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마석가구공단
이주노동자의 삶과 일터
1장
마석에 가면 그들이 있다
‘미등록’이란 말은 딱지 아닌 딱지다
우리나라는 199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이주노동자들이 유입되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해외로 인력을 파견하던 처지였음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반전이 아닐 수 없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이후 많은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한국을 “돈 벌러 가고 싶은 나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1980년대 말부터 조선족을 필두로 방글라데시, 필리핀, 네팔, 베트남, 인도네시아, 아프리카나이지리아, 카메룬 등 등에서 이주노동자들이 한국 노동시장에 밀려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3년 말, ‘산업연수생제도’ 도입으로 유입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지만, 열풍도 잠시, 1997년 금융위기로 인해 1998년 말까지 이주노동자 인구는 급감한다. 그러다가 서서히 증가추세를 보였지만 2019년 말부터 몰아닥친 팬데믹의 영향으로 이주노동자의 입국은 큰 폭으로 줄어들었고, 2023년 이후부터는 회복 중이다.
이주노동자 이슈는 그들을 수용하는 방법, 그들에게 붙여진 이름만 보아도 그 우여곡절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여기서 복잡한 상황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지만, 우선 2004년 고용허가제 시행과 함께 이주노동자는 ‘등록’과 ‘미등록’으로 우열 관계의 계층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문제들이 불거졌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인권침대가 미등록이주노동자에게 동시다발적으로, 그리고 각기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사실 “미등록”이라는 딱지를 붙여놓고 그것을 악용하거나 남용하는 일 자체가 너무도 모순적이긴 하지만, 그들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한두 곳의 일이 아닐 만큼 공공연함을 알 수 있다. 사소한 다툼이라도 벌어지면 출입국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는 것, 임금체불이나 퇴직금 및 부당한 노동행위에 대한 조사 결과를 승복하지 않고 미등록이주노동자를 적법한 절차 없이 출입국에 인계하는 일, 경쟁 업체 간에 미등록이주노동자를 출입국에 밀고하는 일, 출입국 신고를 무마해주는 대가로 미등록이주노동자에게 금품을 갈취하는 일, 암묵적으로 출입국과 경찰서의 정보제공 및 통역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미등록이주노동자를 인계하는 일 등이다.
그러나 어두운 구름 속에도 한 줄기 빛쯤은 숨어 있는 법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샬롬의 집’ 같은 이주노동자지원센터를 기반으로 각 국가의 공동체가 활성화되면서 사업주와 이주노동자 간의 분쟁과 갈등에 대해 중재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주노동자들은 이러한 센터의 초기 정착에 필요한 지원에 도움을 받아 차츰 안정화를 이루게 되었다. 또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주노동자의 자치적인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특히 ‘경기도·인천 이주노조’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주노동자 리더들이 배출되기도 했다. 이들은 이제 한국 사회 이주노동 운동의 한복판에 서 있다.
한국에서 1990년대부터 시작된 이주노동의 단면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마석기구공단으로 들어서보자. 이곳은 흔히 ‘이주노동 역사의 산실’로 불리는데, 그만큼 다양한 이슈들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마석가구공단은 한 공간 안에 일터와 생활공간숙소이 함께 있는 일체형이라는 점, 이에 따라 어느 지역보다 이주노동자공동체 간에 친밀감과 유대감 형성이 수월하다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한센인건물주과 사업주공장 그리고 이주노동자가 상호 협력하는 ‘공생’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특성도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 터전을 잡은 이주노동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종합 공간으로서의 마석가구공단
2023년 현재 152,000평에 이르는 마석가구공단에는 300여 개의 업체와 100여 개의 가구 판매장이 있다. 업종별 비중으로 보면 단연 가구 제조가 가장 많고, 플라스틱 사출, 철판인쇄, 기계 제조, 의복 제조, 유리 가공 등이 부분적으로 있다. 이에 더해 이주노동자의 다세대 숙소, 9개의 마트, 14개의 음식점이 있다. 종교시설로는 이슬람사원 하나와 성공회 교회가 하나 있다. 마석가구공단은 이주노동자의 일터와 숙소가 한 공간에 있어 출퇴근이 편리하고, 자국의 생활필수품 역시 공단 안에 있는 마트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으며, 고용 정보를 쉽게 취득할 수 있고, 사업장에서 점심을 제공하지 않는 경우 근접한 숙소로 가서 자국 음식을 섭취할 수도 있다는 장점이 있다.
