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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른 이유
50년 정도 소금에 절인 고등어처럼 살다 보니 도시생활에 신물이 났습니다. 그럴 때마다 처참한 기분으로 ‘어떻게 하면 이 진창을 벗어날까?’ 하고 고민했습니다. 이 도시가 몸에 맞는 분들도 있겠지만 많은 분들이 이른바 전원생활을 꿈꿉니다. 전원생활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그냥 근사하게 느껴지고 머릿속이 아련해지면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나이 50이 넘으면 대개 한번쯤은 귀촌에 관심을 기울이는 까닭입니다.
TV를 켜면 귀촌, 귀농자 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동차를 개조해 산과 들, 바다를 누비고 다닙니다. 또 어떤 이는 산중에 깊숙이 들어가 움막 같은 집을 짓고 ‘자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방송에 출연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왜 귀촌에 관심을 가지는 걸까요? 인간의 역사가 문명과 더불어 살아왔던 세월에 비해 그렇지 않았던 세월이 턱없이 길어서 반 문명에 대한 향수가, 또는 유전적 대물림이 생리적으로 깊게 남아 있는 걸까요?
그렇지만 대개는 떠나고 싶다는 마음뿐입니다. 상념을 실행에 옮기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도 있겠고, 자식 문제가 족쇄이기도 하고, “어림없어!” 하며 으름장을 놓는 배우자와의 의견 충돌 문제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귀촌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제까지 모은 돈으로 생활할 수 있을까?” “점점 늙어가고 병도 들 텐데 도시를 떠나면 적절한 양질의 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 이런 염려가 드는 건 당연합니다. 도시생활을 하다 보면 주변 지인과, TV에게서 꽤 친절한 협박을 지속적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넌 언젠가 빌어먹을 병이 생길 거야! 보험을 들어둬야 해!” “몸에 좋은 온갖 것들이 있으니 먹어 둬” “언젠가 자동차에 엉치뼈가 어스러질지 모르니 조심해!” 등의 협박 말입니다. 그래서 도시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 해도 이 모든 친절하고 사려 깊은 보호막으로부터 멀어질 거라는 두려움에 움찔합니다.
문화적 결핍도 염려합니다. 이런 경우는 그나마 좀 사치스러운 걱정이긴 하지만 진지합니다. 적어도 한 해에 몇 번은 연극도 보고, 이런저런 연주회에 서너 번 가기도 하며, 영화 관람, 전시회에도 다니곤 했는데 시골에서 생활하면 이런 문화 혜택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닌지 염려합니다. 또, 가까운 이웃이나 친지, 친구 들과의 멀어짐도 걱정입니다. 이밖에도 개인별 성향에 따라 다양한 걱정을 하겠지요.
또한 귀촌을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싫증이 나서 원래 생활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후회하지 않을지 걱정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경제적 손실도 생길 것이고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실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떠나온 곳의 친구에게 비웃음을 사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염려의 기저에는 오랜 도시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크게 깔려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두려움에서 자유롭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도시 탈출’의 고집스런 염원이 두려움을 압도했습니다. 저질러 결행한 저의 성정은 제 개인의 것이고, 도시 탈출을 결행하는 다른 이들 중에는 저와 같은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닐 테지요.
아무튼 저는 50살에 저질렀습니다. ‘저지른’ 이유는 지극히 현실적인 원인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거주지가 도시 중심에 있어 유흥가와 가까웠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잦은 회식, 손님 접대, 친목 도모 따위의 명분으로 온갖 주점, 노래방, 일식집, 고기 집 등을 출입했습니다. 처음엔 불편하고 힘들었고 나중엔 혐오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혐오감이 조금씩 쌓여서 길거리 주점의 간판과 현란한 네온사인, 원색의 간판이 마치 얼굴의 추한 부스럼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그런 생활을 면도날로 끈을 자르듯 깨끗이 잘라내고 싶었습니다. 칼 같이 퇴근해서 귀가해 취미 활동을 하거나 처자식과 더불어 안온한 저녁을 보내야겠다는 건 아니었습니다. 당시 우리의 알량한 남성 세계는 그런 낭만이 여유 있게 구가됐던 시절이 아니었으니까요.
