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평어는 ‘이름 호칭+반말’로 이루어진 새로운 한국말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평어 모임을 만들 수 있다. 그렇지만 모임 바깥에서도 평어를 사용하는 평어 관계를 만들 수도 있다. 나와 이제는 평어 관계인 이 책의 편집자는 내게 보내는 업무 메일을 이렇게 시작한다. “성민 안녕, 기현이야.” 만나서 인사를 할 때 평어 관계의 사람들은 고개를 아래로 숙이지 않고 종종 손을 옆으로 흔든다.
나는 이 새로운 말이 반말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반말은 아니라고 하고 싶다. 한국말에는 이제 반말과 존댓말이 있고 또한 평어가 있다고. 평어를 반말이 아닌 것으로 치고 싶은 것은 이름 호칭 때문만이 아니다. 우선 평어는 반말과는 달리 한쪽만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럼 너는 존댓말을 써, 나는 평어를 쓰겠어.”라는 말은 뜻을 이룰 수가 없다. 평어는 정의상 서로 사용하는 말이다.
평어와 반말의 또 다른 차이는 ‘너’의 사용에 있다. 평어에서는 ‘너’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아직 많다. 이 점에서 평어는 친구들끼리 사용하는 반말과는 다르다. 적어도 나의 경험으로는 그렇다. 예의 있는 반말이라고도 불리는 평어에서 ‘너’의 사용이 자유롭지 않은 까닭 중 하나는 반말 ‘너’ 사용의 부정적 경험일 것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다 아는 “너, 지금 ‘너’라고 했어?”의 사나운 너. 그렇지만 이것이 다일까? 너에게로 다가갈 수 없는 수줍음이 아직 조금 남은 것 아닐까? 언젠가 “너, 지금 ‘너’라고 했어?”의 반가운 너를 예감하고 있는. 아직 ‘너’ 사용을 삼가는 평어 사용자들의 직관은 ‘너’를 찾는 모험을 선물처럼 남겨 놓는다.
나는 인터넷으로 ‘평어’를 검색해 본다. 그리고 이제 평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모임들, 활동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발견한다. 디학구성원들 사이에서 ‘디학’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1년 과정의 디자인 대안 학교이다. 홈페이지 주소는 다음과 같다. http://designerschool.net/에서 열매를 맺은 평어의 씨앗이 민음사의 땅으로 날아갔을 때, 나는 평어의 현재가 두 개나 다섯 개의 새싹처럼 보였다. 그것이 다시 경희대학교의 강의실로 날아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다시 세 개나 여덟 개의 묘목처럼 보였다. 그리고 지금은 세는 것이 무의미해 보인다. 4월의 산책길에서 꽃이 핀 나무를 세는 것이 무의미하듯.
디학의 열매인 『예의 있는 반말』텍스트프레스, 2021은 평어 사용자들의 생생한 체험기를 싣고 있다. 체험기로 말하자면 《릿터》 34호와 39호에 실린 민음사 사람들의 글들도 정말 흥미로우며 때로는 마음을 움직인다. “평어는 우리 언어와 생각과 태도를 일상에서 여행지로 옮겨 주는 듯하다. 주변의 불필요한 정보들은 없애 버리고 진짜 중요하고 간절한 것들만 남게 한다.”
그리고 체험 자체로 말하자면 이렇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겨우 두 시간을 디학에 가서 학생들과 평어를 쓴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거의 매일 만나 평어를 쓴다. 그리고 《릿터》 팀은 벌써 1년이 넘는 시간을 매일 평어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빈약한 나의 평어 경험은 이제 별로 내세울 것이 없다.
‘평어’ 검색을 통해 나는 이혜민의 「요즘 것들의 사생활」이라는 유튜브 방송을 알게 되었다. 일상과 인생에 도움이 되면서도 그 자체로 흥미로운 그런 개성 있는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을 초대하여 인터뷰를 하는 이 방송은 올해부터 평어를 사용한다. 방송을 보면서 나는 이 최초의 본격 고품질 평어 콘텐츠 영상물을 신기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평어 목소리로 직접 들려주는 이런 유익하고 재미난 이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생생하거나 감동적인 평어 체험기도 아닌 나의 이 책은 평어 개발자의 글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무슨 매력이 있을까? 이 난처한 질문에 직면하여 나는 애니 딜러드가 작가들의 삶에 대해 했던 말을 나를 위한 가림막으로 부질없어도 사용하고 싶어진다. “작가의 삶이 감각의 박탈 상태에 이를 정도로 활기 없다는 것에 대해 놀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반말과 평어의 또 하나 남은 차이에서 내 책의 존재 이유를 조금이라도 찾아본다. 즉 반말과는 달리 평어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언어이다. 다시 말해서, 평어는 어느 날 갑자기 디학이라는 곳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말이다. 그렇기에 이 언어의 역사는 아주 짧고, 앞으로 개발되어야 하거나 될 수 있는 것이 사실상 무한하다. 그렇다고 하였을 때, 나의 이 책에는 평어 개발과 관련된, 또는 평어의 미래와 관련된, 몇 가지 아이디어들이 들어 있다. 예를 들어, 평어 번역이나 평어 문학에 대한 생각들, 은유와 농담에 대한 생각들, 호칭에 대한 생각들, 평어의 진화에서 매우 중요할 ‘너’의 문제에 대한 생각들……. 이러한 생각들은 충분히 전개되지 않은 아주 초보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나는 잡는 사람이 임자라는 뜻으로 그것들을 공중에 매달아 놓는다.
