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왜 거울에 비친 나를 사랑할까?
우리는 시시때때로 거울을 본다. 자고 일어나서 보고, 세수하고 나서 보고, 옷을 입으면서도, 밥을 먹고 나서도 본다. 왜 그렇게 자주 거울을 들여다볼까? 거울에 비친 내가 너무 예뻐서? 고개를 끄덕일 사람도, 그게 무슨 소리냐고 당장에 반발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못생겼어?” 하고 투덜거리면서도 우리는 거울 속 내 얼굴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한다. 틈틈이 앞머리를 매만지고, 눈곱을 떼고, 뺨이며 턱도 쓸어 본다. 거울 앞에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어 보기도 한다.
마음에 들면 드는 대로 마음에 안 차면 안 차는 대로 우리는 자꾸만 거울에 비친 모습을 확인한다. 우리는 왜 자꾸 거울을 볼까?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걸까? 거울에 비친 ‘나’와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것일까? 나를 이해하는 것과 거울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거울 속의 너는 나
《거울속으로》
가장 먼저 이수지 작가의 《거울속으로》이수지 지음, 비룡소, 2009를 살펴보자. 세로로 긴 책장을 넘기다 보면, 속표지 다음 장 오른쪽 아래에 한 아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아이의 표정은 밝지 않다. 아니, 슬프거나 외로워 보인다. 왼쪽 면은 비어 있다. 그런데 한 장 더 넘기면 비어 있던 왼쪽 면에 아이 하나가 나타난다. 웅크리고 있던 오른쪽 아이가 왼쪽 아이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두 아이는 가운데 제본 선을 경계로 대칭을 이룬다. 이쯤 되면 독자는 왼쪽 면이 거울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아이는 거울을 보면서 맞은편 아이를 탐색한다. 힐끗거리기도 하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가 마주 보이는 그 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둘 사이에 뭔가가 역동적으로 피어오른다.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색감이 둘 사이에서 확장된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만족스러운 듯 둘은 활짝 웃으며 아주 행복하게 날아오른다. 제본 선을 따라 데칼코마니로 그려진 그림은 정확히 거울 대칭을 이루며 아이의 환희를 두 배로 표현하고 있다.
두 아이는 현실과 거울 사이의 경계선 안으로 점점 빨려 들어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라진다. 거울에도 현실에도 아이는 없다. 양쪽 면이 모두 하얗게 비어 버린다. 독자들은 대부분이 장면에서 깜짝 놀라고 더러 무서워하기도 한다.
인간은 거울을 통하지 않고는 내 모습을 완벽하게 볼 수 없다. 성인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거울을 본 아기라면 어떨까?
라캉이 말하는 거울 단계, 즉 거울을 통한 자아 형성은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에 처음으로 거울 속 이미지를 자기 모습으로 인식하면서 일어난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는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아기의 눈에 보이는 자기 모습은 팔, 다리, 손, 발 같은 부분들이라 아기는 자기 몸이 원래부터 따로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줄 알 것이다. 제 마음처럼 움직여 주지 않는 몸이 파편화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다가 거울을 통해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날이 온다. 물론 어머니최초 양육자가 “저게 너다.”라고 가르쳐 주어서 가능한 일이다.
그때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알아본 아기들은 하나같이 탄성을 지르며 좋아한다고 한다. 거울 속 이미지가 너무 완벽하고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나’는 파편화된 몸을 지닌 불편하고 불완전한 존재인데, 거울에 비친 모습은 하나의 통일된 개체이면서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완벽한 존재로 보인다. 게다가 어머니는 거울 속 나에게 예쁘다고 말해 주기까지 한다. 그렇게 아기는 거울에 비친 ‘예쁘고 완벽한 나’를 ‘나’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거울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자아 형성이다.
그림책에서 오른쪽의 실제 아이는 왼쪽 거울에 나타난 이미지를 보면서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기뻐한다. 둘이 신나게 놀다가 합쳐지는 장면은 ‘동일시’를 나타내고, 아이가 거울 속 이미지를 통해 ‘자아’를 형성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원래 거울 단계를 통해 ‘자아’를 형성하려면 반드시 어머니의 인정이 필요하다. 그림책 속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러한 어머니의 인정 단계가 있었다고 가정하면, 거울을 통한 자아 형성을 이만큼 잘 보여 주는 그림책도 없다.
깨진 것은 누구인가?
거울상을 ‘자아’로 받아들인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림책을 한 장 더 넘기면, 완전히 합쳐져 사라졌던 두 아이가 제본 선에서부터 다시 나타난다. 재미있는 점은 그 둘이 서로 같은 쪽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두 면은 대칭이 아니다. 실존하는 오른쪽 아이도, 거울상인 왼쪽 아이도 열심히 발레를 한다. 발레에 점점 심취하면서 처음에는 일치했던 두 아이의 동작이 어느 순간부터 서로 달라진다. 거울상과 실존하는 내 몸이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다.
동작이 달라지면서 오른쪽 아이가 왼쪽 아이를 따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조금 뒤 왼쪽 아이가 서로 동작이 맞지 않음을 눈치채고, 오른쪽 아이에게 화를 낸다. 거울상이 실존하는 ‘나’에게 화를 내다니! 이를 통해 실존하는 아이보다 거울 속 아이가 상황을 더 주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왼쪽 아이가 오른쪽 아이를 밀어 버린다. 순간 오른쪽 아이가 있던 면이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산산조각이 난다. 남아 있던 왼쪽 아이는 놀라 움츠린다. 그럴 줄 몰랐다는 듯이. 그리고 맨 첫 장면에서 오른쪽 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괴로운 듯이 웅크려 앉는다.
깨진 건 누구인가? 누가 거울이고 누가 실제 아이인가? 설마 거울이 아니라 실존하는 몸이 깨진 것인가? 그렇게 본다면 이 장면은 ‘소외’를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거울상을 자아로 받아들이는 대신 불완전하고 파편화된 몸을 가진 주체가 소외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이 장면을 무서워하기도 하는데, ‘나’라고 생각한 대상이 깨지는 경험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거울상과 동일시를 통한 자아 형성은 주체로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하지만, 한편으로는 진짜 ‘나’를 잃어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타자여기서는 어머니가 인정해 준 완벽한 이미지를 ‘나’로 받아들였으나 진짜 ‘나’의 주체성은 소외되었으니, 우울하고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그렇지만 ‘나’가 ‘나’를 알아보는 것은 거울처럼 나를 비추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가능하므로, 주체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거울 단계는 필연적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