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이동권, 그리고 제베의 탄생
1999년 6월, 노들야학에 다니기 시작한 지 1년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작은 자의 집’에서 만난 친구의 공연을 보러 혜화역에 있는 대학로에 갔다. 지도 앱도 없던 때라 약도만 보고 찾아가야 했는데, 내가 좀 길치여서 결국 공연장을 찾지 못했다. 아쉽지만 그냥 돌아가야지 하고 다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리프트에서 떨어지다
승강장으로 가려면 계단 경사면을 따라 설치된 휠체어 리프트를 이용해야 했다. 리프트에는 안전 바도 설치되지 않아서 탈 때마다 혹시나 추락할까 봐 무서웠다. 중간쯤 지날 때 각도가 달라져 리프트가 덜컹거리면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리프트가 움직일 때 나는 효과음 때문에 사람들이 볼 때면 꼭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당시 나는 전동 스쿠터를 타고 다녔는데 크기가 커서 리프트 발판 한가운데에 딱 맞춰 정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휠체어가 밖으로 튀어 나가지 않도록 발판 끝이 난간처럼 자동으로 접혀 올라와 보통 거기에 맞춰 스쿠터를 멈추곤 했다. 그날은 발판이 안 올라온 건지, 아니면 올라왔는데 고장이 나서 스쿠터를 못 멈춘 건지 모르겠지만, 스쿠터가 발판 끝에 닿는 느낌이 없다가 리프트 밖으로 고꾸라졌다. 너무 갑작스러워 떨어지는지도 몰랐다. 계단이 갑자기 눈앞을 덮쳐 와 이마를 아주 세게 들이받는 듯했다. 이마가 엄청 뜨거워지는 느낌이었고, 머리가 계단으로 그대로 떨어지는 바람에 목이 확 꺾이는 것 같았다.
‘내 인생은 여기까지구나!’
그런 생각도 잠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어! 나 안 죽었네?’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동생과 야학 교사들이 병실에 와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다. 오래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선지 배가 고파 밥부터 먹었다. 전동 스쿠터와 함께 리프트에서 계단 아래로 추락했거니와 머리부터 떨어져 워낙 세게 부딪혔기에 죽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사고였다. 그런데 전치 3주의 타박상만 입었다. 당시에는 그냥 ‘살았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제2의 삶이 그때 시작된 듯하다.
피해 당사자인 나는 정작 손을 놓고 있었는데, 노들야학에서는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며 대책위원회를 꾸려 지하철공사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싸움을 대신해 줬다. 공사는 리프트에 제대로 탑승하지 못한 나에게 책임이 있다고 했다. 1년이 넘는 법정 공방 끝에 법원은 사고 배상금으로 지하철공사가 내게 500만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파손된 스쿠터 값이나 병원비 등을 감안하면 턱없이 부족했지만, 싸움의 승자는 우리였다. 그리고 그 결과 혜화역에는 전국에서 최초로 양방향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다. 혜화역 2번 출구를 나와 바닥을 보면 이곳이 이동권 투쟁의 현장임을 알리는 동판이 있다. 궁금하다면 혜화역에 와서 꼭 보고 갔으면 좋겠다.
오이도역 참사와 이동권연대의 시작
이 싸움을 지켜보며 나의 목소리를,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그 전에도 노들야학에 다니면서 집회에 여러 번 참여했지만 딱히 적극적인 참여자는 아니었다. 리프트 추락 사건을 계기로 나는 ‘장판’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2001년 1월,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에서 추락 참사가 발생했다. 70대 노부부가 휠체어 리프트를 이용했는데 와이어가 끊어지면서 추락해 부인은 사망하고 남편은 중상을 입은 사건이었다. 안전 점검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운행하다 결국 목숨까지 빼앗은 것이다.
그날도 나는 야학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박경석 대표가 갑자기 들어와 사고 소식을 전해 주었다.
“예전에 규식이도 떨어진 일이 있었는데, 이런 일이 자꾸 반복되고 있어. 이번엔 제대로 사과를 받아 내고 대책 마련을 요구하자.”