이것으로 내 책이 조금이나마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더라도 문체가 좀 신경이 쓰인다. 나의 문체는 오랫동안 철학으로 단련된 것이다. 예전에 나는 그것을 무모하게 사랑하였지만, 지금 그것은 미처 버리지 못한 거추장스러움으로 남았다. 몇 년 동안 나는 그 무게를 덜어내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글들에 여전히 그 무게는 많게든 적게든 남아 있다. 무게를 덜고자 술자리 건배와 우리 집 개 이름 등에 대한 아주 작은 글들을 새로 썼다. 거기서 나는 평어를 가지고서 잠깐 존재의 가벼움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 책의 이름 『말 놓을 용기』는 민음사 《릿터》 팀이 준 선물이다. 그 이름을 받았을 때 나는 ‘용기’라는 낱말이 있어서 좋았다. 모험은 용기에서 시작되니까. 그렇게 시작된 평어의 모험으로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아름다움이다. 그렇다는 것을 이 책과 우리들의 말 놓을 용기가 보여 줄 수 있다면 좋겠다. 평어에서 아름다움이 아니라 평등과 정의를 먼저 꿈꾸었던 사람들도 그렇다면 그러한 추구를 미룰 필요가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일레일 스캐리가 말하듯 아름다움은 “정의를 향해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기]” 때문이다.
평어와 또래 생각
나는 그런 순간들을 나눈 이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그들을 어떤 사람이라고 인식한 것에 앞서 우리가 사용한 말이 가능하게 한 마음이다. 우리가 한 말이 마음을 길어 왔다. ― 김화진
경험
「오징어 게임」은 아이들의 놀이를 어른들의 게임으로 전용하여 세계적으로 크게 성공한 드라마다. 이 작품으로 에미상을 수상한 감독 황동혁은 시상식 뒤에 진행된 간담회에서 정의로운 사회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한 기자에게서 질문을 받았다.
정의로운 사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물으신다면 사실 저는 그것을 대답할 만한 어떤 지적 능력이나 경험을 아직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고요. 정의롭지 않은 사회가 무엇인지는 아는 것 같아요.
그는 이렇게 답변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답을 가지고 있지 않고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답변을 마치었다. 창작가이지만 전형적인 비평가의 입장을 택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택하는 입장과 상관없이 우리의 상식은, 감독 본인에게도 있을 상식은, ‘정의로운 사회가 무엇인지를 모르고서 도대체 어떻게 정의롭지 않은 사회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지?’라고 물을 수 있다. 지적 능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정의로움의 경험이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빨간 장미를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빨강을 안다면 빨갛지 않은 장미를 알아볼 수 있다. 바로 그렇듯 황동혁도 정의로운 사회의 경험은 없어도 정의로움의 경험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는 어른들 세계의 정의롭지 않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 알다시피 그 세계로 아이들 놀이를 가지고 왔다. 아이들이 정의로움을 신나게 배우고 실천하는 바로 그 놀이를.
아이들은 또래들 가운데서 놀이를 하면서 삶과 죽음을 오가며 정의의 감각을 기른다. 아이들의 이 원초적 정의는 금을 밟으면 그 즉시 죽어야 하는 신속한 정의이고, 금을 밟지 않았다고 우기면 곧바로 모두의 눈이 목격자이자 심판관이 되는 강력한 정의이다. 아이들은 이 신속하고 강력한 정의를 바탕으로 정말로 재미난 놀이의 삶을 누린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황동혁도 어린 시절 또래 가운데서 바로 그러한 삶을 누렸을 것이다. 그에게는 분노와 결합되는 불의의 경험만이 아니라 즐거움과 결합되는 정의의 경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징어 게임」은 아주 어두운 드라마이지만, 금을 밟으면 그 즉시 총으로 쏘아 죽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남아 있을 어린 시절의 저 정의롭고 신나는, 그리고 아름다운 경험의 마음속 둥지를 건드렸기에 그만큼 높이 날아올랐을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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