또 하나의 이유는 시골생활에 대한 열망입니다. 저에게는 어릴 적 지냈던 외가에 대한 향수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여름이면 저는 경남 통영의 작은 농촌 마을에 있던 외가로 가서 방학을 보냈습니다. 담벼락 너머의 논에서 벼꽃이 피고 이삭이 맺힐 때쯤 뿜어져 나오는 독특한 냄새를 지금도 기억합니다. 벼가 다수확 품종으로 바뀐 탓에 요즘 논에서는 너무 희미해서 쉽게 맡을 수 없는 냄새입니다. 동네 꼬마들과 함께 논에서 벼메뚜기를 잡아오면 외숙모는 목덜미가 풀줄기에 꿰인 메뚜기들을 받아 저녁 짓던 아궁이의 불씨를 끌어내 구워주셨습니다. 그 고소한 냄새는 제겐 잊을 수 없는 향수입니다. 시골의 냄새, 메뚜기 구운 냄새와 소죽 냄새, 볏단 냄새는 제게 늘 그리움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오랜 직장 생활 중 지방 소도시로 출장을 갈 기회가 많았습니다. 한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골의 논과 밭, 들녘, 산지 등을 많이 돌아 다니는 출장이었습니다. 그때 시골 소읍을 구석구석 다니면서 노동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한여름 논에서 피를 뽑는 이들, 봄의 나른한 들판에서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는 이들, 밭에서 잡초를 제거하는 여성들, 6월의 땡볕에서 호미질하는 이들, 양파 자루를 트럭에 힘겹게 쌓는 이들……. 그들을 볼 때마다 묘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저들보다 가치 있는 일일까?” 하는 의문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습니다.
대기업에서 일하며 생산보다는 운영 또는 감시 쪽이었던 업무에 간혹 회의가 들어 피로했습니다. 제가 사무실에서 자판을 두드리거나, 무슨 조사를 하는 일이 밭에서 호미질을 하는 일에 비해 그리 가치 있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말하기를 머리를 써서 하는 일보다 손발을 써서 하는 일보다 손발을 써서 하는 일이 더 값지다고 했는데 그 말의 옳고 그름보다 그 말 자체가 자꾸만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래, 이제 머리로 하는 일에서 벗어나 손발로 하는 일을 해 보자. 땡볕에 밭에서 일하는 이들을 보며 느꼈던 왠지 모를 미안함에서 벗어나 보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런 제약과 방해, 그리고 소음 없이 마음껏 책을 읽고 싶은 소망도 한몫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과의 이별도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직장생활의 반복되는 업무가 지겨웠습니다. 동료와의 사적 모임이나 만남에서마저도 직장 내 이슈나 상사에 대한 평가, 뒷담화 같은 이야기만 반복되는 것이 싫었습니다. 행동과 대화의 반경이 언제나 직장 내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숨막혔습니다. 겨우 화제를 돌려 세상사를 이야기하다가도 얼마 못가 다시 사내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회사에서 일했으면 밖에 나와선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저 혼자인 것 같습니다. 언젠가 중간 간부가 됐을 때 회식 때 회사 이야기를 삼가도록 강요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뜻대로 잘 되지는 않았습니다.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세상의 한쪽 면만 보고 다른 세계를 모르고 지나치면 얼마나 억울할까 하는 막연한 초조함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세계와 더불어 새로운 생각, 새로운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스콧 니어링을 접한 까닭도 있습니다. 스콧 니어링과 그의 부인 헬렌 니어링은 생태주의자와 자연주의자 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미국인입니다. 제가 탐탁지 않게 여기는 미국인이라는 게 흠이지만 그들은 귀농인들의 바이블인 《조화로운 삶Living the Good Life》의 저자입니다.
스콧 니어링은 사회주의자로 미국 주류 사회에서 배척을 받고 교수직을 뺏긴 후 아내와 함께 산골로 들어가 자급자족의 삶을 꾸립니다. 굳건히 자기 세계를 확립하며 살다가 100세가 되던 해에 스스로 곡기를 끊고 생을 마감합니다. 저는 그의 삶의 방식에 매료됐습니다. 스콧 니어링은 산골에 뿌리를 내리면서 돌집을 짓고 돌담을 쌓았는데, 그처럼 돌집에 살지는 못해도 그의 농사법을 흉내는 내고 싶었습니다. 스콧 니어링은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굉장히 꼼꼼한 성격인데농사일이나 집 짓는 일, 연장 다루는 일 등에서 저 역시 그런 일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와 비슷한 형태로 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아내도 시골행에 그리 부정적이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가보지 뭐.”
덕분에 도시 탈출, 시골행에 대한 부부 간 갈등은 없었습니다. 활동적이고 호기심 많은 저와 한자리에 오랫동안 머물러도 별 동요가 없는 아내는 기질적으로 많이 다르지만 귀촌에 대한 의견은 두 사람 모두 긍정적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부분에서 제동이 걸리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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