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내 이름은 임창근, 나이는 서른두살, 전주가 고향이고, 한 살 아래인 안영미는 제주가 고향인데, 우리 둘은 결혼한 지 이년 반밖에 안 된 풋내기 부부이다. 오랜 우정의 결과로 맺어진 결혼이다. 우리는 같은 대학의 미술과 동기생으로 십년 이상 사귀었고 다큐멘터리 필름 제작의 동업자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다큐 제작만큼이나 소설 창작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재작년에 단편소설로 어느 문학지의 신인상을 받기도 했는데, 영미는 그런 나를 보고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간 집토끼도 산토끼도 다 놓치고 만다고 여간 불만스러워하지 않는다.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영미는 서울 지하철 망원역 근처에서 조그만 카페를 운영하고, 나는 구청이나 기업체의 홍보 동영상 제작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직은 습작이나 다름없는 이십분, 삼십분짜리 단편 다큐 제작에 머물러 있는 초짜 아티스트이지만 앞으로 일년 안에 반드시 아주 그럴듯한 장편 하나를 만들어낼 작정이다.
이 이인二人 프로덕션에서 감독은 내가 맡고, 영미는 작품 제작에 필요한 제반 프로그램을 꾸려 실행하는 피디 역할을 한다. 피디가 하는 일들 중에 가장 중요하고 힘든 것이 제작비를 끌어오고 완성된 작품을 세상에 알려 팔리도록 기획하는 것, 그러니까 주로 사람 만나는 일이다. 거친 파도가 뱃멀미를 일으키듯이 사람들 속에서 이리저리 오래 부딪히다보면 사람멀미가 일어나게 마련인데, 그러나 그녀는 별로 넌덜머리를 내는 일이 없다. 사람 만나는 일이 제 성미에 잘 맞는다고 말한다. 어려운 일일수록 해결되었을 때의 가슴 벅찬 성취감을 좋아한다고. 그녀는 곱상한 얼굴에 허리가 가늘어 좀 가냘파 보이는 인상이지만 의외로 강단이 세다. 성격도 단순명료한 것을 좋아하고 교활한 것은 극도로 싫어한다. 팔 힘이 세어서, 한번은 내가 무슨 일로 꼭지가 돌아 대들었다가 그녀의 강력한 팔 꺾기에 제압당한 적도 있다. 그녀는 집에서도 카페에서도 예사로 망치 들어 못을 박고, 드라이버로 전기 소켓을 벽에 박아넣곤 한다. 제주 출신이어서 그럴까? 그 고장 출신 여자들은 부지런하고 씩씩하고 때로는 사납기도 하다는 평판을 듣는다는데, 그렇다면 그녀가 바로 그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영미의 할아버지가 하는 말을 들으니 영미는 왕고모를 많이 닮았다고 한다. 그녀는 처녀 몸으로 말떼를 배에 싣고 육지부로 무역을 다닐 정도로 대찬 여자였다는데, 스물네살의 그녀가 그만 그 사건 통에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동생인 영미의 할아버지뿐이다. 노인은 그 사건으로 누나와 외삼촌을 한꺼번에 잃었고 그 자신도 죽음의 문턱 바로 앞까지 끌려갔었다고 한다. 그의 나이 열여섯살에 일어난 일이었다.
우리의 회심작 장편 다큐는 영미 할아버지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 참사를 형상화해내려 한다. 우리는 결혼 전부터 거의 삼년 동안 그 사건에 대한 자료와 증언집 들을 찾아 꼼꼼히 읽고 토론하면서 착실히 사전 준비를 했는데, 그 과정에서 느낀 것은 거기에 등장하는 증언자들이 하나같이 아직도 정신적으로 그 사건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었다. 이것저것 눈치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떠듬거린, 너무도 조심스러운 증언들이었다. 그 공포 속에 가라앉은 이야기를 건져올리는 것, 그것이 제일 먼저 할 일이었다. 우리는 현장에서 석달 동안 집중적으로 작업할 요량으로 제주로 갔다. 차를 몰고 서울에서 완도까지 가서 거기에서 차를 싣고 카페리를 탔다. 겨울철 그 고장의 칼바람은 매서웠다.
