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시다, 금성으로
설자은은 오래 머물렀던 장안을 사신단과 함께 떠나, 육로로 등주까지 왔다. 유학생으로 처음 당나라 땅을 밟았던 곳에서 다시 떠나게 되다니 한 생이 끝난 듯한 감회가 일었다. 뜻밖의 전쟁으로 사신단이 오가지 않은 기간이 길었고, 덕분에 수학 기간이 배가 되어 지원 없이 고립되고 말았다. 지니고 왔던 것을 다 팔아야 했으며 스승과 친우들이 따로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면 굶어죽은 몸이 가는 뼈로 흩어진 지도 한참이었을 것이다. 두 나라의 사이가 드디어 회복되어 신라 왕경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사흘 먹지 않아도 허기를 느끼지 않게 된 다음이었다. 익숙한 듯 낯선 항구에 도착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맞는 바람을 기다리느라 등주에서도 한동안을 지내야 했는데, 그래도 길게 기다린 편은 아니라고 했다. 위태로울 정도로 얇아진 옷이 바닷바람에 펄럭였다. 신라 땅에 닿을 때까지만 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배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살이 내려 몸이 닿는 곳마다 갑판이 그대로 느껴졌는데 큰 바다를 몇 번이고 건넌 배인지라 나뭇결이 매끈히 다듬어져 있어 다행이었다. 밤에는 배 위에 가볍게 지어진 뱃집 한구석을 차지할 수 있겠지만, 해가 떠 있는 동안은 짐 상자에 기대어 있기로 했다. 설자은의 낡고 장식 없는 상자들 안에는 경전과 다른 책들이 들어 있었다. 짐을 싸는 동안 고작 이 종이 묶음들을 위해 목숨을 걸었나 싶을 때도 있었고, 한 권 한 권이 소중해서 품에 품고 가고 싶을 때도 있었다. 상자 틈을 풀로 메우긴 했지만 그래도 바닷물이 닿지 않도록 적당한 곳에 두었다.
“무겁네요. 뭐가 들었습니까?”
나르는 걸 도와준 선원이 허리를 펴며 물었다.
“다 책이오.”
젊고 쾌활해 보이는 짐꾼에게 다른 의도는 없어 보였지만, 자은은 한 손으로 아직 담그지 않은 상자를 열어 안을 보여주었다.
“귀중한 사람에게만 귀중하지.”
육십 명이 넘게 타는 배에 도둑이 없을 리 없으니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다. 괜히 밤중에 거친 손, 젖은 손으로 헤집어보지 않도록. 선원은 그런 자은을 향해 시원하게 웃으며, 상자를 잠그고 그 위로 기름 먹인 천을 덮는 것을 거들어주었다.
“이 책들을 다 공부하신 겁니까?”
자은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워 쓸 수 있었다. 그럴 수 있는 머리 때문에 형제들 중 차출되어 두 번 큰물을 건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다 배웠느냐고 물어온다면, 그건 평생의 과업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금성으로 가십니까?”
배는 사신단이 탄 본선과 함께 당은포까지 가는데, 그곳에서 금성까지는 다시 육로로 칠백 리였다. 배에 탄 유학생, 구법승, 상인 들은 당은포에서 각자의 목적지로 흩어지겠지만 대개 금성으로 향할 터였다.
“금성 사람이오.”
자은은 돌아가길 택했다. 다른 나라 출신 중에 아예 돌아가지 않고 당의 관리가 되는 길을 택하는 이들도 슬슬 늘었지만, 자은은 그 선택지를 고려하지 않은 지 몇 년 되었다. 금성을 떠날 때는 허물을 벗어던지고 온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곳에 두고 온 쪽이 진짜이고 물을 건넌 자신이 허물인 것처럼 느껴졌다. 매미 껍데기처럼 색이 없고 안쪽이 텅 빈 무엇…… 어쩌면 배고픔을 지나쳐 언제나 살짝 발이 땅에서 뜬 듯한, 가시지 않는 어지러움에 시달리고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돌아가 확인하기 전까지는 짚어 말할 수 없을 터였다.
