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생각하면 정말 어두워요”
우울을 견디는 삶, 소희
처음 만났을 때 소희는 열일곱 살이었다. 작고 마른 체형의 단발머리 소녀는 매우 냉소적이고 세상일에 달관한 듯한 태도를 보였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 학교 밖 청소년으로 가출을 종종 하던 시절이었다. 자신의 삶과 현 상황에 대해 매우 우울해했고 암울한 상상을 많이 한다고 했다. 실제로 행동에 옮긴 적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불우한 데 비해, 소희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자신을 매우 능숙하게 표현했고, 조곤조곤 자신의 얘기를 잘 풀어냈다.
저는 자살…. 살고 싶어하지 않은 애예요. 세상이 정말 무섭고…. 사람이 무서워요. 저를 알게 되면 다 떠날 것 같은, 그런 게 좀 심해요. 그래서 막 죽는 상상을 해요.
소희는 자신의 상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어떻게 행동으로 옮겼는지 차분히 얘기했다. 내가 보기에 소희는 아직 힘이 있고 건강해 보였다. 그 감정 뒤에 있는, 본인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물론 알고 있다고 해서 그 원하는 바가 쉽게 얻어지거나 달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우울한 상상을 하는 이유는) 실질적으로는 죽는 것보다 누가 내 얘기를 들어줬으면 하는 게 더 크겠죠? 그런데 안 풀리더라고요, 얘기를 해도. 그래서 아직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더 답답할 때도 있고…. 왜냐면 얘기는 어떻게 됐든 할 순 있잖아요? 근데 제가 갖고 있는 감정들까지는 전달이 안 되잖아요. 아, 나 힘들어. 그것뿐이잖아요. 사람이 보통 다른 사람이 힘든 것보다 내가 힘든 게 더 크게 느껴지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얘기해도 별로…. 더 우울해져요.
소희의 우울함은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자신을 잡아주고 힘든 삶에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절박함 속에 있었다. 소희는 친밀한 누군가와의 관계를 그리워하고, 사람들이 무섭지만 끊임없이 누군가의 애정을 갈구했다. 그것은 다 자신이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 그렇다고 했다.
아무도 잡아주지 않는 삶
소희 어머니는 우울증을 오랫동안 앓아왔다. 약을 정기적으로 먹는데 먹고 나면 정신을 못 차렸다. 아버지는 다섯 살 때 어머니와 이혼한 후 집을 나갔다. 어릴 땐 아버지가 몇 번 찾아왔지만 그때마다 소희는 무서워서 도망쳤다. 철이 들 만큼 성장하고 나서는 아버지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 새아버지가 생겨서 같이 살기 시작했는데, 나이가 많은 새아버지는 조현병이 있었고 술을 자주 마셨다. 소희는 새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욕하고 때리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10여 년을 같이 살았지만 새아버지에게 정을 준 적은 없다.
위로 두 살 터울의 오빠가 있는데, 오빠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하고 아팠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픈 오빠에게만 관심을 쏟고 소희에게는 “신경도 안 썼”다. 오빠는 게임중독에 빠져 고등학교를 다 마치지 못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집에서 백수로 지내다가 당시에는 근처 공장에 다녔지만 그마저도 성실하진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집안 누구도 소희의 편이 되어 대화를 나누거나 마음을 의지할 만한 대상이 되어주지 못했다.
가출했을 때 가끔 엄마 집에 찾아가서 먹을 걸 사다 주고 돈도 좀 생기면 주고 오고 그랬어요. 엄마는 그냥, 저한테 잘 사냐고, 밥은 잘 먹고 다니냐고. 나중에는 (어떻게 지내는지) 잘 안 물어봐요. 그냥 제가 말했어요. 밥 먹고 산다. 사진 보여주고. 그러면 엄마가 “예쁘네. 우리 집보다 좋네” 그러고 말던데요.
어머니를 비롯해 가족들 누구도, 소희가 학교를 결석하고, 가출을 하고, 급기야 출석률 미달로 진급을 못 하는 상태가 되어도 나서서 돌봐주거나 관여하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열일곱 살이 되도록 가출과 비행을 반복하는데도 아무도 잡아주거나 혼내는 사람이 없었다.
탓이야 뭐, 했었죠. 왜 안 했겠어요. 왜 엄마는 날 안 잡아줬을까. 하지만 엄마가 저를 나쁜 길로 인도한 건 아니잖아요. 일단 저희 엄마잖아요. 그러니까 탓하는 게 너무 죄스러워요. 아빠는 저를 버렸잖아요. 엄마는 저를 안 버리고 키웠어요. 어떻게 키웠든 키웠잖아요. 그게 너무 고마운 거예요. 엄마보다는 하느님을 탓했어요. 하느님이 내가 준비가 돼 있으면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진다고 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은 거예요. 잘해보려고 하면 다 안 좋게 돼버리니까…. 포기를 할 수밖에 없죠. ‘기회를 공평하게 준다면서 왜 나한테는 그런 게 없었나요’ 하면서 혼자 원망을 했어요.
소희는 어머니도 기회가 공평하지 않은 이 세상의 희생자라고 생각했다. 사실 어머니의 인생도 자신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도 외할아버지 대에서부터 가난과 학대를 겪었고, 큰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족의 생존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소희는 철이 들고부터는 어머니가 원망스럽기보다 안쓰러웠다. 자신이 선택하고 그 선택이 잘못돼서 이런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어머니도 아무런 선택의 여지 없이 그런 삶을 받아들이고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를 원망하고 자기 불행의 책임을 어머니에게 돌리기보다 이러한 상황을 현실로 인정했다.
대를 이어 내려온 가난
처음 만났을 때, 열일곱 살의 소희는 영구임대아파트에 원가족들과 살고 있었다. 타 시에 비해 전반적으로 환경이 열악한 경기도 P시 안의, 빈곤층이 밀집해 있는 영구임대아파트는 가난한 곳의 대명사이다. 아파트가 지어지기 전부터 이 지역에서 살아온 소희 외할아버지는 전형적인 도시 빈민이었다. 이 지역은 옛날에는 농지여서 외할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살림이 각박했던 외조부모는 자녀들을 온전하게 기르지 못했다. 외할아버지는 노름을 하느라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고 외할머니는 알코올중독이었다. 외할머니는 술 먹고 행패를 부리기도 했는데, 소희는 외할머니가 어머니 목에 칼을 들이대고 죽인다고 위협했던 사건도 목격한 적 있다. 이렇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생활력이 없고 불안정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살림은 궁핍하기 그지없었다.
외할머니는 생계를 위해 급기야는 큰딸인 소희 어머니를 어린 나이에 다른 집 식모로 보내버렸다. 이후 어머니는 가족의 생계를 돌보고 동생들 학비를 대느라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지금도 어머니는 글을 읽지 못한다. 어머니가 변변한 직장을 갖기 힘들었고 기초생활수급자 자격을 유지하며 근근이 살았던 원인도 여기에 있다.
엄마는 기초수급자로 공공근로만 하고 다른 일은 못 해요. 몸도 좀 아프고 글을 몰라요. 엄마는 하고 싶어하셨어요, 식당 일 같은 거라도. 그런데 글씨를 모르시니까 못 하셨죠. 엄마는 일을 안 했다기보다 못 하셨던 거죠. (…) 엄마 또래의 아줌마들, 글 쓸 줄 아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몰랐는데…. 그래서 그런 걸 볼 때마다 씁쓸하고 안타까웠어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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