영미를 끝으로 자식 셋을 모두 결혼시켜 내보낸 나의 장인 장모는 호젓해진 집에서 노인을 모시고 조용히 생활하고 있었다. 장인은 노인의 외아들로 몇 달 전에 초등학교 교사직을 정년 퇴임한 뒤 쉬는 중이었다. 노인은 가족의 비참한 죽음의 기억과 자신이 당한 모진 고문의 후유증을 평생 앓고 있었다. 장인이 말하기를, 그분은 평생 그 사건에 영혼이 붙들린 채 남몰래 그것과 혈투를 벌여온 것 같다고 했다. 그 기억을 억눌러 묻어버리려고, 잊어버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는 말이다. 젊어서 고향 조천리를 떠나 거처를 공항 서쪽 외도리로 옮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 사건의 기억은 노인에게 불가항력의 절대적 존재였다. 그 사건에 대해 발설한다는 것은 반세기 넘도록 무서운 정치적 금기였고, 그것이 어느 정도 풀린 지금에도 노인은 닫힌 입을 좀처럼 열려고 하지 않았다. 마지못해 몇마디 말로 흘렸을 뿐 그 끔찍한 일을 더 알아서 뭐 하겠느냐고, 몰라야 좋다고 하면서 자식에게도 말하기를 꺼렸다. 막무가내였다.
한때 노인은 자신의 기억을 파괴하려고 폭음을 하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취하면 오히려 더 그 일이 생각난다고 아예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방에 틀어박힌 채 책을 읽거나 붓글씨를 쓰고, 집 뒤의 작은 공터를 임대해서 푸성귀를 가꾸었다. 거동이 조심스러웠고 말수가 적었다. 입을 열어도 부드럽고 조용히 말했다. 노인은 정적 속에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정적 속에 편안함이 있었다. 정적이 깨지면 간신히 지탱해온 자신이 붕괴되어버릴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장인은 언젠가 노인이 삼복더위에 혼자 채마밭에서 김을 매면서 그 정적 속에서 소리죽여 우는 것을 목격하고 크게 놀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잊으려고 애썼고 그래서 어느 정도는 잊고 사는 것처럼 보였는데, 작년 봄부터 야릇한 불안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늙어 쇠약해진 탓에 오래 억눌려 있던 기억이 이제 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불끈거리며 솟구쳐올랐다. 작은 호리병 속에 오래 갇혀 있던 요정 지니가 병마개를 따고 나와 거대한 재앙의 검은 구름으로 변신해 내려덮치는 형국이라고 할까. 지병인 심장병이 심해지고, 그때 그 가해자들이 꿈자리에 나타나는 악몽에 자주 시달렸다. 그때마다 노인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고, 깨어보면 땀으로 이불이 흠뻑 젖어 있었다. 전에는 악몽을 물리치려고 낫을 머리맡에 놓고 잤는데, 식구들이 끔찍하게 여기니 나중에는 낫 대신 큰 재단 가위를 갖다놓았다고 한다. 손잡이를 싸맨 헝겊에 손때가 짙게 밴 그 가위는 노인의 모친, 그러니까 영미의 증조할머니가 미싱 일로 생계를 꾸려갈 때 사용하던 물건이었다. 한밤 중 악몽 속에 나타나는 가해자들은 때때로 대낮에도 나타나서, 한번은 채마밭에서 일하다가 헛것을 보고 “검은 개들 온다! 검은 개들이 온다!”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미친 듯이 돌을 던지고 집안으로 뛰어든 적도 있었다. 최근에는 대인기피증까지 생겨서 바깥출입을 꺼렸고, 식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았다. 이따금씩 찾아와 술판을 벌이는 장인의 벗들은 얼핏 나타났다 사라지는 노인의 그림자나 옷자락을 보면 흠칫 놀라 대화를 멈추곤 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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