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해양인들의 삶을
‘해양인 열전’으로 남기며
‘해양도시’ 부산에서 28년간 은혜롭게 살았다. 한국해양대에 근무하다 보니 직간접적으로 주워들은 해양 관련 지식 덕택에 바다를 조금은 알게 됐다.
하지만 나는 늘 궁금했다. 언제나 바다와 관련된 담론에 뭔가 수상쩍은 그림자가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궁금증을 유발한 건 지식과는 사뭇 다른 차원의 해양인에 대한 천시와 박대였다. 명색이 교수인 나마저 농조로 ‘뱃놈’이라 부르는 내륙인들의 사고방식이 궁금했고 그 수모를 용케 참고 견디며 살아온 해양인들의 속마음도 알고 싶었다.
오랫동안 연구실에서만 그 궁금함을 되작이다 드디어 2022년 초부터 현장으로 찾아가 해양인들을 만났다. 부산을 중심으로 해양 분야에 종사해온 실무자와 전문가, 기층민, 애호가를 인터뷰했고 그들의 내력을 ‘소평전小評傳’ 형식에 담아 1년간 〈국제신문〉에 ‘뉴프런티어 해양인 열전’이란 제목으로 연재했다.
연재의 목적으로 일단 “21세기 신新해양시대에 해양의 의미를 재확인하고 해양인의 존재가치를 부각하고 싶다”는 희망 사항을 내걸었다. “해양인에 대한 인식 개선과 자긍심 고취”라는 명분도 곁들였다. 하지만 그것은 핑계였을 뿐 실제로는 그동안 품고 있던 나의 궁금증을 풀어보고 싶었다. 만약 해양인에 대한 천시와 박대가 잘못이라면 그걸 뒤집어 적용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가능성을 찾아내고 싶었다.
인터뷰와 글쓰기는 고되지만 즐거웠다. 주위의 지인들과 독자들로부터 격려와 호응을 받아가며 해양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전적인 오해와 오류의 소산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글을 쓰노라면 ‘운명애Amor Fati’나 ‘실존’ 등의 개념이 절로 떠오르곤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내놓게 된 글들이지만 ‘해양 인식 제고’나 ‘미래 전망 제시’에는 턱없이 부족한 내용이다. 다만 ‘해양인이 왜 소중한 존재들인가?’에 대한 대답은 희미하게나마 마련한 듯싶다.
그 대답은 나에게 신선한 깨달음을 안겨준 현장에서의 체험을 통해 얻은 것들이다.
“살아가는 데 자신이 없어서 죽고 싶다던 사람도 여기 와가와서 새벽 어시장을 보면 생각이 바낀다 카더라바뀐다 하더라.”
그것은 답사현장 중의 한 곳인 부산공동어시장에서 귓결에 들은 말이었다. 과연 그곳은 밤낮의 구분 없이 진행되는 ‘양륙揚陸’과 ‘배열’, ‘부녀’, ‘하조포장’, ‘상차上車’로 땀 냄새와 생선 비린내가 뒤엉긴 ‘힐링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들었던 그 말은 다른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삶의 찬가’였다.
그런 깨달음은 ‘해양도시’ 부산이기에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바다와 강, 산, 온천을 지니고 있어 ‘사포지향四抱之鄕’이라 불리는 부산은 바다를 무대로 전근대와 근대, 외래와 전통이 중첩된 고장이다. 예로부터 전통의 맥박이 뛰던 동래, 기장, 김해, 강서와 함께 근대기 외래 문물이 밀려들어 온 부산항이 있어 한반도의 목구멍과 같은 역할을 해낸 도시가 부산이다.
우선 부산의 전통문화로는 어방과 숭어들이 등 어로 습속과 해녀문화, 동해안별신굿과 오구굿, 용왕굿, 소금 문화, 그리고 바다에 관련된 민담과 전설의 흔적이 흥미롭고 다양하다.
특히 가덕도에 100여 년 넘게 전해오는 숭어들이는 그야말로 신통한 어로법이다. 4킬로미터 남짓한 연안에서 숭어 떼를 포착하는 어로장의 눈썰미는 수면 아래 숭어의 눈 매무새까지 포착해낸다. 어린 숭어는 놓아주고 일정한 양만을 잡고 만족했으며 어로장이 사후에 ‘숭어의 신’으로 좌정하는 풍습은 생산공동체이자 생태공동체,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또 남해안별신굿은 어촌계 주도로 어민의 안전과 풍어를 빌며 사회 통합을 유도하는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그 주역인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는 비록 험한 생애를 살아왔을망정 어민들 사이에서만은 문화계의 리더이자 ‘셀럽’이었다. 그들이 별신적籍을 올렸다. 그런 이주민이 모여들던 부산항은 훗날 파월장병과 중동근로자가 배에 오르고 한국해양대를 졸업한 해기사들이 외국 배를 타는 ‘수출 선원’이 되기 위해 떠나가는 자리가 되었다.
그처럼 바다를 만난 사람들이 운명을 바꾸곤 하던 부산 앞바다는 헤겔의 말처럼 “해방과 전환의 입각점”이었다. 시대의 격랑에 휩싸인 부산에서 대중문화는 인기를 누렸고 항구도시의 활력이 되기도 했다. 기생과 권번, 대폿집, 영화와 더불어 해양가요는 ‘항구’와 ‘마도로스’를 노래하며 항구도시를 그것답게 만들었다. 대중가요 작곡가와 가수가 모이고 음반회사가 들어선 부산은 남인수의 〈울며 헤진 부산항〉을 비롯한 해양가요 절대다수의 배경이 되었다. 해양가요에서 마도로스의 이별과 사랑은 해양도시의 서정이었고, 개중에는 백야성의 〈잘 있거라 부산항〉처럼 마도로스의 꿈을 젊은이에게 심어주는 노래도 드물지 않았다.
그런데 부산에서 가난은 하릴없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로 여겨졌고 특히나 바다와 관련된 직업의 종사자들에게 가해지는 모멸은 더욱 심했다. 우암동 우사牛舍나 범일동 마사馬舍, 아미동 일본인 공동묘지의 ‘하꼬방’이 그런 부끄러움의 징표였다. 그 부끄러움을 만든 건 국가나 사회였고 그것은 터무니없이 부당한 책임의 전가였다. 이 책은 그처럼 부당하게 조작된 편견에 굴하지 않고 자부심을 구축한 해양인들의 내력을 소개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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