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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가 아니다
토요일 아침이다. 일찍 일어났다. 연일 고단하다. 식구들은 아직 잔다.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밥을 먹기로 한다. 여느 날처럼 접시 하나에 반찬을 대강 담으려다가 선반 높은 곳에 올려 둔 반상기를 꺼낸다. 결혼할 때 엄마가 주신 건데 좀처럼 쓰지 않아서 새것 같다. 냉장고에 있던 미역국을 데우고, 밀폐 용기에 담아 둔 고사리나물을 다시 볶고, 잘 익은 김치를 꺼내 하나씩 백자에 담는다. 내 밥상을 이렇게 단정하게 차려 본 적은 별로 없다. 오늘은 밥도 천천히 먹을 거다.
다섯 살 땐가, 아직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외삼촌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숙모는 큰시누의 아이에게 좋은 반찬을 해 먹이고 싶었나 보다.
“좋아하는 음식이 뭐니?”
그런 질문을 생전 처음 받아 봤다. 내 선호를 물어봐 준 사람이 없었고, 세상에 무슨 음식이 있는지도 잘 몰랐다.
“…고사리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나도 그때 알았다. 숙모가 살짝 웃었다. 저녁상에는 불고기와 함께 고사리나물이 놓여 있었다.
영국에서도 말린 고사리를 살 수 있다. 런던에 있는 한인 슈퍼마켓에서는 고사리뿐 아니라 곤드레, 취나물, 가지, 호박, 무시래기, 토란대 같은 말린 나물을 판다.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사나흘이면 온다. 보통 마른 것들은 생기가 없다. 마른 꽃, 마른 풀, 마른 밥, 마른 빵, 마른 입술 같은 것이 그렇다. 수분, 빛깔, 생명… 사라져 버린 것의 빈자리만 보인다. 그런데 마른 나물은 다르다. 빠져나간 자리를 다른 것들이 꽉 채우고 있다. 햇살, 수고, 기다림, 부활의 희망까지. 먹고 나면 힘이 솟는 것은 그 때문일까?
일전에 최 선생을 리치먼드 파크에서 만난 적이 있다. 함경남도 청진에서 온 그는 영국에 정착한 천 명가량의 북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난민으로 와서 지금은 이곳 시민으로 산다. 2016년에는 마음 맞는 이웃들과 ‘런던한겨레학교’라는 한글 학교를 세웠고, 나는 2018년에 이 학교에서 자원 교사를 하며 최 선생을 처음 만났다.
일찍 와서 자리 잡고 기다리던 최 선생이 말했다.
“와, 저기 뒤에는 고사리가 잔뜩 있네요.”
고사리라니, 런던 최대의 왕립 공원과 고사리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았다.
“이런 데 고사리가 있어요? 어떤 거예요?”
“아니, 고사리를 모르세요?”
최 선생은 어떻게 모를 수 있냐는 얼굴로 반문했다. 나는 누군가 손질해 매대에 올려놓은 고사리밖에 본 적이 없었다. 세상 편하게 살았다. 야생 고사리도, 그걸 뜯고 말린 사람도 모른다. 모르는 게 너무 많다.
큰아이 애린을 낳고 나서 한동안 삼시 세끼 미역국을 먹었다. 엄마는 소고기 양지를 푹 삶아서 날마다 국을 끓여 주셨다. 의사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산모라도 미역국은 하루에 반 그릇이면 충분하고 그 이상은 아이오딘 과다 섭취로 오히려 좋지 않다고 하는데, 과학이 전통을 이기지 못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산모에게 미역국은 음식을 넘어 심신의 보약이고, 가족의 돌봄이고, 엄마로 거듭나는 통과 의례다.
둘째 린아를 낳을 때는 영국에 있었다. 곁에서 돌봐 주는 사람이 없었다. 미역국은 내가 끓였다.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갈 때, 미역국에 밥을 말아 밀폐 용기에 담아 가져갔다. 누가 뭐래도 출산하고 첫 끼는 그걸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정신없이 힘들고 긴 하루가 지나 아이가 태어났고, 밤이 되었다. 가족은 함께 있을 수가 없어서 남편 토니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엄마가 데리고 잔다. 고단한 아기는 쌕쌕거리며 잘 잤다. 가방을 뒤져 미역국 담은 용기를 꺼냈다. 국은 차갑고 밥알은 불어 있었다. 씹지도 않고 넘겼다. 목이 멨다. 그때는, 오늘 세상에 나온 아기만큼이나 나도 이곳이 낯설었다. 아이는 부디 두렵지 않기를 바랐다.
그날 병원에서 먹은 미역국은 오랫동안 슬픈 기억이었다. 하지만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한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장면이 분명히 드러나기도 한다. 나중에야 생각났다. 그때 나를 돌봐 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엄마가 보낸 소포를 왜 잊고 있었을까? 출산을 앞두고 커다란, 그러나 가벼운 소포가 한국에서 왔다. 마른미역을 한가득 담고서.
영국은 한국처럼 무상 급식을 하지 않는다.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사 먹을 수 있지만 비싸고 맛이 없어서 대부분 점심 도시락을 싸서 다닌다. 나의 하루는 도시락 싸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제는 버섯과 유부를 넣어서 밥을 볶았다. 싸는 김에 린아 남자 친구, 타이의 도시락까지 쌌다. 그 아이는 점심을 맨날 사 먹는단다. 어차피 담는 거, 한통 더 담으면 되니 가끔 그렇게 한다.
도시락 보자기를 묶으면서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노인이 되어서도 그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그게 평생 서러우셨나 보다. 엄마는 육 남매의 첫째였고, 착했다. 자기 것을 주장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잘 대접받기 어렵다. 어떨 때는 속상해도 참는 건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그 사람한테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중학교에 다닐 때니 아주 오래전 일이다. 점심 도시락을 열었는데, 반찬으로 김치 포기를 썰고 남은 배추 밑동인 ‘꼬다리’만 잔뜩 들어 있더란다. 집에 와서 할머니한테 섭섭한 마음을 얘기했더니, 할머니가 그랬단다.
“너는 그거 잘 먹잖니.”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다는 가수 지오디god의 노래 가사처럼 보통은 자식이 엄마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법인데… 불쌍한 우리 엄마. 외할머니는 너무 무심했다.
엄마는 무슨 음식을 좋아하셨을까? 늘 식구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드셨을 뿐 당신 선호를 얘기해 주신 적이 없다. 아버지가 즐겨 드신 가자미식해나 우리가 사랑했던 김초밥을 엄마도 좋아하는지 물어본 적도 없다. 그래, 명란젓… 돌아가시기 전에는 유독 명란젓을 찾으셨다. 그런데 나는 신장 투석을 하는 엄마가 염분 많은 젓갈을 먹으면 안 되는 이유를 조목조목 대면서 드리지 않았다. 기쁨없이 누워만 계시던 엄마의 마지막 시간을 돌아보면, 꼭 그랬어야 했나 싶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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