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주로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책들을 즐겨 읽곤 했다. 그는 책의 여러 페이지에 밑줄을 그었으나 시간이 흐른 뒤 노트에 옮겨 적은 구절은 이런 것들이었다.
수학 법칙은 현실을 설명하기엔 확실치 않고, 확실한 수학 법칙은 현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것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완성한 직후 남긴 말이다. 사실 학창 시절 아인슈타인은 수학 낙제생이었다. 그가 새로운 가설을 세울 때마다 그의 곁에서 수학 공식을 대신 풀어준 친구가 아니었다면 사람들은 여전히 뉴턴의 법칙만을 신봉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가 하면 『나의 투쟁』의 뒤편엔 이런 구절을 적어놓았다. 알 수 없어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요. 이것은 아돌프 히틀러가 자신의 가족에 대해 조사했던 나치스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에게 한 말이다. 게르만 민족만이 최고라는 믿음을 심어줘야 했던 나치스는 히틀러의 혈통에 대해 조사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히틀러의 큰형은 미치광이였고 조카는 그의 집요한 구애를 견디지 못해 자살했으며 동생들은 히틀러에게 총을 겨눈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히틀러의 아버지라고 알려진 그 오스트리아인은, 그러나 그의 친아버지인지조차도 확실치 않았다. 이 모든 사실은 먼 훗날, 그러니까 히틀러가 자신의 숨겨놓은 여인 에바 브라운과 지하 벙커에서 자살한 후에야 비로소 그녀의 존재와 함께 밝혀진 내용이다. 물론 그는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이 죽은 지 20여 년이 흐른 뒤에야 이러한 내용을 접할 수 있었지만, 그 긴 시간이 무색할 만큼 그 구절을 자주 중얼거렸다. 알 수 없어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요. 그가 왜 그 구절들에 마음을 빼앗겼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왜 하필 『나의 투쟁』과 『특수상대성이론』에 심취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히틀러와 아인슈타인은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인물이라는 것 외엔 별다른 공통점이 없다. 무엇보다 히틀러는 나치스였고 아인슈타인은 유대인이다.
그는 이 구절들을 반복적으로 읊어대던 시절, 자신이 군인이 되거나 물리학자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만약 조국인 호주를 떠난다면, 그건 전장에 뛰어들거나 우주를 탐험해야 하기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다.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그 책들에 심취해 있던 시절, 소련의 흐루쇼프는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기로 결심했고 케네디는 그에 맞서 해상 봉쇄를 선언했으니 말이다. 바야흐로 1960년대였다. 소련과 미국이 경쟁하듯 달에 우주선을 쏘아 올리던 1960년대. 그러나 미국의 젊은이들이 핵보다는 에이즈를 더 두려워하게 되고 『나의 투쟁』이나 『특수상대성이론』보다는 「보니 앤드 클라이드」 같은 청춘 영화의 스냅사진이 잔뜩 실린 잡지를 더 즐겨 보게 되었을 때 그가 호주를 떠나게 된 건, 아돌프 히틀러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그가 군인이나 물리학자가 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언어학자가 되어 호주를 떠났다. 그가 지원한 국가인 한국은 전장도 아니었고 달의 뒷면도 아니었다. 그저 동북아시아 끝에 위치한, 생소한 언어를 쓰는 작은 나라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한국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한국에 지원하기 몇 달 전까지 그는 박사과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학위논문을 쓰고 있었다. 논문의 연구 주제는 호주 북부 원주민들의 언어인 카야르딜드어였다. 모든 언어가 그러하듯 카야르딜드어에도 고유의 법칙이 존재했다. 카야르딜드어 화자들은 자신의 감각이 아닌 나침반의 방위를 기준으로 언어를 구사했다. 그가 카야르딜드어를 배우면서 가장 어렵다고 느꼈던 부분이었다. 어떻게 보면 카야르딜드어를 사용한다는 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존중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가 겨우 자신보다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우선시하는 자세를 갖게 되었을 때였다. 논문의 마지막 장을 다 채우지 못하고 연구는 중단되었다. 카야르딜드어의 마지막 화자는 어느 순간부터 대화가 어려울 정도로 노쇠해지고 있었다. 마지막 화자의 죽음과 동시에 모든 것을 오해 없이 말하고자 했던 언어 하나가 완전히 소멸했다. 논문은 완성되지 못했고 심사는 기일을 정하지 못한 채 미뤄졌다. 새로운 연구 주제에 대해 언급하는 지도교수를 보며 그는 언젠가 카야르딜드어의 마지막 화자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카야르딜드어를 쓰는 부족에게는 반드시 다른 언어를 쓰는 부족과 혼인해야 한다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가정에서는 평균 여섯 개 정도의 언어가 사용되었다. 다른 부족의 언어를 인정하는 것이 그들에겐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체 왜 그렇게 많은 언어를 사용하죠? 유럽이나 아시아의 많은 국가는 오로지 단 하나의 언어만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의 물음에 카야르딜드어의 마지막 화자는 진심으로 의아한 표정이 되어 이렇게 되물었다.
