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각보다 생각할 것이 많은 박물관 글
박물관의 학예연구직은
다양한 원고를 쓴다
학예연구사는 소장품과 전공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진행하는 사람이다. 학술 논문을 쓰는 연구자이기도 하고, 상설 전시와 특별 전시를 위한 전시 원고는 물론 설명 카드, 도록용 원고를 쓰는 큐레이터 일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기자와 언론을 상대로 박물관의 전시와 연구 조사, 행사를 홍보하는 보도 자료를 쓰며, 전시 영상물의 스크립트와 자막용 원고, 오디오 가이드용 원고를 쓴다.
학술 정보나 전문적인 주제를 다루는 박물관의 글은 에세이·소설·시 등과 같은 문학 작품의 글과는 서로 목표하는 바가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글도 독자에게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감동을 줄 수 있다. 예를 들면 인디라이터Independent Writer들의 인문 교양서가 이에 해당한다. 그들은 문학 작가는 아니지만 전문 분야의 깊이 있는 지식을 일반 독자들에게 쉽고 감동적으로 전달한다. 그들의 글쓰기는 학예연구사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좋은 글과 문장을 자주 접할수록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욕구와 의지가 커질 확률이 높다. 지식과 정보, 생각과 성찰을 잘 전달하기 위해 고민하고, 전달을 가로막는 요인을 따져보며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 고민하는 시간은 분명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된다.
박물관의 글쓰기는
흔하게 다뤄지는 주제가 아니다
박물관의 글쓰기도 일반적인 글쓰기처럼 바르고 좋은 글이 담보해야 할 공통된 요건과 원칙을 따른다. 하지만 그 목적과 방향에서 명확히 구별되는 점이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박물관의 글’이란, 박물관 사업의 일환으로 생산되는 글을 가리킨다. 큐레이터 개인의 논문이나 저작은 해당되지 않는다. 연구자 개인의 논문은 논지의 옳고 그름이나 신뢰성에 대해 저자 개인이 책임을 지지만, 박물관이 기획한 전시와 발간하는 책은 그렇지 않다. 책의 원고, 보도 자료, 누리집 등에 수록된 글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더 큰 책임이 따른다.
2020년 코로나가 시작되기 이전 기준으로 박물관의 연평균 관람객은 330만 명이었다. 상설 전시관을 찾은 관람객뿐 아니라, 온라인 이용자까지 관람객 범위를 확대해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많은 이들이 학예연구사의 글을 만난 것을 알 수 있다. 원고를 쓴 이는 개인이지만, 한번 만들어진 글은 더 큰 생명력을 얻어 세상으로 나간다. 개개인이 쓴 글은 유물을 보는 한 연구자의 관점인 동시에 그 해당 시점의 박물관이 생산해낸 공적인 기록이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학예연구사는 조금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
2
공공 정보로서의 신뢰성을 지켜야 한다
유물遺物은
남겨진 물건이란 의미다
박물관은 형태를 지닌 물건의 역사를 연구한다. 역사적 기록과 유물의 연관성, 과거의 기술과 재료뿐 아니라 사람의 생각이나 사상, 호기심의 영역과 같은 무형의 것들도 물건의 이야기 안에 담긴다. 박물관의 글은 좀 독특하다. 공공 기관이 생산하는 정보이기에 ‘신뢰할 수 있는가’, ‘오류는 없는가’, ‘객관적인가’와 같은 기준이 반드시 필요하다.
다루는 주제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어떤 전시를 준비하든 정보의 신뢰성은 박물관 글이 지켜야 하는 중요한 기준이자 덕목이다. 동시에 박물관의 글에는 공공 정보가 지켜야 할 원칙이 적용된다. 다양한 방문객과 이용자를 대상으로 하는 종합 박물관으로 누구나 차별 없이 정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둔다. 나이나 성별, 배움의 정도, 취향과 관심이 다른 불특정한 이들을 대상으로 쓰는 글이기 때문에 고려해야 할 점이 많고, 그만큼 까다롭다. 한 번에 달성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지향점을 두고 노력한다.
‘누구를 위한 글인가’는
‘무엇을 쓸 것인가’ 만큼 중요한 문제다
누구를 위한 글인가는 원고의 방향과 톤을 상당 부분 결정한다. 자료의 정확성, 정보의 신뢰성, 최신 연구 성과에 대한 이해와 반영 등과 같은 기준은 글을 쓴 후 확인해야 하는 중요한 항목이다. 한국사나 세계사의 보편적 틀 안에서 서술하는지, 검인정 국사 교과서와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과 상이한 것은 없는지 등을 염두에 두는 것은 이해의 혼선을 피하기 위해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학계에서 대립하는 이견이 있거나 논의 중인 주제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고 소개할 수 있지만,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해석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그렇다 보니 박물관의 정보는 새로운 학설이 소개되고 논의의 장이 되는 학계에 비해 보수적인 경향이 있다. 공공 기관으로서 박물관이 지켜야 하는 책임이자, 한계일 수도 있다.