마성가구공단에는 규모가 큰 공장이 3~4개 정도이고, 나머지는 소규모로 5~10인 미만 사업장이 대부분이다. 경력이 많은 이주노동자에게 작업을 지시한 후 사업주는 외부 일을 보는 장면, 숙련된 장기 미등록이주노동자가 공장장의 역할을 하면서 미숙련 이주노동자의 작업과 공정을 조정하는 장면 역시 마석가구공단이 보여주는 특성 중 하나다.
환경 변화에 따라 일상이 달라지다
1990년대부터 한국은 전기·전자 및 통신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다. 특히 1980년대 말 서울올림픽을 치르면서 그 무엇보다 ‘텔레비전 방송의 힘’컬러TV 보급을 인식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이주노동자들의 생활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특히 정보를 획득하는 방편으로 고국의 텔레비전 방송에 의존했다. 따라서 한국에 정착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설치비와 수수료 지급이라는 부담을 감내하면서 위성 안테나를 놓아 자국의 방송을 청취했다. 하지만 2000년부터 IT산업이 획기적으로 발전을 거듭하면서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자 위성기기 이용은 사라졌다. 웬만한 컴퓨터 한 대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미디어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통신 분야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유선 공중전화 사용에서 국제전화 카드를 사용하다가 이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통신의 발달은 이처럼 이주노동자들이 자국의 가족과 꾸준히 관계를 형성하고, 밀접하게 연락을 주고받음으로써 유대감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한몫했다.
이주노동자들에게 ‘전기통신 문명의 발전’은 일상의 편리성을 담보해준다는 장점 외에 한 가지 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이들이 속한 국가는 대개 전통사회의 특성을 여전히 강하게 보여주는 나라들이다. 근대의 한국 문화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방글라데시의 경우, 고국에서는 대개 장손이 결혼하지 않으면 동생들이 먼저 결혼할 수 없다. 남아 있는 가족의 처지에서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장손을 무작정 기다리기도 답답한 노릇이다. 이런 상황에서 묘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전화결혼식’이다. 한국에 온 방글라데시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이 본국으로 가기 어려운 상황에서 부모가 소개한 배우자와 전화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2000년대 이전에는 전화기 너머의 음성을 들으며 사진을 보고 서로가 상대 배우자를 확인해야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귀국하게 되면 서로 달라진 모습에 알아보지 못하는 웃지 못할 촌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자기기와 통신의 질이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시간과 공간이 단축되었고, 여러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실시간으로 서로 소식을 확인하고 전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통신의 발달은 타국 체류 중인 이주노동자들이 본국과 정보를 빠르게 교환하고, 가족과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나라에서 장기적인 체류를 계획하게 해주는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또한, 통신기기의 혁신으로 본국의 정보뿐만 아니라 한국에서의 장거리 지역에 있는 친인척, 친구와의 사회적 연결망 구축이 가능해졌고, 일자리나 이주와 관련한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어 생활의 편리함을 제공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한국의 공공기관에서 제공되는 정보들이 대체로 한국어로 안내되고 있는 반면에 불특정 다수가 사용하는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자국어로 소통하며 정보를 교환함으로 생활의 편리함과 변화되는 상황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해주었다.
마석가구공단에 거주 중인 이주노동자들의 휴일 문화도 많이 달라졌다. 이주 초기에는 마석 시내가 모든 교류와 여가생활의 중심지였다. 이들은 주로 마석 시내에 나가 일반상점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곤 했다. 특히 장이 서는 날이면 많은 이주노동자가 모여 친교를 나누었다. 그런데 2010년 평내·호평 신도시에 상업지구가 형성되면서 마석가구공단의 이주노동자들도 이곳으로 몰리게 되었다. 마석 상인들은 이로써 무시할 수 없는 소비인구가 타지로 상권이 이동함에 따라 경제적 손실에 직면해야 했다. 한편, 하루가 다르게 발달하는 전자상거래 및 통신판매의 외연 확장으로 택배를 이용하는 인구가 증가했다는 점 역시 지역경제 활성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초기 이주노동자들은 일체형 공간 안에서 일상의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기에 교통 문제에 큰 이슈가 없었다. 당시의 교통수단은 대개 오토바이였다. 공단 안은 특히 경사로가 급격한 곳이 많았기에 출퇴근 시 이용하기엔 오토바이가 제격이었다. 휴일에 공단 근교나 시내로 나갈 때도 주로 오토바이를 탔다. 그러나 요즘은 이주노동자들도 장거리 외출 시 모바일 택시 승차를 선호한다. 스마트폰으로 쉽게 호출할 수 있는 모바일 교통수단은 생활의 편리함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고립감을 해소하는 데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