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
수지를 키울 때 그랬다
우리는 수지에게 당분간 죽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23년짜리 연금보험을 들어 놨단다 수지야 늙은 수지는 일을 안 해도 될 거야 그냥 먹고사는 인생이 될 거야 톡톡히 가르쳤다. 수지는 우리의 양육 방식을 납득할 수 없었다. 수지는 다소 신경질적인 데다가 삶에 대한 의지가 다부진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부러 부주의하게 굴다가 기록적인 사고에 노출될 수도 있는 거고 모르는 아저씨가 과자를 사 준다고 하면 자신의 치마를 벗길 걸 알고서도 따라갈 애였다. 무엇보다 수지는 지금 가난했다. 돈이 필요한 사람은 늙은 수지가 아니라 매일을 소모하는 방식으로 견디는 애늙은 수지였다. 수지는 보장된 미래를 갖고 있는, 곧 마무리될 현재였다.
수지를 키울 때 그랬다. 내 삶 갈아서 만든 이 돈 어떻게 하면 최대한 덜 뺏기면서 수지에게 물려줄 수 있을지 매일 고민했다. 고민하다 보면 답이 없고 답이 없으면 짜증이 나고 짜증이 나면 수지를 때렸다. 수지는 훌륭한 울보였다. 찍소리도 없이 정말 많이 울 줄 알았다. 덕분에 나는 늘 떳떳한 양육자일 수 있었다 공적으로도
수지가 어떻게 죽지 않고 마흔세 살이 되었을 때 수지는 정말 일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노력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노력했어야 할 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련한 한량처럼 수지는 능숙했다. 매달 적지 않은 돈이 수지의 통장에 꽂혔다. 미래를 설계하는 재능이 뛰어났던 내가 늙을 수지를 위해 달마다 육백만 원의 연금 보험료를 납부했기 때문이다. 수지는 육백만 원을 벌어 본 적도 없는데 언제나 주거래 은행의 VIP였고 직원들은 처음 보는 수지를 깍듯이 대했다. 마흔 초반의 수지는 칠십 노인처럼 인생을 은퇴한 듯 굴었다. 매일 자고 매일 먹고 매일 움직이지 않았다. 수지는 탁월한 지휘자들의 거대한 연주에서 잘 조율된 악기처럼 틀려도 들키지 않을 정도의 소음만 만들며 살았다.
수지는 [KEB 하나은행 종신형 방카슈랑스 생명보험 Ⅱ]의 계약이 종료되기 이틀 전 조력사로 사망했다. 죽어 가는 수지는 수지로 태어난 게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고 말하면서 눈물을 뚝 뚝 흘렸다. 돈을 벌지 않아도 됐던 수지, 어디로도 출근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수지, 밖에 나가 험한 꼴 당하는 사회생활 같은 건 꿈에서도 나올 일이 아니었던 수지, 그래서 늘 공상하며 환각 하느라 세상에는 관심도 없었던 수지, 23년 후의 지수만을 믿으며 허송세월하였던 수지. 나는 파트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 정말 훌륭한 양육자였어, 여자인 수지가 살해당하지 않고 강간당하지 않고 취업난에 시달리거나 시달려서 취직해도 왕따에 성희롱 온갖 사소한 일들에 휘말리지 않아도 됐고 결혼하지 않아도 됐고 많은 남자를 만나지 않아도 됐고 여자를 믿지 않아도 됐고 오로지 23년 연금만 생각하면서 오늘은 괜찮아 더 낭비스러운 내일이 있을 테니까 하며 제멋대로 밤낮을 바꾸고 이사를 거듭할수록 더 크고 더 최신의 집을 갖게 됐고 큰 병도 큰 사고도 없이 심지어 우아하게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고 목격할 수 있었다는 게 정말 너무 감동적이지 않니. 내 손을 잡은 파트너가 달콤한 목소리로 말한다, 맞아 정말 그래, 우리는 환상의 팀이었어 자기가 벌고 나는 벌리고 자기가 계산하고 나는 계획하고 자기가 협박하는 동안 나는 달랬지. 우리의 수지가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우리의 돈으로 가난을 미리 면제해 주었기 때문이야 티 하나 없이 생활 기스 하나 없이 깨끗한 우리의 수지를 봐, 수지는 정말 행복했을 거야 이 시대 최고의 행운아였을 거야 일하다가 죽는 사람이 매일 있는 이 나라에서 수지는 아예 일을 안 해도 괜찮았잖아 수지는 장수한 거야 자연스러운 삶을 살았던 거야 정말 대견하다 우리 수지 우리 수지 정말 사랑해 다시 태어나도 우리 딸 하자 알았지 수지야 우리 예쁜 수지 정말 정말
잠자는 신축 아파트의 지수
건방진 조력사였지
지수는 졸려
지수는 잘 거야
잠만 잘 거야
자연사할 거야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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