큐레이터의 글은 원고가 사용되는 매체에 따라 다른 기준이 적용된다. 전시를 위한 글인지, 도록이나 보고서와 같은 책에 쓰이는 글인지에 따라 다르다. 또한 전시용 원고라 할지라도 글이 놓이는 장소가 상설 전시관인가, 특별 전시실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전시 기획자의 개인적인 감상이나 작품 해석을 풀어놓는다고 좋은 설명문이 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정보만을 나열하거나 혹은 관람객에게 닿아 정서적 공감 여지를 닫아버리는 글도 좋다고 할 수 없다. 너무 낯설면 호기심 자체가 생기지 않고, 글의 수준을 너무 낮추면 식상하고 지루함을 주기도 한다. 중요한 특징을 너무 많이 나열하면 정작 요점을 찾지 못한다. 빠르게 요점을 파악할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 큐레이터는 도록, 전시, 홍보, 교육 등 그 쓰임에 맞는 원고를 작성한다. 이때 관람객 혹은 박물관 이용객이라는 독자를 항상 생각하고 주제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지, 알기 쉽고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는지 스스로 질문을 던지면서 작성한다.
전시를 구성하는 언어와 도록에 쓰인 언어는
기획, 구성, 전달 방식이 다르다
도록 원고는 다시 개괄 원고, 챕터별 주제 원고, 개별 유물 설명 원고로 구분할 수 있다.
대체로 도록 원고는 전시 글쓰기의 기초 자료로, 전시 패널이나 설명 카드를 쓰기 위한 1차 자료로 활용이 가능하다. 도록 원고가 빨리 나오면 나올수록 전시 준비에 요긴하게 쓰인다. 도록 원고가 완성되면 이를 스토리보드로 활용할 수 있고, 디자이너는 전시품을 파악하는 데, 교육사는 교육용 워크시트를 만드는 데 참고할 수 있다. 또 기획을 치밀하게 다듬을 수 있으며, 사전 홍보에도 활용할 수 있다.
도록 원고가 설명적이라면 전시장의 글은 직관적이다. 전시용 원고는 관람객이 입구에서부터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한 일종의 전시 안내서인 리플릿처럼 독립적인 글이다. 또한 도입부에서 전시실을 거닐며 보는 패널 원고와 진열장 안에 놓인 설명 카드는 전시에 필수적인 원고다. 어떤 내용을 서술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한 장 한 장 책을 넘기며 보는 도록 원고와 비교해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접근해야 한다. 원고를 쓸 때는 전시실의 구성, 진열장의 배치, 설명 카드가 놓이는 위치와 유물의 크기를 고려한다. 관람객의 발걸음이 전시실 안에서 어떻게 옮겨지는지, 한 진열장에 배치된 유물의 크기, 제시되는 설명 카드의 숫자, 정보의 양을 가늠하며 쓴다. 읽는 이가 읽고 싶어 하는 글인지, 혹 읽는 데 지치게 하는 건 아닌지 관람객의 입장이 되어 자신의 원고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단계가 필요하다.
전시 도입부 패널을 예로 들면, 전시의 기획 의도, 전시 주제에 따라 선호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전시를 열며Prologue〉라는 문구에 전시의 핵심 메시지를 한눈에 요약하는 편이 더 적당한 전시가 있고,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마음의 부담을 낮추는 글이 더 효과적인 경우도 있다. 물론 정해진 답은 없으며 전시 성격에 따라 담당자의 성향이 반영된다. 전시장에 놓인 첫 글이 관람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더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할 수 있다. 관람객이 전시실에 체류하는 시간이 긴 전시일수록, 전시 설명과 패널 글을 꼼꼼하게 보거나 읽기 위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이때 유물만큼이나 전시장에서 제공하는 영상물, 원고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얼마나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가보다 관람객에게 말 걸기를 성공함으로써 볼 만한 전시이고, 읽어볼 만한 내용일 것이라는 신뢰를 갖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다. 관람객은 전시회의 글을 읽으면서 글을 읽는 이를 고려해서 쓴 글인지, 아닌지를 구분해낸다. 큐레이터가 원고를 읽을 상대를 상상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관람객이나 독자의 기분에 신경 쓰고 있는가와는 다른 문제다. 특정한 주제나 새로 알려진 정보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명확성이나 구체성 같은 정보의 객관성만큼이나,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과 태도가 영향을 준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