박경석의 제안에 우리는 모두 좋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오이도역 사건을 계기로 참사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정부의 책임 있는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이하 이동권연대를 만들어 본격적인 투쟁을 시작했다.
지하철공사는 참사에 대한 책임 있는 답변과 사과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논의 끝에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막는 시위를 하기로 했다. 인천 방면 승강장에 모여 선로로 내려가기로 했는데, 길을 잘 몰랐던 나는 반대 방면으로 가버렸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되돌아가기에는 시간이 빠듯해 비장애인 활동가 하나가 선로를 가로질러 건너와 나를 안고 데려갔다. 덕분에 늦지 않게 시위대에 합류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장애인들이 지하철 선로를 점거한 최초의 농성이 시작되었다.
지하철 선로에 몸을 묶다
장애인 50명, 비장애인 30명 정도가 모여 지하철 선로를 40분가량 막았다. 우리는 끌려 나가지 않으려고 목에 쇠사슬을 감고 지하철 선로에 몸을 묶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장애인들이 지하철 선로에 있으니 놀라워했고, 경찰들도 우리를 어떻게 끌어 올려야 하나 고민이 많아 보였다. 그때 전역을 출발한 기차가 들어왔다. 빵 하고 경적 소리가 크기 들리더니 불빛이 점점 가까워졌다.
‘혹시 지하철이 우릴 못 보고 쌩 지나가 버리면 어떡하지?’
마구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담배까지 피웠다. 선로에 묶은 쇠사슬을 통해 이따금 전기가 흐르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다 한번은 전기가 세게 통했는지 그만 정신을 잃었다. 나중에 영상을 보고서야 내가 들것에 실려 선로 밖으로 나왔다는 걸 알았다. 다행히 오래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점거 농성이 끝나고 승강장에서 마무리 집회를 한 뒤 집에 가려고 역을 나서는데, 어딘가에서 전경들이 우르르 나오더니 엘리베이터 입구를 둘러싸며 막아섰다. 조금 뒤 경찰차가 여러 대 들어오자 전경들은 우리를 연행하며 한 명 한 명 휠체어째 들어 전경차에 억지로 밀어 넣었다. 버스 한 대에 많아야 휠체어 두 대, 스쿠터 한 대가 간신히 실렸다. 그러자 경찰은 트럭을 추가로 더 불러서 휠체어는 트럭에 싣고, 사람은 전경차에 태워 가까운 경찰서로 잡아갔다.
나는 몇몇 활동가와 함께 남대문경찰서로 잡혀갔다. 경찰 조사를 받는 게 처음이었는데 경찰도 장애인을 조사하는 게 처음인지 난감해했다. 그 와중에 우리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기 위해 휠체어를 가져다주지 않으면 조사를 받지 않겠다고 버텼다. 휠체어를 실은 트럭이 경찰서들을 차례대로 돌며 휠체어를 내리느라 거의 새벽 4, 5시가 돼서야 휠체어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경찰 조사를 받는 게 처음이라서 나는 물어보는 대로 정직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경찰은 언어장애가 있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해 내가 ‘오’라고 하면 ‘어’라고 쓰고, ‘어’라고 쓰면 ‘오’라고 썼다. 그냥 내가 소리 내는 대로 다 옮겨 쓰려고 했지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는지 엉망진창이었다. 어떻게 집회에 참여하게 되었냐는 질문에 있는 그대로 답했는데, 경찰이 받아쓴 걸 나중에 보니 완전 소설을 써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무슨 제대로 된 조사인가 싶어 웃기기도 하지만, 나를 조사했던 경찰관도 자기가 지금 뭐 하는 건가 싶어 웃겼을 것 같다.
