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을 읽기
위하여
김수영 시를 떠올리면 모두들 어렵다, 난해하다는 생각부터 떠올릴 것입니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김수영 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까요, 공부라고 할까요, 이런 것들이 빠진 채로 말해진다는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물론 모두가 김수영 시를 이해하기 위해 고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독자들은 자신들이 좋아하고 선호하는 시인을 읽을 권리가 있지요. 그리고 자기 가슴에 좀처럼 다가오지 않는 시를 아무래도 멀리하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여기서 꼭 말해야 할 것은, 시 자체가 원래 어렵다는 겁니다. 이 말은 학교 교육이 시를 가르칠 때 문제 풀이 방식으로 접근하게 해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시의 언어가 본래 함축적이고 종합적이고 또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세계를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시는, 우리가 인간인 한에서는 언제나 쉽습니다. 비유하자면 시는 인간의 삶에서 피어나는 꽃 같다고나 할까요.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한 시는 언제나 우리 안에서 꿈틀대는 무엇입니다. 의당 삶이라고 하면 생활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생활을 통해 삶을 영위하지만 삶은 또 생활을 벗어나 다른 영토를 상상하는데, 이 상상의 에너지는 우리 ‘전체’에서 제공됩니다. 먼저 우리 몸이 있습니다. 몸은 나 하나의 개체를 가리키지 않고 몸과 몸이 만나는 장場까지 포함합니다, 그리고 이 장을 통해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역사가 진행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순차적이지 않고 또 모든 것이 가시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제한된 감각으로는 느끼지 못하는 게 허다하죠. 그래서 우리는 이성을 통해 정신을 계발하고, 감성을 통해 상상하고 그리움을 갖기도 합니다. 제 생각으로 영혼은 이러한 모든 것을 일컫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합은 아니죠. 모든 것이지만 그것들과 다른 것이라고만 말해두기로 하겠습니다.
따라서 시는 언어와 리듬으로 나타나기 전에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망각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쓰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쉬운 거죠. 다만 우리 각자의 영혼이 다르듯이 시를 쓰는 이도 각자의 영혼으로 시를 쓰다 보니까 그 발현 형태가 천차만별이 됩니다. 더군다나 근대사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복잡해지고 혼란스럽습니다. 처음에는 세상 만물이 계측 가능하고, 예측할 수 있으며, 인간의 지성으로 심지어 조작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쳤지만, 이 계산과 조작이 중첩되면서 도리어 혼돈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우리의 영혼도 어지러울 수밖에 없고, 이 어지러운 영혼을 차라리 잊어버려야 삶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본능적으로 섭니다. 이 와중에서 그나마 견디고 버티면서 시를 쓰다 보니 현대시가 어렵게 되거나 희한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읽게 될 김수영의 경우를 통해 느끼실 테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시가 나쁘거나 쉬운 시가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어려운 시와 쉬운 시, 그리고 좋은 시와 그렇지 못한 시는 범주가 다르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김수영의 시가 어렵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단적으로 말해 김수영 시인이 자신이 처한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영혼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고투를 통해 시를 썼기 때문일 겁니다. 김수영은 시를 쓸 때 굳이 어려운 말을 골라 쓰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단어가 있는 것은, 그 사이에 우리가 쓰는 언어생활에 변천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 김수영의 시를 읽다 보면 우리가 지금 쓰지 않는 말이나 그 표기법이 지금과는 다른 말들이 다수 발견됩니다. 물론 『김수영 전집』의 가장 최근 판에서는 일부 지금의 표기대로 고쳐놓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김수영 시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언어의 변천에도 이유가 있지만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가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고 처음 발표한 「달나라의 장난」을 읽어봐도 오독을 할 여지는 이곳저곳에서 발견됩니다. 이 작품은 김수영이 1959년 시집을 낼 때 표제작으로 삼을 만큼 김수영 자신이 애착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시인이 자신의 시집을 낼 때 삼는 제목은, 대체로 시인이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나 시집 전체를 종합해서 의미하는 나름 ‘대표작’을 앞세우기 마련입니다. 시인이 나름 앞세운 작품이라고 해서 그것이 누구나 동의하는 대표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시인 입장에서는 그렇다는 겁니다. 「달나라의 장난」은 김수영 시 전체에 있어서 대표작 중 하나로 불러도 무방한 작품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좀 더 자세히 말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왜 이 중요한 작품에 오독의 여지가 있는지도 그때 자세히 말씀드리기로 하지요.
