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이런 장면을 상상해보라.
아무런 향기나 악취가 없어서 메마른 느낌마저 주는 공기, 병원 로고가 프린트된 희고 뻣뻣한 시트, 얇은 이불을 들추고 나와 소변 봉투로 향하는 도뇨관. 일반실과 달리 중환자실의 침대 난간은 강화플라스틱으로 덧대어져 있는데, 특유의 곡선은 환자를 요람에 누운 아기처럼 보이게끔 한다.
당신은 노인의 평온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죽음과 탄생이 맞닿아 있다는 격언을 되새기고, 고개를 들어 삶이 업보의 총합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노인의 머리 위에는 두 가지 색상으로만 이루어진 원판이 떠올라 있다. 원판을 돌릴 시간이다.
생명 유지 장치가 정지하면서 심전도가 곧은 일직선을 그리고, 멈춰 있던 원판은 망자의 생기를 흡수한 듯 빠르게 돌기 시작한다.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지는 것은 바늘이 청색 부분을 다섯 번째로 지날 무렵인데, 이대로라면 적색 부분을 온전히 통과하지 못할 것 같다. 침대를 둘러싼 사람들의 입에서 때 이른 탄식이 흘러나온다. 옆 사람의 손목을 꼭 붙잡는 이도 있다.
이제 어떻게 될까?
적색 부분에 접어든 바늘은 힘겹도록 느리게 나아간다. 당신은 시간의 흐름이 바늘의 보폭에 발맞추어 가는 것을 느낀다. 누군가에게는 악당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선인이었을 노인의 평생이, 바늘의 뾰족한 끄트머리에 압축되는 것을 느낀다. 바늘이 마침내 멈춘다. 청색. 통과다. 온화한 빛이 노인의 영혼을 거두어 가고 주름진 얼굴에도 평온한 표정이 떠오른다. 안도의 눈물과 환호성이 뒤섞여 나온다. 당신은 함께 기쁨에 젖어 있다가, 갑작스러운 절규에 몸을 돌린다.
대각선 병상의 바늘은 적색에 멈춰 있다. 그림자가 검은 연못처럼 열리더니 앙상한 손들이 청년의 영혼을 붙잡아 뜯어내는 중이다. 그런데 당신을 소름 끼치게 만드는 것은 어둠으로부터 들려오는 희미한 비명이 아니라, 청년의 원판에서 청색 비중이 9할이 넘어간다는 사실이다.
1장
바퀴가 막 발명되었을 때 지구에는 700만 명의 인간이 있었다. 바퀴는 도공陶工의 공방에서, 물레방앗간에서, 수송로에서, 전장에서, 시계판 아래에서 역사를 이끌어왔다. 바퀴의 회전은 시작도 끝도 없는 반복이자 순환이지만 그것이 멎는 순간은 시작이거나 끝이다. 차의 바퀴가 갑작스레 멈추면 교통사고가 일어난다. 카지노의 빅휠이 멈추면 누군가는 돈을 잃고 누군가는 돈을 번다. 로마신화의 여신 포르투나는 수레바퀴를 돌려 행운과 불운을 뒤바꾸고, 타로 카드의 10번 아르카나는 ‘운명의 수레바퀴’다.
그렇다, 운명의 수레바퀴. 작년 여름을 기점으로 수레바퀴는 비유와 상징의 세계를 벗어나 80억 명의 삶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많은 것들이 시작되거나 끝났다.
만질 수도 없고 과학으로도 검증할 수 없는 원판은 인간의 정수리에서 50센티가량 떠올라 있으며, 정의를 상징하는 청색과 부덕을 상징하는 적색 영역으로 이분(二分)된다.
두 영역의 비율은 삶의 행적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화하는데, 강도와 같은 중범죄는 초범의 경우 평균적으로 5에서 15퍼센트 사이의 변동을 보이고 살인은 그보다 더 크다. 한편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천국행이 예정된 것도 아니다. 비록 경마가 합법일지라도 여윳돈을 경마장에서 날려버릴 바에는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편이 낫다는 데에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피치 못할 이유가 아니라면 자가용보다는 지하철로 이동하는 편이 훨씬 낫듯이 말이다.