지하철 선로 점거 농성으로 우리의 요구가 곧장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장애인에게 이동권이 얼마나 절박한지를 조금은 알릴 수 있었다. 장애인이 목숨을 걸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이 싸움 이후 장애인 이동권 투쟁은 더욱 확대되었다.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
지하철 선로 점거 이후 채 한 달이 안 된 때였다. 우리는 저상버스 도입을 요구하기 위해 매달 한 번씩 버스를 타는 직접행동에 나섰다. 일명 ‘버스를 타자!’였다.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지하철역도 거의 없었거니와, 버스 역시 중요한 대중교통 수단인 만큼 저상버스 도입을 함께 요구하기로 했다.
처음 탄 버스는 혜화로터리를 지나는 8-1번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가서 차례대로 서있다가, 버스가 도착하면 기사에게 탑승을 요구했다. 당연히 탑승은 거부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버스를 막으면서 외쳤다.
“우리도 태워 달라. 저상버스를 만들어 달라.”
수동 휠체어를 이용하는 몇 사람은 비장애인 활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버스에 올라탔지만, 대부분의 장애인 활동가들은 전동 휠체어나 전동 스쿠터를 이용했기에 탈 수가 없었다. 장애인 활동가들은 휠체어나 스쿠터로 버스를 빙 둘러싸서 버스가 움직이지 못하게 했고, 몇몇 비장애인 활동가들은 버스 위로 올라가 “장애인도 버스를 타고 싶다.”라는 현수막을 펼쳤다. 거의 한 시간 반을 막았는데 이번에도 결론은 같았다. 모두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매달 한 번씩, 4년을 꾸준히 직접행동을 전개했다.
이때부터 이동권연대 안에서 내 존재감이 커졌다. 집회에 나가면 맨 앞에서 싸움을 이끌었다. 눈치가 빨라 경찰들 사이를 요리조리 파고들어 막힌 길을 열어 주다 보니 사람들도 나를 점점 따랐던 것 같다. 처음에는 싸움 현장에서 전략이고 전술이고 아무것도 모른 채 무작정 들이박으며 싸웠다. 경찰들과 소통하거나 협상하는 일은 박경석이 알아서 하고, 나는 행동대장 격으로 싸움에만 몰두했다. 내가 맨날 싸우고 인상만 쓰고 있어선지 경찰뿐만 아니라 동료 활동가도 나를 무서워했다. 나중에 들어 보니 ‘저 사람은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집회나 직접행동을 대하는 노하우가 생기니 여유도 생겼다. 그 후로 사람들도 내게 많이 말을 건넨다. 물론 여전히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2003년이었나, 2004년이었나. 광화문사거리 점거 농성을 시도한 적이 있다. 세종문화회관 앞에 농성 천막을 설치하려 했는데, 경찰과 공무원이 한데 섞여 가로막는 바람에 무지하게 싸웠다. 경찰이 해산하지 않으면 잡아가겠다고 경고 방송을 3회까지 했는데, 3차 경고가 나올 때쯤 박경석이 다가오더니 “너는 잠깐 빠져서 숨어 있어.”라고 했다. 박경석의 말이기에, 나는 이유를 되묻지 않고 빠져나왔다.
혼자 밥 먹고 커피까지 마신 뒤 몇 시간 지나 돌아와보니 사람들은 이미 잡혀가고 아무도 없었다. 천막도 뺏긴 뒤였다. 잡혀가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어서 농성하려면 자리에서 둘이 휠체어에 앉은 채로 밤을 꼬박 새웠다. 정말 추운 3월이었다. 손난로도 없는데 왜 하필 이 추운 날에 농성을 시작했는지 수백 번 생각했다. ‘차라리 잡혀가면 마음이라도 편하지.’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정말 정말 힘들었다.
이튿날 아침 종로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와서 나를 보고는 “정말 대단하시네요.” 하며 아리송한 웃음을 짓고 갔다. 천막은 없어도 우리 둘의 밤샘 사수를 시작으로 사람들이 계속 찾아오면서 매일매일 농성이 이어졌다. 다른 장애인 활동가들도 합류했고, 비장애인 활동가들도 힘을 보탰다. 3월 말에 시작된 농성이 5월 1일까지 이어졌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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