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새로운 정치언어의 탄생
2004년 3월 20일 토요일 밤 10시, 여의도 KBS 본관 〈심야토론〉 출연자 대기실에 여야 5개 정당의 ‘싸움꾼’ 의원들이 속속 도착했다. 11시로 예정된 생방송이 20분 늦춰졌다. 전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촛불집회 보도로 9시 뉴스가 길어져서 생긴 일이었다. 그날 오후 6시, 광화문광장에는 30여만 명이 운집했고, 부산·대구·광주·대전 등 전국 40여 개 도시와 미국·캐나다·호주 등 해외에서도 수십만 명이 촛불을 밝혔다.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되었고,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시민들이 거기로 뛰쳐나왔다. 인터넷 생중계로 이날 촛불집회 현장을 지켜본 사람들도 40만 명이 넘었다. 〈심야토론〉이 시작될 때까지 광화문 심야집회는 끝나지 않았다.
탄핵 정국 이후 시사 토론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두 배 이상 뛰었다. 출연자 대기실을 찾아온 담당 PD는 최근 시청률이 10%대를 돌파했다며 매우 경이로운 기록이라고 했다. 담당 PD는 KBS 〈심야토론〉 시청률이 경쟁 프로그램인 MBC 〈100분토론〉 시청률을 앞섰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출연자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오늘 토론에 단단히 신경 쓰라는 언질이었다. 거리에서 촛불을 든 사람들과 그 장면을 인터넷으로 본 사람을 합친 수보다 갑절 이상 많은 사람이 곧 TV 앞에서 토론을 지켜볼 참이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시청률 10%면 300만 명 정도가 TV를 본다는 것을 의미했다. 제17대 총선은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원래 이날 민주노동당의 토론자는 노회찬이 아니었다. 전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각 당은 기존의 출연 예정자들을 교체하고 전투력이 강한 토론 선수들을 링 위에 올렸다. 민주노동당은 오후 5시에 이 사실을 알고서 긴급회의를 열고 노회찬을 교체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시청자들의 관심은 탄핵을 주도한 139석의 한나라당과 115석에서 의원들의 대거 탈당으로 59석이 된 새천년민주당 대 새천년민주당 탈당파가 만든 47석의 신생 여당인 열린우리당 간의 격돌에 집중되었다.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직후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천정부지로 수직 상승해 50~60%에 이르렀고, 다른 두 당은 급락했다. 국민 10명 중 8명은 민주노동당을 모르거나 이름 정도만 알고 있을 때였고, 그때까지 노회찬은 일반 국민에게 ‘듣보잡’ 정치인일 뿐이었다.
밤 11시 20분, ‘온에어’ 사인에 빨간불이 켜지고 토론이 시작되었다. 프로그램 제목 로고와 “급변하는 민심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타이틀이 큼직하게 화면을 가득 채웠고, 광화문에서 서울시청까지 도로를 메운 촛불과 탄핵소추안이 통과되던 날 국회의 아수라장 장면을 교차 편집한 영상이 빠른 템포의 배경음악을 타고 화면을 덮었다. 예상대로 먼저 덩치 큰 3당의 탄핵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토론은 격렬한 듯이 보였지만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진부한 발언과 주장으로 지루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노회찬의 첫 발언 순서가 왔다. 방청객은, 시청자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노회찬의 160초 첫 발언에서 과거 어떤 정치토론에서도 들어본 적 없었던 새로운 정치언어를 만났다. 노회찬은 평범한 일상 언어로 기상천외한 은유를 구사하며 한순간에 토론 분위기를 주도했다.
열린우리당이 한 일이라곤 3월 12일 국회에서 끌려 나온 것밖에 없습니다. 열린우리당의 높은 지지율은 한 일에 대한 평가에 기초한 게 아니라 길 가다가 지갑 주운 것처럼 횡재한 건데, 이거 경찰서에 신고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민주당에서는 조건부 탄핵이라고 했는데, 사과만 했으면 탄핵은 안 했을 거라는 얘기로 들립니다. 그렇다면 사과하면 끝날 일을 가지고 대통령을 탄핵한 겁니까? 길거리 가다가 부딪히면 사과하면 될 일인데, 사과 안 했다고 흉기로 찌르는 불량 학생과 뭐가 다릅니까?