“단 하나의 언어로 어떻게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는 곧 단일어를 쓰는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 한국이란 나라에서 언어적 특이점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한국어 중 일부가 한국전쟁 이후부터 원래 의미와 다르게 사용되거나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남한에서는 빨강, 제복, 동무와 같은 단어들이, 북한에서는 반동분자와 같은 단어들이 사라졌거나 30여 년 전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는 여태 한 번도 관심 가진 적 없던 한국이라는 나라에 가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는 한국에 대해서도, 한국어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오랜 시간 연구해온 카야르딜드어에 대해서도 그가 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개월 후, 그는 한국 땅을 밝기 위해 짐을 꾸렸다. 데이비드 셰이퍼. 호주 국립대학 문화·역사·언어학 전공. 학생증 위에 씌어진 단 두 문장만이 그를 입증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그는 비행기를 타기 전 학생증을 여행 가방 안쪽에 꿰매어 넣었다. 여권을 찾으러 들어갔던 방구석에서 『나의 투쟁』과 『특수상대성이론』을 발견하고는 잠시 서성이기도 했으나 그는 결국 조금 더 가벼운 가방을 들고 비행기에 오르는 편을 선택했다.
한국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에서야, 그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죽은 뒤 그 자신이 평생 이와이자어를 가르쳤던 호주 북부 아넘랜드의 한 마을에 묻혔다. 아버지의 꿈은 그곳에 이중 언어·이중문화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 학교의 가치에 대해 말할 때마다 ‘간마(ganma)’라는 은유를 사용하곤 했다. ‘간마’란, 강을 따라 흘러내려가던 민물 기류가 반대로 유입되는 바닷물과 섞이는 특별한 혼합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그는 아버지를 떠올리면 아버지의 얼굴이나 말투, 행동, 체취보다 ‘간마’라는 단어가 떠오르곤 했다. 그 또한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를 따라 몇 번 그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은 어머니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는 이와이자어를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언제나 발끝만 내려다보며 입을 다무는 그에게 마을 사람들은 염려의 눈길을 보냈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의 언어’를 부여받는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누구든 이와이자어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아이도 곧 여러분과 이야기할 수 있답니다”라고 유창한 이와이자어로 그를 감싸주곤 했다. 당시 마을 사람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아버지를 보며, 그는 아버지가 제법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아들의 언어보다 이와이자어를 더 잘 아는 아버지’로서 말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아버지는 그다지 성공한 삶을 살진 못했다. 아버지는 끝내 그 마을에 이중 언어·이중 문화 학교를 세우지 못했던 것이다. 이와이자어의 많은 화자가 직업을 구하기 위해 도시로 나가면서부터 그들은 영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이와이자어는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아버지는 이와이자어를 기록하며 보전하기 위해 애썼지만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관찰자에 의해 복원된 언어는 완벽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좋은 청자는 될 수 있었지만 완벽한 화자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남긴 것이라곤 이제는 한 명의 화자도 남아 있지 않아 해독이 불가한 언어를 기록해놓은 종이 뭉치들과 그 곁에서 쓸쓸하게 죽어간 늙은 육신뿐이었다.
아버지의 부고를 들었을 때 그는 전날 학교 축제에서 만난 여자와 이제 막 관계를 가지려고 하던 참이었다. 그래도 한달음에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고도 그는 전혀 울지 않았다. 장례식이 끝난 직후에는 성당 구석에서 여자와 관계를 갖는 것까지 성공했다. 도무지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얼굴이나 체취 대신 ‘간마’, 자꾸만 낯선 그 이와이자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러 집으로 돌아간 것도 장례식을 치르고 한참이 지나서였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어디선가 이와이자어로 말하는 낯선 방문객이 불쑥 등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겨우 집으로 돌아간 그가 아버지의 방문을 열었을 때 다행히 이와이자어로 말하는 낯선 화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데이비드 셰이퍼, 그의 눈에서 눈물이 조금 나왔을 뿐이었다.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 빵 조각, 그 옆에 말라붙은 딸기잼, 돌돌 말린 채 책상 밑에 던져져 있는 양말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중년 남성의 소지품들을 정리하면서 이상하게도 눈물이 조금씩 흐르기 시작했다. 애써 눈물을 참으며 책상 위에 놓인 소지품들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서랍을 열었을 때였다. 그는 서랍 안에 놓인 사진 한 장을 보았다. 사진 속에는 그의 나이 또래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와 그와 엇비슷한 또래의 아버지가 서 있었다. 아버지는 감색의 정장 재킷에 붉은 꽃 한송이를 단 채 최대한 늠름해 보이려 애쓰는 표정이었고 아버지 곁의 여자는 프릴이 많이 달린 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실밥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원피스의 치맛단을 보니 싸구려가 분명했다. 아버지의 정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바지 길이가 껑충한 것이 누군가에게 빌려 입은 것 같았다. 건강한 혈색에 새까만 눈썹을 가진 여자는 이 사진을 찍고 2년 뒤에 죽을 거였다. 그는 사진 속 젊은 부부를 보며 이번엔 좀 펑펑 울었다. 그는 아버지의 방에선 낯선 언어로 말하는 이방인만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이와이자어와 결혼했다고 생각했고 아버지의 가족은 아넘랜드의 원주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는 아버지의 평생이 담긴 상자 하나를 가지고 나오면서 아버지를 이와이자어의 땅이 아니라 어머니의 곁에 묻어줄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의 눈에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언어, 아버지의 여자. 혹은 그의 어머니. 하긴, 이제 아버지는 많이 늙었고 이십대에 죽어버린 어머니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사진의 여인 그대로였으므로 지금 다시 이들이 만난다고 해도 이제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해서 집을 나온 뒤 그는 두 번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돌아갈 수 없었다. 그가 반드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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