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더 잘 반대하기 위하여
아홉 살 생일이 되기 전 나는 반대하는 능력을 잃었다. 그 일은 마치 침식작용처럼, 한순간이 아니라 서서히 단계적으로 일어났다. 처음에는 그렇게 되지 않으려 발버둥쳤다. 말이 목구멍에 턱 걸려 나오지 않기 일쑤였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어이 내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그때마다 너무 많은 애를 쓰고, 위험을 무릅쓰고, 스스로를 드러내야 했다. 나는 그런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 그래서 갈수록 말을 줄이고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고, 한동안 그렇게 지내다보니 이 안전한 은신처에 계속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3년 7월, 부모님과 나는 막 한국을 떠나 호주에 살러 온 참이었다. 처음엔 이민을 가기로 했다는―일과 배움, 인생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는―부모님의 말에 마냥 신이 났지만, 와룽가라는 시드니 북쪽 외곽의 조용한 부촌에 와서 보니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가 또렷하게 보였다. 우리는 다정한 친구와, 제대로 된 양념이 들어간 음식과, 우리말을 하는 4800만 명의 사람들을 뒤로한 채 떠나온 것이었다. 대체 뭘 얻겠다고? 내가 울워스호주에서 가장 큰 슈퍼마켓 체인.의 냉장식품 코너나 동네 공원의 정글짐 꼭대기에서 느낀 소외감에는 운명의 장난에 대한 짜증이 섞여 있었다.
부모님은 불만 가득한 나를 안쓰러워하면서 단호했다. 두 분은 아직 적응 단계라서 그렇다는 말만 반복했고, 그 말은 내게 창창한 미래를 위해서는 이 불편과 혼란을 감수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부모님은 서로 다른 면이 많았다. 아버지는 한반도 동쪽 끝 시골마을의 보수적인 대가족 출신인 반면, 어머니는 대도시 서울의 진취적인 집안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물질적인 안락함을 좇기보다 사람을 좋아했으며, 어머니는 세련된 걸 좋아하고 신념을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이민을 오고 나서부터는 두 분 모두 온전한 자립과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시드니에 도착하고 몇 주 동안 부모님은 나를 렌터카 뒷자리에 태우고 이런저런 볼일을 보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가구를 사고, 납세자 번호를 받고, 아파트 월세 계약을 하면서 우리는 점점 이 도시에 단단히 엮여들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이 도시에 일말의 정이 들지는 않았다. 내가 뭘 좀 도우면 좋겠느냐고 묻자 부모님은 내가 할 일은 딱 하나뿐이라고 대답했다. “어떻게든 학교에 잘 적응해야 한다. 알았지?”
와룽가 사람들이 초등학교 하면 떠올리는 곳은 단연 부시초등학교였다. 주변이 전부 야생동식물 보호구역이어서 교정은 언제나 호시탐탐 점령을 노리는 식물에 포위당한 모습이었다. 교실 창까지 덤불이 뻗어올라왔고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노천극장 계단에는 구석구석 사람 귀만한 버섯이 고개를 내밀었다. 여름이면 짙은 녹음이 우거졌다. 하지만 내가 3학년으로 입학해 처음 등교한 호주 8월의 쌀쌀한 월요일 아침에는 창백한 은빛 이파리들이 일렁였고 교정은 온통 그늘져 있었다.
3학년 H반 칠판 앞에 하늘색 옷을 차려입은 홀 선생님이 더없이 다정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선생님의 눈짓에 내가 교실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칠판에 완벽한 필기체로 ‘서보현, 사우스 코리아’라고 썼다. 이 생소한 단어들의 조합에 내 앞에 있는 서른 쌍의 눈이 일시에 동그래졌다.
그 주 내내 나는 우리 반 아이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운동장에서는 누군가를 비아냥대며 놀릴 때 가장 큰 웃음이 터져나왔다. 한 아이가 서양 문명의 쾌거 중 하나를 우쭐거리며 들먹이면―“식빵맛 끝내주지?”―나는 매번 내가 아는 한 줌의 영어로 응수했다. “아니, 밥이 더 맛있어!”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아이들은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그 팽팽한 긴장감을 은근히 즐기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내가 더는 새로운 인물이 아니게 되자 반 아이들과의 의견 차는 조금씩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운동장에서나 조별 과제를 하다가 의견 충돌이 생겼을 때, 내 생각을 속시원히 표현 못하고 더듬거리고 있자면 불쑥 화부터 치밀어올랐다. 서로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면 다른 의견은 한순간에 괴상한 의견으로 바뀌었고, 말 한마디, 몸짓 하나가 오해를 불러오고 곡해되어 일이 커지기 일쑤였다.
언어 장벽이 가장 힘겹게 다가왔던 때는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아이들의 대화에 참여해, 그 빠르고 다층적인 리듬과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들을 따라잡아야 할 때였다. 무슨 주장이라도 할라치면 어려움이 배가됐다. 나는 적절한 표현 방법을 찾지 못해 곧잘 헤맸고 그럴수록 더 중압감에 짓눌렸다. 어설픈 단어와 엉터리 문장을 되는대로 늘어놓는 식으로는 절대 제대로 된 주장을 펼칠 수 없었다.
공연한 심술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고픈 비열한 본능에 사로잡힌 몇몇은 자신의 유리한 입장을 십분 활용했다. 그애들은 얼굴을 한껏 찌푸리면서 얘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여기 알아듣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말에 당황한 아이들은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보려 우물쭈물하다 결국 내 편을 든답시고 “너무 신경쓰지 마”라는 말만 간신히 내뱉으며 그 자리를 떠나곤 했다. 몇 달 동안 나는 나름대로 대응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협상하고 때로는 감정에 호소하면서.
학기가 끝날 무렵인 2003년 11월 즈음이 되자 이제 더는 그런 식의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문제나 원칙도 그만한 대가를 치르고 뛰어들 만한 가치가 없어 보였다. 혹시라도 그런 다짐을 무시하고 논쟁을 시작하려 하면 내 다리와 배와 목구멍에서 신호가 왔다.
결국 나는 얼굴에 무심한 미소만 띤 채 잠자코 있는 법을 배웠다. 교실에서는 나의 무지를 재빨리 시인했고 운동장에서는 나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간 영어 실력이 꽤 늘었음에도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단어는 고작 “예스”와 “오케이”뿐이었다. 언젠가 내 의견을 제대로 말할 기회가 있으리라 믿으며 그 자리에서 삼킨 말을 단단히 기억해두곤 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런 기억들조차 점점 희미해져갔다.
2005년 1월, 5학년에 올라갈 무렵 나는 긍정적인 태도를 최대한 활용하는 법을 찾아냈다. 성적표에는 항상 온화한 성격과 지시를 잘 따르는 성향을 칭찬하는 평가가 달렸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갈등을 조정하고 대화로 합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부모님은 한국에 있는 친척들에게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잘 적응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한때는 주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해 당황했었지만, 이제는 뭘 주장하겠다고 나서는 일이, 얼굴이 벌게져서 다짜고짜 침을 튀기며 그런 헛짓에 풍덩 뛰어드는 일이야말로 정말 당황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나는 비로소 내 유년기를 지배할 리듬을 찾은 느낌이었다.
그러다 2005년 3월 어느 화창한 오후 갑자기 뭔가가 변했고, 2년에 걸쳐 간신히 만들어온 생활방식은 완전히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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