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노년 탐사 여정을 시작하겠습니다
만 65세, 지하철 무임 교통카드를 발급받는 순간 누구나 공식적으로 노인이다. 주민센터2016년부터 ‘행정복지센터’로 명칭 변경. 창구에서 태연한 척 경로우대증을 받아 들지만 머릿속에 작은 지진이 일어난다. 공짜 지하철이 기쁘면서도 살짝 서글프다. 마침내 할머니가 되었다는 실감이 이런 맛인가?
나의 친애하는 롱디 남편은 사과밭이 펼쳐진 대구의 한 골짜기에 산다. 호작질 전문가를 자처하며 목공과 별 보기, 약초 연구 등의 취미로 하루 24시간이 바쁘다. 몇 해 전에는 경북 청도의 작은 산속에 움막을 짓더니 자연인 놀이에 날 새는 줄 모른다.
딸과 아들은 결혼하지 않은 채 각자 독립해 온 가족이 주민등록상 1인 가구가 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덕분에 나는 자유인 신분을 획득한 셈인가. ‘결혼한 독신주의자’라는 별난 정체성을 마침내 밝힐 차례다.
만 65세. 앞으로의 삶은 이제까지와 전혀 다를 것이다. 늙는다는 건 낡아간다는 것. 몸과 마음이 낡고 병들어 천천히 죽어갈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현타’가 온다. 아찔하다.
거울 속의 나를 본다. 피부는 꺼칠하고 얼굴빛은 칙칙하다. 더 어두운 건 내 마음이겠지. 직장생활을 오래해왔다고 하더라도 인적 네트워크는 더욱 가파르게 줄어들 것이다. 3년에 걸친 팬데믹으로 이미 인간관계는 구조 조정기를 거친 처지다. 왠지 내 영역이 더 쪼그라진 느낌. 이렇게 계속 초라해질 게 분명하다.
이제부터 진정 결핍되는 건 ‘새로움’일 테다. 밋밋한 하루하루가 쭉 이어지고, 설레고 신나는 일은 많지 않을 거라는 예감. 불길하다.
에잇! 무작정 집 밖으로 나가보지만 갈 곳이 마땅찮다. 걷다 보니 주민센터 앞이다. 부설 문화센터 간판도 보인다. 평소 지나치던 곳이지만 한번 들어가볼까? 로비에 있는 교육 프로그램 전단을 들여다본다. 근육 소실 예방 PT, 요가, 스트레칭, 필라테스부터 유화와 서예, 연필 스케치가 있다. 팝송교실, 노래교실, 라인댄스, 그리고 우쿨렐레와 하모니카까지 엄청 다양하다. 일본어와 영어, 중국어 강좌도 수준별로 몇 개씩 있다.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동네문화센터 성인 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추세가 반갑다. 전문 학원이 아니어서 수강료도 비교적 부담이 없다. 게다가 30~50%까지 경로 할인도 제공한단다. 이처럼 잘 짜인 평생교육 인프라를 갖춘 나라에서 노년을 맞은 건 엄청난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바로 지금! 뭐든 입맛대로 골라 저질러볼까? 이제부턴 어엿한 시간 부자니까. 젊은 시절 해보고 싶었던 기타 레슨을 받거나 수채화를 맘껏 배울 수 있다. 탁구나 태극권으로 건강을 챙기는 것도 좋겠다. 이럴 때 배우지 않으면 또 언제 배우겠는가? 갑자기 새롭게 할 일이 생긴 것 같다. 뭔가 목표를 세워야겠다.
자식들이 독립하고 난 후 ‘빈 둥지 증후군’자녀가 대학에 입학하거나 취직, 결혼과 같은 이유로 독립했을 때 부모가 느끼는 상실감과 슬픔.을 겪는 노년 여성들이 많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머리칼도 빗지 않고 시름시름 앓던 어느 날 아침, 번개처럼 다가온 생각 하나! “그래, 둥지를 비웠으니 채우면 되지. 낡은 것 위에 새것을 더해보는 거야.”
서울시50플러스 서부캠퍼스중장년층을 위한 통합지원정책을 추진하는 기관. 중장년 생애 설계 및 직업 교육과 취업 지원 등을 돕는다.에서 블로그 만들기 강좌를 수강한 게 시작이었다. 댄스스포츠와 펜화, 중국어까지 매해 한 프로그램씩 배우게 된 경위다.
우리 세대는 단군 이래 최초로 백세 시대를 맞았다. 남은 생을 무엇으로 어떻게 채워야 할까. 노년에 이른 모두의 큰 숙제다. 해답은 바로 지금, 노년기를 바라보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 우리 생애 ‘세 번째 30년’으로 정중하게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을 장착하자는 말이다. 노년을 늙고 병들어 죽는 일밖에 남지 않은 여생 또는 죽음의 대기실로 생각하지 말고, 숨 쉬는 마지막 날까지 삶이라는 무대에서 자신이 주인공임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 하나. 아무도 나의 행복을 위해 뛰어주지 않는다. 아무도 나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배우자도 자식도 각자의 삶을 산다. 반평생 그들을 위해 살아왔지만 드디어 나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때가 온 것이다. 이제부터는 스스로 행복의 자가 발전기를 돌리는 수밖에 없다.
뭔가 배우는 것은 그 자체로 새롭다.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 설레면서도 한편으론 두렵다. 그렇다고 골머리를 앓으며 공부할 필요는 없다. 배우는 게 어느덧 놀이가 된 나이인 만큼 하나하나 배우고 익혀가는 재미를 찾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보너스 적립금처럼 쌓이는 것들이 있어 즐겁다. 진학이나 취업을 위한 공부가 아니어서 얽매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린 자유인이다.
누군가를 나를 ‘일반적이지 않은 할머니’라고 표현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년이란, 그리고 할머니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벗어던지기만 하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 타인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을 때 더 자유로워진다.
여성 노인들이 모두 나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조금 더 명랑하게 세상을 보는 것, 나쁘지 않다. 배움을 통해 스스로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노년과 이번 생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2023년 11월
정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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