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시선집
허수경,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2023-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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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허수경
196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자라고 대학 역시 그곳에서 다녔다. 오래된 도시, 그 진주가 도시에 대한 원체험이었다. 낮은 한옥들, 골목들, 그 사이사이에 있던 오래된 식당들과 주점들. 그 인간의 도시에서 새어나오던 불빛들이 내 정서의 근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밥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고 그 무렵에 시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봉천동에서 살다가 방송국 스크립터 생활을 하면서 이태원, 원당, 광화문 근처에서 셋방을 얻어 살기도 했다.
1992년 늦가을 독일로 왔다. 나에게는 집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셋방 아니면 기숙사 방이 내 삶의 거처였다. 작은 방 하나만을 지상에 얻어놓고 유랑을 하는 것처럼 독일에서 살면서 공부했고, 여름방학이면 그 방마저 독일에 두고 오리엔트로 발굴을 하러 가기도 했다. 발굴장의 숙소는 텐트이거나 여러 명이 함께 지내는 임시로 지어진 방이었다. 발굴을 하면서, 폐허가 된 옛 도시를 경험하면서, 인간의 도시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았다. 도시뿐 아니라 우리 모두 이 지상에서 영원히 거처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사무치게 알았다.
서울에서 살 때 두 권의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을 발표했다. 두번째 시집인 『혼자 가는 먼 집』의 제목을 정할 때 그것이 어쩌면 나라는 자아의 미래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독일에서 살면서 세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를 내었을 때 이미 나는 참 많은 폐허 도시를 보고 난 뒤였다. 나는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했다. 물질이든 생명이든 유한한 주기를 살다가 사라져갈 때 그들의 영혼은 어디인 가에 남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뮌스터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학교라는 제도 속에서 공부하기를 멈추고 글쓰기로 돌아왔다. 그뒤로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산문집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너 없이 걸었다』, 장편소설 『모래도시』 『아틀란티스야, 잘 가』 『박하』, 동화책 『가로미와 늘메 이야기』 『마루호리의 비밀』, 번역서 『슬픈 란돌린』 『끝없는 이야기』 『사랑하기 위한 일 곱 번의 시도』 『그림 형제 동화집』 『파울 첼란 전집』 등을 펴냈다. 동서문학상, 전숙희문학상, 이육사문학상을 수상했다.
2018년 10월 3일 뮌스터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고집으로 『가기 전에 쓰는 글들』 『오늘의 착각』 『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가 출간됐다.
허수경 지음ㅣ 문학과지성사 , 2023-10-03
한식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안부를 묻습니다.
살아 세운 허술한 집보다
단정한 햇살이 결 고운
식솔 거느리고 먼저 앉았는데
먼 산 가차운 산
무더기째 가슴을 포개고 앉은
무심한 산만큼도 벗하고 싶지 않아
우리보다 무덤이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아주 오래전 이승사람일 적
우리만큼 미련퉁이였을
그가요 살아 세운 허술한
집에서 여즉
그와 삶을 나누고 있는 우리에게요
점심밥만큼 서늘한 설움이
장한 바람에 키를 낮추는데
낫을 겨누어 베허버리는 건
누워 앉은 무덤입니다.
신원경
산소에 갈 때마다 저 둥근 무덤 속에 친밀한 육체가 들어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몸이 흙을 껴안고, 시간과 함께 서서히 허물어져 마침내 형체를 잃으며 우리를 떠난다는 것이. 그럼에도 우리는 무덤 속에 사랑하는 이가 잠들어 있기를 바란다. 그가 유독 좋아했던 사과 한 알을 들고 함께 나눠 마실 막걸리를 뿌린 뒤, 잠든 조카가 무사히 모든 것을 알게 되기를 바라며 두 번씩 절을 올린다. 돗자리 위에서 우리는 슬픔과는 영 무관한 이야기를 한다. 작년의 농담을 반복하면서. 그렇게 지나가는 시간을 말없이 응시하다가 자리를 턴다. 지난해에 가지치기했던 나무는 이전과 동일해져서 우리는 꼭 과거의 어떤 순간으로 되돌아온 것만 같다. 산소에 다녀오면 큰아버지는 한동안 현관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영혼이 드나들 수 있도록. 산 자의 몸에 붙어온 영혼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그 얼굴들을 보고 온 날이면 무덤보다도 할 말 없는 사이가 친밀하지 않은 사이는 아니라고 이해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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