도무지 웃을 일이 없는 주제였는데, 방청객은 물론 토론자도 사회자도 노회찬이 발언할 때마다 웃음을 참지 못했다. 골리앗 정당들은 ‘양비론 짱돌’을 들고나온 원외 소수정당 소속 무명 정치인의 공격 앞에 마땅히 대응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들은 노회찬이 쏟아내는 낯선 듯 낯익은, 싱싱하고 팔딱팔딱 대는 활어 같은 일상 언어들을 어떻게 맞받아칠 수도, 따라잡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노회찬의 깊숙이 파고드는 공격은 희한하게도 비명보다 웃음을 짓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권력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은 농담”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이날 끝까지 웃지 않았던 단 한 사람은 노회찬이었다. 그는 양미간을 찌푸린, 약간 화난 듯한 특유의 표정으로 발언을 이어갔다. 이날 〈심야토론〉 전체 1시간 52분 중 노회찬의 발언 시간은 10분 남짓, 발언 횟수는 7회, 발언당 평균 시간은 2분 안팎이었다. 각 발언마다 유머와 정곡을 찌르는 한 발 이상의 실탄이 장전되어 있었다.
야당이 편파 방송 운운하는 게 이상하게 들립니다. 그날 탄핵한 걸 지금도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한나라당, 민주당은 탄핵 장면을 TV에서 하루 12시간 틀어주면 KBS에 고맙다고 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한국의 야당은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죽인 것이 아니라 다 자살했습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촛불집회의 배후가 있다고 하는데, 만약 있다면 그 배후는 바로 한나라당과 민주당입니다.
우리 국민의 제일 골칫거리가 그전에는 대통령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야당이 골칫거리입니다.
이번 총선에서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진보 야당을 세우는 것입니다. 한국 정치가 발전하려면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대결과 경쟁으로 이 나라가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발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퇴장하십시오.
노회찬의 신선한 언어는 단시간에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방송 내내 사람들은 노회찬의 순서를 기다렸고, 그의 입에서 나올 말들을 궁금해했다. 어느덧 마무리 발언 1분만 남았다.
우리 국민들도 50년 동안 썩은 판을 갈아야 합니다.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 먹으면 고기가 시커메집니다. 판을 갈 때가 이제 왔습니다.
언론이 “정치사에 남을 촌철살인 비유”라고 평가한 삼겹살 불판 발언은 그가 준비했던 마무리 발언의 핵심 메시지였다. 토론회가 끝나고 출연자들은 서로 악수를 한 뒤 헤어졌다.
네티즌들은 토론회가 끝난 심야와 새벽 사이에 노회찬의 다른 어록을 모조리 찾아내 이를 인터넷에 퍼뜨렸다. 그리고 언론은 그 내용을 기사로 썼다. 인터넷 포털 실시간 검색어 상위에 ‘노회찬’이 올라갔고, 적극적이고 발 빠른 사람들은 다음 날 ‘노회찬 국회보내기 운동본부’, ‘노회찬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인터넷 카페를 개설했다.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의 방문자 수도 급증했다. 사람들은 막혔던 가슴을 뻥 뚫어줘서 고맙다 했고, 4월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을 찍겠다고 했다. 민주노동당은 인터넷 당 게시판에 “〈심야토론〉을 보고 방문한 네티즌들께”라는 제목의 글을 따로 올려 이렇게 호소했다. “노회찬 총장은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로 나왔으며 최소한 15%는 득표해야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순번입니다. 노 총장의 원내 입성을 원한다면 민주노동당이 꼭 15% 이상 득표해야 합니다.” 그해 4월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들은 삼겹살 불판을 직접 들고 골목과 식당을 돌아다니면서 선거운동을 했고,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사람들은 노회찬의 발언이 가슴을 뻥 뚫어주는 사이다 같다고 입을 모았지만, 한편으로 그의 발언은 세상을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안경 같은 역할을 했다.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소설가 조세희가 노회찬의 언어를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언어,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하는 특별한 말”이라고 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노회찬의 언어는 민초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해주는 도수 맞는 안경 같은 것이었다.
이날 TV를 본 시청자들에게 노회찬은 갑자기 나타난 정치인이었지만, 그는 지난 20여 년 동안 ‘세상을 바꾸는 정치인’으로서 부단히 자신을 단련시켜 왔다. 사람들은 노회찬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했다. 이제 그를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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