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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가난, 문학의 가난
어쭙잖게 두 번째 평론집을 묶어보려고 할 때였다. 제목을 붙여야겠는데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출간 자체가 부담인 책이라 편집부 쪽에 고민을 나누자고 할 형편도 안 되었다. 작품들에 기대어 문학에 대한 이런저런 질문과 고민을 토로해본 글들이었는데 들여다볼수록 어수선하고 염치없기만 한 터였다. 그렇다고 해서 어수선한 대로 글들의 바닥에 놓인 마음의 흐름이 전혀 없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싶었고, 그 희미한 흐름을 되새기며 떠올려본 단어가 ‘가난’이었다. 그러니 ‘문학의 가난’쯤이 내가 처음 생각해본 제목이었다.
문학의 가난이라니? 그렇지 않아도 냉소와 적의에 둘러싸인 한국문학의 현장 아닌가. 한국문학의 과실을 온당히 평가하는 가운데 적절하게 기운을 부추겨도 모자랄 형국에 ‘가난 운운’의 힘 빠지는 제목이라니. 나름의 뜻이야 없지 않겠으나 ‘가난’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걸림돌이었고 주변의 반응도 신통치 않았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놓고 서 있는 / 여름 산 같은 /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서정주 『무등을 보며』고 노래한 한 시인의 절창도 단순히 정신승리법 운운으로 희화화되고 있는 마당 아닌가. 서둘러 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대학 입학한 첫 학기였을 것이다. 아는 이도 별로 없고 해서 대학 생활을 어떻게 꾸려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할 때였다. 부산에 계신 부모님에게서 우편환이 오면 학교 우체국에 가서 돈을 찾는데 괴롭기 그지없었다. 어쨌든 기숙사비를 내고 책이라도 사보려면 당장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얼마 전 대학 성적표를 떼야 할 일이 있었는데 1학기 성적이 그나마 좋았다. 그 시절 얼마나 긴장하고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일까. 그때의 절박함을 달리 표현해본다면 마음의 가난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사복형사들이 학교 곳곳에 진주해 있던 시절이었다. 조용한 캠퍼스 어딘가에서 갑자기 핸드마이크의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구호가 들리면 곧장 사복들의 무참한 진압과 폭력이 이어졌고, 그렇게 끌려가는 학생들을 보면 세상이 온통 낯설고 견딜 수 없었다. 서울로 올라올 때 가져온 책들이 있었다. 삼중당문고와 동서그레이트북스의 세계문학 작품들.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토마스 만이 있었던 것 같다. 강의가 끝나면 도서관에 가서 그 책들을 읽었다. 책을 접는 게 싫어 읽은 페이지를 책 뒤의 백지에 숫자로 적으며 읽어나갔다. 달리 길이 보이지 않았다. 정기간행물실이나 개가열람실에 가면 문예지가 있었고 한국소설도 많았다. 밤늦게 도서관을 나오면 가로등의 흰 불빛만이 적요한 캠퍼스를 지키고 있었다. 한낮의 폭력적인 진압과 연행은 다음 날 신문 사회면 한구석에 두 줄 정도의 기사로 처리될 것이었다.
가끔 그 시절 도서관에서 나와 걷던 교정의 밤길이 생각난다. 온통 갈구하는 마음 같은 것. 거기 그 책들에 답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조금씩 채워지고, 형성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는 있었던 것 같다. 마음은 한없이 가난했지만 남루하지 않았다. 인간을 깊이 알고 싶었고 세상의 이치에 가닿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게 그때 읽었던 구절구절들은 종이 위에 꾹 눌러진 납활자처럼 마음에 각인되었던 것 같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물론 지금 나는 그 구절들의 행방을 모르고, 자취를 모른다. 언젠가부터 책은, 문학은 생활의 건조한 필요 안으로 들어와버렸고 막막하고 절박한 질문 같은 것은 사라져버렸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 내가 문학에 투사했던 것은 어떤 시대에 만들어진 ‘문학’이라는 관념이었을 테고, 그 관념의 실질은 약간의 인문적 교양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립다. 그렇게 밤을 새워 책을 읽고 부옇게 밝아오던 새벽을 맞던 시간이. 문학의 가난과 마음의 가난이 서로를 애타게 찾던 시간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마지막 대목이었던가. 우리가 이곳에서 아름답고 선량한 감정으로 한 시절을 보냈던 걸 잊지 말자고 했던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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