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우리는 중산층 가족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륜동 올림픽아파트 115동(46평)
처음엔 모든 게 평화로웠다
아빠가 성실하게 일하며 가장의 역할을 충실하게 행하던 때가 있었다. 언제나 단정한 정장 차림의 아빠는 반질거리는 구두를 신고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긴 채 집을 나섰다. 아빠는 자기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장님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호구 조사’가 시작되었다. 학기 초가 되면 재생지에 인쇄된 가정통신문이 배포되었다. ‘가정환경 조사서’라는 이름의 그 종이에는 부모의 학력과 직업을 적는 칸이 있었고, 집이 자가인지 전세인지 월세인지, 또 아파트인지 다세대 주택인지 빌라인지를 표시하는 칸이 빽빽하게 나뉘어 있었다. 나는 아빠의 직업 칸에는 ‘건축사업’, 엄마의 직업 칸에는 ‘가정주부’를 적었다. 우리 집은 자가 아파트, 텔레비전 한 대, 자동차 한 대, 가족 구성원은 세 명, 가훈은 ‘착하고 슬기롭고 아름답게’.
90년대는 ‘중산층’이라는 키워드가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88 서울올림픽 이후 살림 수준이 나아지면서 스스로 중산층이라 인식하는 시민의 비율이 60%에서 많게는 80%까지 되었다. 1991년 KBS 수목 드라마 〈우리는 중산층〉과 MBC 아침 드라마 〈말로만 중산층〉이 인기를 끌었다. 너도나도 ‘중산층’인 시대였다. 서울역사박물관에는 80년대 중산층 아파트가 재현되어 있을 정도이니 그만큼 ‘중산층’이라는 개념은 경제적 지표를 넘어선 하나의 시대적 표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가족은 ‘중산층’이었다. 엄마는 그럭저럭 건축사업을 하며 자주 이사를 다니다가 80년대 중반에 둔촌주공아파트에 입주해 정착한 뒤로 우리 가족도 ‘중산층’이라고 생각했다. 1980년 입주를 시작한 둔촌주공아파트는 1976년 완공된 잠실주공아파트를 제외하면 강동구와 송파구 일대에서는 가장 최신식의 대규모 아파트단지였다. 몇 해 동안 둔촌주공아파트에 살던 엄마는 단지에서 길 건너에 있는 올림픽선수기자촌아파트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이곳은 서울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와 기자의 숙박시설로 이용될 아파트단지였다. 그래서 집 구조가 외국식으로 복층인 동이 있었고, 강북에서 이주한 명문 고등학교가 단지 안에 위치해 있어 세간의 큰 화제였다. 영동 개발이 추진되며 구도심 사대문 안에 위치해 있던 명문 고등학교들이 강남으로 대거 이전되었다. 송파에도 명문 학교들이 들어섰다. 송파는 대치동 학원가로 아이를 통원시키기도 가까워서 강남에 입성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그리고 올림픽공원이 있어 녹지가 풍부하고 살기 편했다.
엄마는 분양 추첨에서 떨어졌지만 몇 배의 ‘피’토지나 건물 따위를 나누어 판매할 때, 판매 금액 이외에 지급해야 하는 추가 금액을 가리키는 부동산 은어를 주고 아파트 입주권을 손에 넣었다. 올림픽 다음 해인 1989년 1월 입주가 시작되었고 부모님도 입주민의 일원으로 30평대 새 아파트에 입주했다. 그때 이사를 들어간 사람들은 ‘입주 멤버’로 자기들만의 자부심이 있었다.
이 일대는 이름이 온통 올림픽과 관련 있었다. 동 이름은 올림픽의 상징인 ‘오륜’이 들어간 오륜동이었고, 아파트 이름은 올림픽선수기자촌아파트, 집 앞에 있는 공원은 올림픽공원, 유치원은 올림픽유치원, 초등학교는 오륜초등학교, 중학교는 오륜중학교였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은 올림픽공원역, 단지 내 상가는 올림픽프라자상가, 오륜이 아니라면 세륜초등학교가 있고, 아파트단지 안에서는 호돌이를 심심치 않게 마주칠 수 있었다.