아무튼 김수영의 시가 어렵다는 세간의 평가는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을 뚫고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면 의외로 깊은 감동과 시 읽기의 보람을 느낄 수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어려운 시를 힘듦을 감내하고 읽어냈다는 성취감을 넘어 김수영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진의에서 삶의 진실과 우리가 사는 역사의 질곡을 시가 돌파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시를 시로써 읽고 감상하면 되지 무슨 삶의 진실과 역사의 질곡을 넘어서는 자신감까지 바라느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습니다만, 시가 단지 심정적 울림만 우리에게 준다면 시와 삶의 거리는 더욱 멀어질 뿐이라는 게 제 나름의 입장입니다. 그러한 예술에 대한 입장을 이른바 ‘예술지상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술지상주의를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일종의 허무주의로 비판한 바가 있습니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심정적 울림과 삶의 진실과 변화 사이에 큰 심연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사이에는 무언가/누군가가 넘어서기 힘든 간극이 있다고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도 우리의 현실이긴 합니다. 여기에서는 이에 대해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여섯 번에 걸쳐 김수영을 읽어나가면서 부지불식간에 이 문제가 부각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김수영 자신이 그것을 극복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김수영의 시가 왜 어렵다고들 말하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말하지 않았군요. 간단하게 말하면 김수영은 시를 쓸 때, 그러니까 창작의 출발 지점이 여타의 시인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리얼리즘 양식의 특징으로 거론되기도 하는 사물이나 사건의 재현, 즉 어떤 대상에 대한 묘사나 그것에서 생긴 감정의 동요로부터 시작되거나,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정리된 입장에서 시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시들은 대체로 작품의 완결미를 지향합니다. 재현이든 입장의 개진이든 시인의 가슴이나 관념 속에서 이미 종결된 사태를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지요. 대체로 전통적인 의미의 서정시든, 또는 사물의 이미지나 관념을 시적 형식으로 꾀하는 모더니즘 시든, 아니면 현실에 대해 개입 혹은 발언을 하는 실천적인 시든 대부분 이러한 모습은 같습니다. 여기에 무슨 문제나 하자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에서 말했듯 시가 우리의 삶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라면 그게 만개한 꽃일 수도 있고 수줍은 봉우리일 수도 있지요. 아니면 돌연변이일 수도 있는데, 돌연변이라는 것도 전에 아예 없던 게 아니라 그야말로 변종 또는 혼종입니다. 기존의 유전자가 다르게 배치되는 게 돌연변이지 전혀 다른 무엇은 아니잖아요?
김수영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 새로이 눈뜰 때, 혹은 시를 통해 새로운 인식의 형식을 구하면서 시를 쓰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면에서는 지성이 서정의 세계를 어지럽게 하거나 당대와 일반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언어의 맥락을 취하지 않습니다. 이러다 보니 이미지와 이미지가 연결되는 데 있어서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지요. 다른 말로 하면 어휘 자체는 생활어인데, 그것이 출현하는 맥락이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그런 일반성을 갖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김수영 자신이 ‘언어의 이민’이라고 불렀던, 일본어를 거쳐 영어 그리고 점점 한국어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짧은 시간에 거쳤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본질적으로는 김수영이 산 세계가 그에게 상당한 혼란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언어의 이민’을 강제당한 역사가 평화롭고 안정된 시간일 리는 없겠지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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