가 겹치는 여러 다른 종류의 성적 낙인들과 이어져 있다. 낙인烙印은 쇠붙이를 불에 달구어 찍는 도장을 뜻하는데, 영어 스티그마Stigma 역시 비슷한 어원에서 유래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죄인의 몸에 지울 수 없는 인장을 찍는 행위는 특히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주로 얼굴에 행해졌다고 한다. 얼굴에 낙인이 찍힌다는 것은 결국 인간으로서 얼굴을 잃는다는 것을 뜻한다. 누구도 그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으려 하지 않고 죄인의 표식만을 볼 때, 낙인은 얼굴의 고유함을 지워버린다. 낙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인간성과 개인성을 언제든 빼앗길 수 있다는 뜻이다. 결국 이러한 비인간화의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인장이 새겨진 얼굴을 숨기는 수밖에 없다.
먼저 감염하면 세상 모두가 알아볼 표식이 찍힐 거라는 두려운 예감은 더 이상 소수의 것이 아니다. 코로나19 범유행의 초기 상황에서 이미 여러 사람들이 관내 몇 번째 확진자라는 행정적 숫자가 죄인의 표식처럼 붙는 경험을 했다. 숫자가 커질수록 그 무게가 줄어들긴 했지만, 더 중요한 점은 한국 사회가 ‘1호가 될 순 없어’ 같은 가벼운 말로, 낙인의 폭력에 맞서기보다는 무섬증을 적당히 감춰왔다는 사실이다. 내가 먼저 감염해서는 안 된다는 불안은 단순히 새로운 질병에 대한 걱정이나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염려에 그치지 않았다. ‘1호’가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충분히 예상되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두려워해야 했다. 감염 사실은 곧 규칙을 어긴 일탈의 증거로 여겨질 것이고, 나의 존재는 “건전하게 평범한 인격체에서 더럽혀지고 무시되는 인격체로 전락”하고 말 거라는 예감을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었다. 결국 감염은 개인의 문제가 되었고, 개인들은 방어 태세를 먼저 갖추어야 했다.
‘나는 아직 감염하지 않았다’는 증명이 방역 지침을 성실히 이행한 좋은 시민이라는 유일한 증거처럼 작동하는 사회에서 ‘나는 먼저 감염했을 뿐이다.’라는 선언은 방어적 웅크림과는 전혀 다른 몸의 자세를 요구한다. 더 이상 감염한 것을 죄스럽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겠다는, 수치심을 강요당하지 않겠다는 자긍의 선언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지금을 직시하고 다음을 예비하겠다는 용기가 여기에 있다. 감염인으로서 자신이 이 새로운 듯 보이지만 사실은 오래된 재난의 맨 앞줄에 서 있다는 선언은 한국 사회에서 HIV를 휘감아온 낙인의 사슬에 이미 큰 금이 가고 있다는 걸 드러낸다.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은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의 첫 장에서 비인간화의 폭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인간성이 생겨나는 때를 마태복음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해 “꼴찌가 첫째가 되고”야 마는 순간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식민화와 낙인화의 공통성을 깨달을 수 있다. 양자 모두 인간성에 대한 탄압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맨 앞줄에 있다.’라는 HIV 감염인의 선언에는 번져가는 재난 앞에서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차별과 배제의 힘에 대항하겠다는 새로운 연대성의 기획이 자리해 있다. 앞줄의 사람들은 바삐 숨거나 도망쳐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외려 뒷줄의 사람들에게 전해줄 말이 있는 이들이다. 해줄 이야기가 있다는 마음에는 두려움에 휩싸여 끝없이 달아나려는 탈주의 욕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용기가 있다. 전할 이야기가 있을 때, 앞줄은 버려진 사람들의 자리가 아니라 먼저 겪은 사람들의 자리, 다음 사람이 홀로 고통받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사람들의 자리이다. 경계선이 결정하는 운명을 바꾸고, 함께 있을 장소를 찾는 사람들의 자리이다.
한국의 여러 HIV 감염인 단체 그리고 그들과 함께해온 인권운동은 바로 이 앞줄의 자리에서 뒷줄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자신은 HIV/AIDS 같은 낯설고 무섭게 느껴지는 감염병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 혹은 재난으로 간주되는 어떤 사건을 먼저 맞이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를 느끼며 그저 멀찍이 떨어져 있고 싶은 사람들, 나아가 앞줄에 서야 했던 사람들을 죄인이자 패배자라는 비난하며 자신은 승리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도 알려줄 것이 있다고 말이다. 이들이 해온 이야기에는 불의에 대한 깊은 분노와 날카로운 비판 의식이, 숨겨진 상실과 함께 나누지 못한 애도의 기억이, 그리고 어떻게 다른 세상을 열어갈 것인가에 대한 대담한 통찰이 있다. 이 책은 HIV에 휘말린 사람들이 앞줄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서 무얼 알려주려고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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