그해 여름, 내가 태어났다. 엄마에게는 ‘집안일만 신경 쓰며 육아에만 전념’하라는 미션이 주어졌다. 신사임당 같은 어머니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엄마는 하루의 모든 시간을 나를 키우는 데 썼다. 엄마는 부지런히 이른 아침 일어나 아빠의 아침 식사를 따끈따끈하게 차려주었고 현관 앞까지 배웅을 했다. 아빠는 든든한 가장이었고, 엄마는 현명한 아내였다. 엄마는 집에서 다양한 식물을 키우고, 당시 유행하던 커다란 수족관을 들여 물고기도 키웠다. 하루가 참 바빴다. 화분에 물을 주고, 물고기 밥도 주고, 딸내미도 키워야 하고, 아빠의 안위도 챙겨야 했다. 언제부턴가 한계가 왔는지 엄마는 파출부를 부르기로 했다. 집안일과 육아를 혼자 감당하는 것은 무리였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파출부 아줌마가 왔다. 드디어 딸과 외출할 여유 시간이 생겼다. 엄마는 유모차를 끌고 현관물을 나섰다.
인터넷이 없었던 시절, 문화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신문 광고와 텔레비전 광고를 꼼꼼히 챙겨봐야 했다. 엄마는 하나도 지나치지 않고 스크랩을 하며 어린이 연극, 신작 영화, 박물관 전시 등 다양한 행사 일정을 챙겼다. 엄마는 영어나 한자 공부를 하는 것보다는 여러 가지 문화를 경험하고 즐길 줄 아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는 나를 좀 더 잘 데리고 다닐 기동력을 갖추기 위해 아빠 몰래 운전면허 학원을 등록하기도 했는데, 이 계획은 나의 고자질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아빠는 여자가 집안일이나 잘하면 되지 운전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탐탁지 않아했다. 대신 모범택시를 타고 다니라며 생활비를 넉넉하게 챙겨주었다. 공무원 월급이 120만 원이던 시절, 아빠는 엄마에게 500~600만 원의 생활비를 매달 넣어주었다. 우리는 주로 가까운 거리를 이동할 때는 택시를 탔고, 시내에 나갈 때는 2호선 잠실역까지 가서 지하철을 탔다. 아빠가 쉬는 날에는 직접 차를 태워주었다.
엄마는 나를 유모차에 태우고 외출을 할 때마다 필름 세통과 캐논 AE-1 카메라를 챙겼다. 내가 태어난 직후 국어 교사인 이모부에게서 산 카메라였다. 늦둥이 외동딸이었던 덕에 나는 태어나자마자 팬이 생겼고, 일찌감치 엄마의 ‘최애캐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이자 ‘덕질좋아하는 것을 파고드는 일’ 대상이 되었다. 특히 내 사진을 찍는 것이 엄마의 제1취미였다. 엄마는 이모부에게 카메라를 받으면서 매년 한 권씩 앨범을 만들어 딸이 성인이 되었을 때 스무 권의 앨범을 선물해주기로 결심했다. 카메라를 챙겨 나간 날이면 반드시 필름 한 통은 채우고 귀가했다. 그렇게 인화한 사진 중 고르고 골라 앨범에 들어갈 최종본을 선별했다. 카메라를 못 챙겼으면 일회용 카메라라도 급히 사서 그날을 기록해야 직성이 풀렸다.
엄마의 ‘덕심덕질하는 마음’은 스틸 사진으로 만족되지 않았다. 아파트단지 내에 ‘홈 비디오’ 열풍이 불면서 엄마는 동네 수입가전 가게로 가 최신형 소니 6mm 캠코더를 구입했다. 필름과 비교했을 때 6mm 테이프 가격이 만만치 않았으므로 꼭 필요한 순간에만 조심스럽게 녹화 버튼을 눌렀다. 엄마는 1년에 테이프 한 개씩을 기록해서 그 영상도 함께 딸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테이프 하나에 약 두 시간 분량의 영상을 녹화할 수 있었다. 내 생일은 엄마에게 가장 큰 연중행사였다. 엄마는 ‘최애캐’를 위한 행사를 기획하고, 음식을 직접 준비하고, 손님을 대접하고, 사진을 찍고, 영상도 찍어야 했다. 행사 진행도 직접 했다. 손이 모자란 엄마는 때론 캠코더를 텔레비전 위에 고이 올려놓고 그 모든 과정을 녹화했다. 영상 안에는 캐논 카메라를 들고 분주히 돌아다니며 사진 포즈를 연출하는 엄마의 모습이 고스란히 찍혀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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