“금성은 어떤 곳입니까?”
젊은 선원은 가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금성, 서라벌, 왕경 뭐라고 부르든 태어난 곳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자은 안에 차오르는 것이 있었다.
“또 없는 곳이오. 어딜 가도 금성 같은 곳은 없을 테요. 어느 방향으로 서도 금과 유리와 다른 귀한 것들로 조각한 땅 같지요.”
“정말 그렇게 사방이 금입니까?”
“과장은 얼마간 있겠지만……”
자은은 자신이 말한 금이 꼭 금을 가리키기보다는 완벽하게 들어앉은 도시 위로 내리는 햇빛까지도 포함한다고 덧붙일 새가 없었다.
“만덕아!”
“가봐야겠네요.”
선장이 젊은 선원을 재촉하자, 선원은 급한 기색을 꾸미지도 않고 느긋하고 큰 보폭으로 멀어져갔다.
“걸음 좀 봐라. 요즘 어린것들은 제대로 된 녀석들이 없다니까. 저 녀석이 공자를 귀찮게 하던가요? 이런 배는 처음 타는 놈이라 제가 길을 들일 새가 없었습니다.”
선장의 우려 담긴 인사에 자은은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바다를 수십 번 넘게 건넌 선장이라고 들었다. 땅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읽을 수 없을 하늘의 지도와 바람의 기색을 읽을 수 있는 이가 아닐까, 자은은 선장의 소탈한 얼굴 뒤에 숨은 것들을 엿보고 싶었다. 여전히 호기심만은 남아 있다는 것이 스스로도 신기했다. 선장과 선원들이 알려진 것보다 더 뛰어난 이들이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간의 고생을 한 후 그저 바다에 삼켜진다면…… 난파와 조난의 소식은 끊이지 않았고 어떤 배들은 그마저도 남기지 못했다. 어디서 삼켜졌는지도 모르게 삼켜지면 해변에 밀려오는 잔해도 없었다. 자은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재난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다른 손님들이 배에 오르는 걸 보았다. 주로 상인들이었다. 황마와 삼, 비단, 차와 약재, 서화와 도자기 등이 여기저기에 균형을 고려해 쌓이는 걸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자은의 곁에도 세 사람의 상인이 자리를 잡고 각자의 거래 경험을 삼한 말에 대국 말을 섞어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배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면서 하는 이야기일 뿐 중요한 내용은 하나도 없음을 서로 알고 있는 듯했다.
위세가 대단한 상인 한 사람이 부인과 딸을 데리고 배에 올랐다. 가족을 대동한 것이 눈에 띄기도 했지만, 다루는 물건이 귀한 것인 듯 짐을 간수하는 모습이 무척 예민해 보였다. 경직된 자세로 여러 번 주변을 살피는 얼굴에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저 친구는 장신구래.”
“그래? 아는 자야?”
“아니, 아까 잠깐 말을 섞어보려 했는데 저쪽은 원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
들리는 말을 들으며 장신구 상인의 부인과 딸을 살폈지만 딱히 치장을 하지 않은 채였다. 물건을 선보이고자 이것저것 달아줄 만도 한데…… 저쪽도 도둑을 경계하는지 몰랐다. 아닌 게 아니라 장신구 상인은 상당히 날선 상태로 보였고, 부인과 딸을 곧바로 갑판 아래로 내려보냈다. 남자들이 뱃집에 머물 걸 고려해 내려보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출발도 전에? 전혀 쾌적하지 않을 텐데, 하고 자은은 여인들을 가볍게 걱정했다.
마지막으로 아슬아슬하게 배에 오른 건, 웃는 얼굴의 남자였다. 위험한 항해를 앞두고도 그리 신나나, 희한한 이구나 싶어 자세히 보니 정말로 웃고 있다기보다는 눈꼬리와 입꼬리가 묘하게 그런 모양이었다. 적절하지 못한 순간에는 오해를 받기 십상일 듯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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