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봄은 봄을 만나서
학살자가 죽은 날, 그의 죽은 몸이 운반된 병원에 갔다. 그의 끝을 보려고 일부러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나는 텔레비전 화면에 간혹 비치는 그의 산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아 채널을 돌려버리는 사람이었다. 대학병원 정신건강 의학과에 진료가 예약되어 있었다. 아침 뉴스에서 그의 사망소식을 전하는 기자들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유당이 제거된 우유에 천천히 그래놀라를 말아 먹었다. 세수와 양치를 하고 외출복을 입었다. 마지막으로 텔레비전을 끄면서 한 문장을 떠올렸다. 모든 죽음은 느닷없다. 죽음의 평등함을 말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했는데, 학살자는 조소하듯이 죽음조차 불평등함을 알리고 가버렸다.
택시 안에서 바라본 병원 후문은 온갖 언론사의 중계차들로 혼잡했다. 붉은색 표지판이 위압적인 응급실 입구에 묵직한 카메라를 어깨에 인 사람들이 뛰어다녔다. 누가 새로 도착할 때마다 카메라와 마이크를 든 사람들이 우르르 한곳으로 몰렸고, 그 바람에 바로 옆의 ‘코로나19 선별진료소’ 안내판이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였다. 씨발새끼가 사과도 않고 죽어버렸어. 내 말에 택시 운전사가 움찔 놀라더니 백미러를 흘끔거렸다.
좀 어떠셨습니까?
의사는 과거형으로 질문했다. 이주일 동안 복용한 항우울제와 항불안제가 잘 맞았느냐는 물음이었다. 처음 처방받은 약은 끝없는 졸음을 유발해 문제였다. 한낮에 숟가락을 입에 문 채 깜박 잠든 적도 있었다. 입안에 든 음식물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처음 약을 처방하면서 의사는 낮에도 졸리면 부작용이니 곧바로 내원해 약을 바꾸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일주일 치 약을 다 먹고 예약일에 병원을 찾아갔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의사가 키보드를 두드리며 뭔가를 메모했는데, 나는 속으로 ‘쓸데없이 고지식한 게 문제임’이라고 쓰지 않았을까 상상했다. 약을 바꾼 후 낮에 졸린 증상은 사라졌지만 대신 밤잠이 허술해졌다. 의사는 원하는 취침시간 한시간 전에 약을 먹으면 된다고 했는데, 한시간은커녕 두세시간이 지나도 잠이 쉽게 들지 않았고 겨우 잠들었다고 생각했을 때도 몸의 스위치만 꺼지고 의식은 반 이상 깬 채 밤을 통과했다. 이 역시 부작용일까 싶었지만, 그때도 일주일 치 약을 다 먹고 병원에 갔다. 의사는 정신과 약이란 게 원래 처음 몇주는 개인별로 적절한 종류와 용량을 찾아 미세한 조정이 필요한 법이니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려보자고 했다. 약 몇 번 먹고 드라마틱한 효과를 기대하는 게 오히려 위험한 생각이라고 했다. 참을성은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덕목이었으므로 조바심을 내는 쪽은 내가 아니라 의사일 터였다. 세 번째 처방에 의사가 약 하나의 복용량을 조금 늘렸는데 그후로 낮에 졸리지도 않고 미약한 가위눌림 상태로 밤을 통과하는 일도 점차 줄었다. 약이 듣는 모양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했던 것을 이주일에 한번으로 바꾸고 정신과를 찾은 지 두달이 다 되었을 때 학살자가 죽어버렸다.
지금 감정 상태는 어떤가요?
약효에 관한 질문에 이어 의사가 현재형으로 감정을 물었다.
분노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의사가 모니터 너머로 내 얼굴을 살폈다. 마스크를 쓴 상대의 감정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의사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어떤 일에 대한 분노일까요?
역시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학살자가 죽었어요. 잘 먹고 잘살다가 죽어버렸어요.
의사의 눈이 조금 커졌다. 부연 설명이 필요한 듯한 표정이었다.
사과 한마디 없이 죽어버렸다고요.