달리 말하면, 보통 사람의 일상은 완벽한 정의와 거리가 멀다. 우리는 안락함과 멋을 위해 SUV를 선택하고, 부담스러운 가격이 아니기 때문에 일회용 칫솔을 한 번 쓴 다음 휙 던져버린다. 지구 반대편에서 수억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비싼 식당에 간다. 커피나 옷이 제3세계의 착취와 연관되어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도 구매 버튼을 누른다. 희토류 채굴에 반대하는 환경운동가들이 마피아에게 살해당했다는 뉴스를 읽은 후 전기차를 탄다.
독재국가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더욱 복잡해진다. 독재 체제는 위로부터의 탄압과 아래로부터의 자발성을 동시에 보이기 때문이다. 중국을 예로 들어보자. 14억 명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소수민족 박해를 지지하는 국수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가치관은 학습된다. 그리고 자연스레 학습된 가치관은 폭력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평범한 중국인은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완벽히 정당하다고 믿는다―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평범한 리버럴이었을 사람이중국산 공산품과 유기농 로컬 제품을 섞어 쓰면서 신장 위구르를 위해 기부했을 사람이 중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더 낮은 성적표를 받아드는 건 불공평한 일처럼 보인다. 범죄율이 아주 높고 마피아가 정부를 대체한 국가의 시민들에게도 비슷한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도둑질과 폭행이 악행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게 삶의 방식 중 하나인 곳에서 도덕률을 따르기로 결심하는 것은 치안 좋은 선진국에서의 결심과는 완전히 다른 무게를 지닐 것이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개개인이 지옥행을 피할 확률은 어느 나라에서든 평균적으로 65퍼센트 전후고, 주변인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정기적으로 기부하는 사람조차 70퍼센트를 넘기 어렵다. 한편 보험금 때문에 아내를 죽인 미국 사업가가 천국에 갈 확률은 3퍼센트였지만 일곱 건의 살인을 저지른 반군 소년이 천국에 갈 확률은 11퍼센트였다.
즉 수레바퀴는 환경과 동기를 참작하면서도 그걸 완전한 면죄부로 삼지 않으며, 부분적으로는 개인적인 실천 이상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선진국 시민에게는 구조적인 착취를 외면한 채 풍요를 만끽한 책임을, 독재국가 시민에게는 신념과 행위의 정당성을 묻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덕분에 수레바퀴의 출현은 진짜 바퀴의 발명만큼이나 세계를 바꾸어놓았다. 이제 사람들은 연봉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옥에 갈 확률을 낮추기 위해서 자기계발서를 읽고, 유망한 주식 종목 대신 도덕의 토대에 대한 이론들을 공부한다. 자본주의를 폐기해야 한다는 요구가, 변방에만 머무르던 이론들이 부상하고 있다. 인류에게는 이미 80억 명의 사람들을 먹이고 입힐 능력이 있다. 시세 방어를 위해 초과 생산된 곡식을 불태우고 새 티셔츠를 쓰레기통에 휙 버리는 일이 반복됐을 뿐이다. 선진국 국민은 우리의 것을 저들에게 나눠주겠다며 외치는 정치인에게 표를 던지며, EU 소속국은 난민 쿼터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기 위하여 협상장에 나선다. 베를린에서는 특별한 사유 없는 자동차 소유를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법안이 발의됐고, 글로벌 정유사는 순이익의 100퍼센트를 탈탄소 기술에 투자할 것을 약속했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아 보인다. 개개인에게는 지옥행을 피하려는 몸부림일지라도, 그 총합은 합당한 분배와 정의의 형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묘한 점은, 천국에 줄 선 사람들이 딱히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장난감 가격만큼의 돈으로 할 수 있는 기부와 생산과정에서의 환경 오염을 생각하는 삶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삶보다 즐거울 수는 없을 테니까.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