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 한국어판을 펴내며
이 책의 집필을 마친 후 내 마음속에는 다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그림 속 나그네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이 그림은 1818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구왕정의 부활을 꾀한 ‘복고주의’가 지배하는 빈체제하에서 그려졌다. 자유주의자들이 숨죽이고 침묵해야만 했던 시기다. 프리드리히의 친구도 ‘선동자’라는 혐의를 쓰고 탄압받았으며, 프리드리히에게도 수사의 손길이 미쳤다.
고독한 나그네의 눈길은 ‘근대’로 이어진다. 진보와 반동이 격돌을 거듭한 그 도정에서 근대 국민국가가 형성되고, 사람들은 ‘국민’으로 편성되었으며, 식민 지배와 세계 분할이 강행되었다. 그 길은 두 차례의 파국적인 세계전쟁과 대학살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200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나 자신이 그 나그네처럼 혼자 서 있는 것만 같다. 고갯길에 선 내 눈앞에는 ‘근대’에서 ‘근대 이후’로 이르는 길이 뻗어 있다. 그 길은 구름과 안개의 바다에 뒤덮여 앞을 잘 가늠할 수 없다.
얼마 전, 세계화가 진전되고 인구 이동이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국민국가의 문턱이 차츰 낮아져 결국 소멸하리라는 관측이 회자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박한 낙관론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날 점점 많은 사람들이 디아스포라가 되어 세계를 유랑하고 있지만, 국민국가의 장벽은 여전히 견고하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지구를 둘러싼 그 높고 무자비한 분리 장벽을 보라. 그 벽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땅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내면까지도 무참히 가르고 있다.
나는 근대 국민국가의 틀로부터 내던져진 디아스포라야말로 ‘근대 이후’를 살아갈 인간의 존재 형식이 앞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앞으로 얼마나 더 곤란한 길을 거쳐야만 할 것인가.
가산 카나파니Ghassan Kanafani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내가 ‘디아스포라적 자기 인식’을 정립하는 데에는 이 두 팔레스타인인의 영향이 컸다.
카나파니는 1948년 제1차 중동전쟁 때 열두 살의 나이로 난민이 되었다. 신문 교열 사원, 교원 등의 직업을 거쳐 작가가 되었고 PFLP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의 대변인으로 활동했으나, 1972년 베이루트에서 차에 설치된 폭탄이 터지며 살해되었다.
1969년에 쓴 『하이파에 돌아와』A’id ila Hayfa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팔레스타인 난민인 중년 부부가 고향 마을 하이파를 20년 만에 방문한다. 두 사람의 고향 하이파는 제1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 영토가 되었다. 난민이 되어 고향에서 쫓겨난 두 사람은 요르단강 서안West Bank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 요르단강 서안도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 점령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 결과 아이로니컬하게도 두 사람은 다시 고향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찾아낸 집에는 폴란드에서 이주해 온 나이 든 유대인 여성이 살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혼란스러운 피난의 와중에 잃어버렸던 장남을 그 여성이 자기 아들로 키우고 있었다. 지금은 이스라엘 병사가 된 장남은 낳아준 부모인 두 사람에게 “20년간 그냥 울기만 했는가, 눈물로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없다”고 비난한다.
진정 고향을 잃어버렸음을 깨달은 주인공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국이란 말이지,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곳이지. (…) 나는 진짜 팔레스타인을 찾고 있는 거야. 추억 이상의 팔레스타인을. 공작 깃털이나 자식이나 계단 벽의 낙서가 아닌 진정한 팔레스타인을.” 여기서 나타난 ‘조국’의 이미지는 그대로 나 자신의 것이 되었다. 디아스포라에게 ‘조국’은 향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국’이란 국경에 둘러싸인 영역이 아니다. ‘혈통’과 ‘문화’의 연속성이라는 관념으로 굳어버린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식민 지배와 인종차별이 강요하는 어떤 부조리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곳을 의미한다. 우리 디아스포라들은 근대 국민국가를 넘어선 저편에서 ‘진정한 조국’을 찾고 있는 것이다.
사이드는 2003년 3월 3일 미국과 영국 양국 군대에 의한 이라크 침공을 비통한 심정으로 지켜본 지 반 년 만에 뉴욕에서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여기서 그가 남긴 말을 한마디 인용하고자 한다. 재일조선인인 내가 ‘너희에게 희망은 없다’는 선고를 받을 때마다 항상 기억하는 말이다.
아무래도 내가 있는 곳은 최후의 변경이며 나는 최후의 하늘을 보고 있는가 봅니다. 그 앞에는 아무것도 없고 우리의 운명이 멸망해가는 것임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여기서부터 어디로 가는 것일까’ 묻습니다. 우리는 다른 의사의 진단을 받고 싶습니다. ‘너희는 죽었다’는 말만으로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이 책에는 ‘바깥’외부이라는 말이 종종 나온다. 그것은 ‘국민’이나 ‘민족’이라는 개념의 틀 바깥에서 살아온 나에게 자연적이고 필연적이기도 한 감각이다. 1966년 여름,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조국 땅을 밟았다.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이 한국 정부와 연계해 실시한 ‘교포 학생 모국 하계학교’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충청남도가 고향인 할아버지가 일본에 건너간 것이 1928년이었으니까 그로부터 약 40년 후인 셈이다. 같은 단체의 교포 학생들과 함께 우리말 교육과 반공 교육을 받았다. 휴전선 견학에도 참가했다. 조국은 상처투성이였고 가난했다. 거지 소녀와 껌팔이 소년이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 나에게까지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해방 후 나의 아버지가 일본에 머물지 않고 조국으로 귀환했다면 나도 이 아이들처럼 구걸을 하고 껌을 팔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나의 동포다. 그들은 나다. 그렇게 느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조국의 현실 ‘바깥’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나의 두 형은 1960년대에 조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도쿄의 사립대학에 진학한 나도 졸업 후에는 형들처럼 조국에 유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형들이 정치범으로 투옥되어 나의 계획은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다행히 형들은 군사정권이 막을 내릴 즈음 출옥했으나, 그때까지 일본이라는 ‘외부’에서 살아온 나는 이미 마흔 살이 되어 있었다.
그 후 짧은 여행으로 여러 차례 한국을 찾았으나 생활할 기회는 갖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다시 말하면 나는 여전히 ‘외부’에 머물러 있었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내부’ 사람들과 만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런 내가 올봄부터 한 대학에서 꽤 오랜 기간 객원 연구원으로 머물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처음으로 조국 땅에서 생활하며 ‘내부’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첫 조국 방문 때 열다섯 살이었던 나는 지금 쉰다섯 살이다.
‘내부’ 사람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을까? 잘 이해해줄까? 과연 대화는 가능할까……. 실은 나는 낙관하지 않는다. 고등학생 때 그랬던 것처럼 내게 조국은 반드시 편안하기만 한 장소는 아닐 것이다. 그래도 나는 차이를 지닌 채 진행될 ‘외부’와 ‘내부’의 대화에 기대를 품고 있다. 그런 곤란한 대화를 거치고서야 비로소 ‘외부’와 ‘내부’라는 개념의 장벽을 넘는, 새로운 ‘우리’의 모습을 모색할 수 있을 테니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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