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전의 밸브를 돌리자
물이 쏟아졌다
여자가 소화전의 밸브를 돌리자 물이 길바닥으로 쏟아졌다. 물줄기는 갇혀 있던 우리를 뛰쳐나온, 길들지 않은, 길들일 수 없는 짐승처럼 요란하게 날뛰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양동이를 날뛰는 짐승 밑에 밀어 넣었다. 양동이는 겁에 질린 듯 요동치다가 곧 잠잠해졌다. 양동이의 둥근 테두리를 순식간에 타고 넘은 물줄기가 보도블록에 얼룩을 만들며 퍼져 나갔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선 채 물의 난동을 지켜보았다. 아니, 그녀가 무엇인가를 보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누군가의 눈에는 그녀가 몸을 거기 두고 다른 데로 이동해 간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아니면 이동해 간 것이 몸이거나.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지나갔고, 몇 사람은 점점 영역을 넓혀오는 물이 자기 신발을 적실까 봐 몸을 피했고, 몇 사람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옅은 호기심을 지닌 채 바라봤다. 그중에 한 명이 다가와서 여자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사람이 말을 건 상대가 그녀가 아니라 그녀가 어딘가로 가면서 남겨둔 껍데기였기 때문일까. 말로 그녀를 설득할 수 있으리라는 그 사람의 자부심은 그녀의 완고한 침묵이 아니라 성큼성큼 걸어와서 소화전의 밸브를 잠근 누군가에 의해 무너졌다. “이 물은 불을 끌 때 사용하는 거예요. 낭비하면 안 돼요.” 물이 날뛰면서 내지르는 콸콸 소리가 멈추자 비로소 두고 간 몸을 찾아 돌아온 듯 그녀가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들고 걸음을 옮겼다. 불룩한 배낭을 메고 있었는데, 아물어지지 않은 배낭의 아가리 밖으로 길쭉한 장대가 하나 삐져나와 있었다. 그녀의 몸은 배낭에서 삐쭉 빠져나온 길쭉한 장대처럼 마르고 까칠했다. 양동이가 무거운 듯 그녀의 몸이 뒤뚱거렸고 바지에 물이 튀었다. 도와주려 한다고 해도 도움을 받을 것 같지 않았지만, 그래서인지 누구도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힐끔거리며 지나가거나 그녀와 몸이 닿을까 봐 피하거나 옅은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주변을 살피지도 않고 곧장 차도로 걸어 들어갔다. 달려오던 화물차가 놀라 경고음을 울렸고, 뒤이어 온 차들은 비상등을 켰다. 그녀는 자기로 인해 생긴 소란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보는 이에 따라서는 여유를 부린다고 할 정도로 느긋하게 걸어 도로 한복판에 이르렀다. 그녀가 양동이를 기울여 물을 쏟자 노란색 중앙 차선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여자는 무엇을 가늠하는 것처럼 자세를 낮추고 물이 쏟아진 도로를 유심히 살피더니 배낭에서 욕실 청소할 때 쓸 법한 솔을 꺼내 문지르기 시작했다. 길쭉한 장대처럼 보였던 것이 청소용 솔이었다. 물이 뿌려진 바닥을 문지르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운전자들은 급히 차선을 바꾸고 경음기를 울렸다. 창문을 내리고 소리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는 솔질에만 집중했다. 그녀는 거기에 자신밖에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날카로운 햇빛이 그녀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그녀는 솔질에만 집중했다. 그녀의 몸은 조금씩 앞으로 구부러졌고, 나중에는 거의 지면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이번에도 구경하던 사람 중 한 명이 그녀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말했다. 그러나 그 역시 그녀로부터 어떤 반응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솔질만 했다. 그 사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옅은 호기심을 가지고 자기의 거동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난처함을 알리려는 듯 혼잣말을 하며 그곳을 벗어났다. 그 사람의 기대와는 달리 누구도 그에게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멈춰 서서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기도 했거니와 그들 중 누구도 그 사람이 그 여자와 그 여자가 하는 행동에 대해 자기들보다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끈질긴 손질에 의해 도로의 물기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즈음 그녀는 솔과 양동이를 양손에 나눠 들고 소화전이 있는 곳으로 다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리고 아까처럼 소화전의 밸브를 틀었다. 갇혀 있던 우리를 뛰쳐나온, 길들지 않은, 길들일 수 없는 짐승과도 같은 물줄기가 이번에도 양동이를 제압하고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녀의 신발과 바짓단이 물에 젖어 축축해졌다. “물이 다 찼어요.” 이번에도 누군가 다가와 밸브를 잠글 때까지 그녀는 쏟아지는 물을 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몸을 두고, 혹은 몸만 가지고 다른 데로 이동해 간 사람처럼 보였다. 양동이를 들고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몸이 좌우로 심하게 뒤뚱거렸고, 그때마다 양동이 안의 물이 출렁거리며 빠져나왔다. 그녀는 절반밖에 남지 않은 양동이의 물을 아까와 같은 자리에 쏟고 똑같이 솔질을 했다. 도로의 물기가 거의 사라졌다고 여겨질 때까지 그녀는 솔질을 멈추지 않았다. 운전자들은 비상등을 켜고 속도를 줄이고 경고음을 울리거나 창문을 열고 소리 지르며 지나갔다. 행인들은 힐끔거리며 지나가거나 옅은 호기심을 가지고 잠깐 멈춰서 구경하다가 지나갔다. 수군거리거나 수군거리지 않았다.
