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무슨 책 쓰고 계세요?”
책을 쓰는 지난 1년간 매일 들었던 질문이다. 어쩌면 대화 상대는 살갑게 안부를 묻기 위해 건넨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불행하게도 매번 들을 때마다 어김없이 심각해지고 말았다.
“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에 관한 책을 써요”라고 짧게 대답하면 끝날 문제였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분명 이 책은 전장연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단체를 설명하기 위한 목적의 글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전장연은 어떤 조직인가, 그곳에서는 몇 명이 일하며 의사결정의 구조는 어떻게 되는가를 기술하는 것은 이 책의 집필 의도가 아니다.
나는 오랜 시간 개인적 성공을 바라왔던 평범한 대한민국 장애청년이었다. 먼 훗날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착한 장애인이 될 것을 다짐하며 성공가도를 착실히 따랐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고, 구글코리아에서 인턴십을 마쳤던 일련의 경력은 우수한 일등시민이 되기 위한 노력의 흔적이다. 그러나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될 무렵 우연찮게 활동가가 되어 장애운동 현장을 누비게 되었고, 머잖아 ‘인식론적 위기’를 마주하고 말았다. 오랜 시간 장애를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던 내가, 극복을 성공의 요건으로 여기던 내가, 성공을 이기심의 결과로 여기던 내가, 이기심을 생존의 요소로 여기던 내가, 생존을 경쟁의 합리적 근거로 여기던 내가, 장애운동을 계기로 오랫동안 나를 지배하던 신념을 회의적으로 돌이켜보게 되었고, 타인의 고통에 연대하는 삶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나를 이토록 다른 차원으로 이끈 순간의 말들을 잊고 싶지 않아 이 책을 쓰게 되었다. 나를 ‘아차’ 하게끔 한 연결과 연대의 풍경을 꼼꼼히 새겨두었다.
장애운동 소식이 언론에서 종종 다루어지는 요즘, 전보다 많은 시민들이 장애인의 인권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아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민들이 장애운동을 ‘지하철 타기’로만 이해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때도 있다. 비록 언론에서 잘 비추지 않지만 장애운동은 사회적 불평등에 저항하며 모든 차별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교통 약자의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행동뿐 아니라 팬데믹 시기 장애인 거주시설의 집단 감염 사태에 대응하고, 사회복지의 사각지대를 메우며, 산업재해로 스러진 장애인 노동자의 마지막을 추모하고, 희귀난치질환을 가진 장애인의 치료제를 구하는 등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없고 약한 사람들의 최저선이 보장되도록 최전선에 서 있다. 그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함으로써 장애시민들이 지키는 민주주의 최전선의 풍경을 담아내고자 했다.
이 책은 ‘탐색-직면-이해-연결’의 순서로 흘러간다. 이 네 단계의 구성은 종로3가에서 오랫동안 바를 운영해온 활동가 C와의 대화로부터 비롯되었다. 당시 술에 취한 나머지 그날의 모든 대화 내용이 선명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는 성소수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커밍아웃할 때 이런 숙고의 단계를 거친다고 말해주었다. 각 단계가 의미하는 맥락을 세세히 떠올리기는 어렵지만, 커다란 흐름만큼은 어쩐지 강렬하게 가슴에 남아 이 책의 순서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활용하게 되었다. 나의 독특한 몸과 이질적인 사회적 경험을 말하는 이 책이 내게는 일종의 커밍아웃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제1부 ‘탐색의 순간’에는 장애운동에 입문하게 된 배경과 첫 실무를 맡아 느꼈던 단상을 담았다. 현장 연구 과정에서 만난 장애인의 설득에 넘어가 졸지에 장애운동판에서 한솥밥을 먹게 되고, 첫 실무로 맡은 청도대남병원 정신장애인 코로나19 집단감염 사태 대응에서 느꼈던 충격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2부 ‘직면의 순간’에는 활동 초기 장애운동 현장에서 맞닥뜨렸던 낯선 문화와 어려움에 대해 썼다. 운동 현장에서 외치는 ‘민중’ ‘해방’ ‘투쟁’ 등 낯선 단어에 대한 호기심과 거부감에 대한 고민, 성공가도로부터 이탈하여 난데없이 ‘아스팔트’로 향하겠다는 결심을 부모님과 은사님께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 돈이 없어 수감을 택한 나쁜 장애인들이 남긴 최후의 변론을 이야기한다.
제3부 ‘이해의 순간’에는 활동 과정에서 만난 동료와 주변인의 고통에 통감하게 된 장면을 담았다. 희귀난치병으로 고통 받는 장애인 동료, 언어장애인과의 대화를 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사자와 직접 소통하게 하는 비장애인 동료, 부당한 산업재해 참사 속 스러져간 청년 노동자와 유족, 장애운동의 불법성에 대해 물어보는 라디오 진행자와의 대담 경험을 이야기한다.
제4부 ‘연결의 순간’에는 장애운동을 계기로 생각하게 된 몇가지 단상을 담았다. ‘어떻게 질 것인지’를 이기는 법 이상으로 중요하게 고민해야 될 때가 있다는 것, 사회운동과 예술활동은 다른 듯 같은 모습을 띄고 있다는 것,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말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 떠나기 전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 나누었던 무언의 교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각부 앞에는 ‘데모는 왜 하는가’라는 내용의 짧은 메모가 수록되어 있다. 지난 이 년간 대체 왜 데모를 하느냐고 묻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정치학 및 행정학 이론을 통해 풀어내고자 했다.
만일 이 책을 읽는 독자가 주변 지인에게 책에 대해 설명하는 일이 생긴다면, ‘500일간의 전장연 활동 일기’라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비록 이해를 돕기 위해 딱딱한 설명을 덧붙였지만 나는 이 책이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생생한 일기로 소개되고 기억되길 바란다.
장애운동이 어려움을 마주한 지금. 저마다의 편견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이 책을 두 손 가득 펼쳐 잠깐이라도 읽어보리라 마음먹은 당신께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하며.
2023년 여름
변재원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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