의사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이나 인정의 표현은 아니었다. 오래전 누군가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그런 일로 잠 못 이루는 사람이군요. 수년 전 독재자의 딸이 가뿐히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늦은 밤 인터넷 카페 게시판에 울분의 글을 올렸다가 그 댓글을 보았다. 조롱이나 비난의 기미는 없었다. 그냥 좀 신기하고 낯설다는 말이었다. 앞에 앉은 의사의 표정도 비슷했다. 개인적인 고통을 호소하며 정신과를 찾아와 두달째 약을 먹고 있는 당신이 개인적인 감정을 묻는 말에 꽤 정치적인 이유를 들다니 신기하군요, 정도랄까. 물론 순전히 내 추측이고, 나는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먹지 않으면 제대로 된 사고는커녕 생활조차 불가능한 상태였으므로 그 추측은 틀렸을 가능성이 컸다. 의사가 물었다.
그 사람이 사과 없이 죽었다는 사실이 환자분의 개인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이유가 뭘까요?
예전이었다면 단호하게 대답했을 것이다.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니까요.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다분히 수세적이었다.
잘못했다고 한마디 하는 게 뭐 그렇게 어렵나요? 입도 있는 새끼가!
의사는 웃지도 얼굴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다만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나는 야심 차게 준비한 농담에 실패한 사람처럼 주눅 들었다.
환자분은 사과가 중요한 사람이군요.
의사의 말이 허를 찔렀다. 석구와 해준이 떠올랐다. 석구는 끝내 내게 사과하지 않았다. 나는 해준이 바라는 사과를 할 수 없었다. 의사는 석구와 해준에 관한 이야기가 듣고 싶었을 것이다. 그 순간에도 전국의 텔레비전 화면을 가득 채운 학살자의 죽음이 아니라. 나는 버티듯 석구와 해준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다시 이주일 치 약을 처방받아 병원을 떠났다. 병원을 떠나는 길은 평소보다 혼잡했다. 병원 직원들이 여기저기 서서 끊임없이 뒤엉키며 밀려드는 차량을 통제했다. 약국에서 약을 받아 가방에 넣고 버스를 탈까 하다가 정류장을 그대로 지나쳐 연희동 방향으로 걸었다. 다음 행선지는 걸어서 30분이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처음 과호흡이 찾아왔을 때 인터넷을 뒤져 알아낸 임시방편이 걷기였다. 공황장애약을 3년 먹고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를 떠나보낸 대학병원 앞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았어요. 무작정 빨리 걸었죠. 한시간 가까이 앞만 보고 걸었는데 호흡이 편안해졌다 싶었을 때 낯선 거리에 와 있더라고요. 불안장애를 진단받은 후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동네 뒷산을 오릅니다. 아직 약을 끊지는 못했지만 걷는 동안에는 적어도 발작이 오지 않으리란 확신이 들어요. 정신질환 환우 커뮤니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험담이었다. 대학병원 호흡기내과와 정신건강의학과에 진료를 예약하고 기다리는 동안 우선 걷기를 시작했다. 자리에 앉으면 아득히 땅속으로 꺼지는 느낌이 들어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동네를 몇바퀴 돌았지만 건널목을 만나면 자꾸 걸음이 중단되어 집에서 조금 떨어진 큰 공원으로 갔다. 오피스텔 건물에서 난지천공원 입구까지 가서, 거기서 다시 하늘공원 입구까지 오르막길을 천천히 올라 왼편 구름다리를 건너 평화의 공원에 들어가면 한시간이 걸렸다. 인공연못 앞 벤치에 앉아 10분 정도 호흡을 가다듬으며 물끄러미 수면을 바라보다 왔던 길로 돌아가면 두시간 넘게 걸을 수 있었다. 매일 그 길을 걸었다. 산책이라기보다는 도피에 가까운 행위였다. 숨이 안 쉬어지고 땅이 꺼질 것 같아 자꾸 눈을 질끈 감게 하는 불안과 공포로부터 달아나는 길이었다. 어느새 불안과 공포는 감정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었다. 몸으로 생생하게 느끼는 증상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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