그녀가 세 번째로 양동이에 물을 채워 차도를 향해 걸어갈 때에야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도착했다. 비상등을 켜고 차에서 내린 두 명의 경찰관은 도로에 발을 들여놓은 여자를 막았다. 그들은 느릿느릿 움직였는데, 무엇 때문인지 좀 짜증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누구도 개의치 않았던 여자는 경찰관도 개의치 않았다. 경찰의 제지를 뚫고 막무가내로 차도로 가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녀는 그저 걸어간 것뿐이었다. 그저 걸어갈 뿐인 그녀를 경찰들이 제지한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양동이 안의 물이 더 심하게 요동쳐서 경찰관들의 바지가 젖은 것은 그녀 탓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경찰들은, 적어도 한 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는 노골적으로 불쾌하다는 표시를 하며 바지의 물을 털었다. “에이, 재수 없어.” 경찰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고 싶지 않은 그 말을 들은 사람은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아 진짜, 이 노인이 왜 이러실까, 정말. 이러면 안 된다니까. 이러다가 진짜 죽는다고요.” 그 말은 거기 모여 서 있는 사람 대부분이 들었다. 경찰은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여자가 이러는 게 처음이 아니며 무슨 뜻이 있는 행동도 아니고 다만 정신이 온전하지 않아서 그러는 거니까 신경들 쓰지 마시고 가던 길 가고 하던 일 하라는 뜻을 전달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팔을 양쪽에서 하나씩 붙잡았는데, 이번에도 사람들 눈에는 그녀가 붙들리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였고, 그 바람에 양동이가 엎어지면서 물이 모두 쏟아진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녀는 자기가 하던 일, 하려고 하던 일을 그저 한 것뿐이었다. 그녀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은 것은 신경 쓸 누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엉뚱한 무대 위에 잘못 올라온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그녀가 서 있는 무대에 자기 말고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여기는 차도예요, 차도. 몰라요? 이러다가 당신 죽어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도 골치 아파요. 몇 번을 말해야 돼요? 그러니 제발 좀 이러지 맙시다.” 경찰들은 그녀를 차도 밖으로 끌어내려 했고 그녀는 끌려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보인 이유는 차도에 물을 뿌리고 솔질을 하는 것 말고는 그녀에게 어떤 욕망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차도에 물을 뿌리고 솔질을 하려고 했을 뿐 차도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경찰들에게 저항한 것은 아니었다. 경찰들은 그녀를 차에 태우려고 했고 그녀는 차에 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보인 것은 그녀가 아무도 없는 무대에 혼자 서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과 다른 무대에 있기 때문이었다. 경찰들이 그녀를 경찰차의 뒷좌석에 억지로 태우려고 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몸은 휴지처럼 마구 구겨졌다 퍼졌다 했다. 차도로 가려는 그녀의 의지는 그녀를 차도로 가지 못하게 하려는 그들의 의지 못지않았지만, 그녀의 힘은 그들의 힘에 미치지 못했다. 여자는 경찰차에 태워졌고 그녀의 가느다란 팔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한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당신들은 무례합니다. 그분을 풀어주세요. 그분이 하던 일을 하게 하세요.” 경찰들은, 이건 또 뭐야, 하는 표정으로 남자를 보았다. 실제로 그 말을 입 밖으로 낸 것은 아니지만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 대부분은 경찰 중에 한 명이 그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지금 공무를 수행하고 있는 게 안 보입니까?” 둘 중 한 경찰관이 위압적으로 말했다. 남자가 대꾸했다. “안 보입니다. 내 눈에는 당신들의 무례가 보일 뿐입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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