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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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차 없이 질주하는 기차의 객실―옆에 빈 좌석 하나를 두고 앞에 빈 좌석 둘을 마주하는 북측 창가―에 앉아 있는 나이 든 승객이 바로 티모페이 프닌 교수였다. 완전무결한 대머리, 그을린 피부, 깨끗이 면도한 얼굴―그 커다란 갈색 돔, 거기에 뿔테 안경어린아이 같은 눈썹의 숱 없음을 가려주는, 원숭이 같은 윗입술, 굵은 목선, 좀 꽉 끼는 트위드 상의 속의 장사 상체―그 시작은 제법 창대했지만, 그 끝은 홀쭉한 다리지금은 플란넬 바지를 입고 서로 교차, 그리고 여자 발처럼 약해 보이는 발이었으니 다소 미약했다.
양말은 진홍색 바탕에 연보라색 마름모무늬가 있는 헐렁한 모직이었지만, 구두는 보수적 검정색 옥스퍼드화였다현란한 건달 넥타이를 포함한 나머지 착장 전체와 거의 맞먹는 비싼 구두였다. 그가 바지 안에 내의를 입을 때 늘 끝단을 접어 양말에 넣고 양말을 가터로 고정했던 것은 그의 인생에서 고루한 유럽 시절에 해당하는 1940년대 이전까지였다내의는 흰색 면이었고, 양말은 자수 장식에 차분한 색상의 순견이었다. 그 시절의 프닌이었다면, 이렇게 가랑이 한쪽을 과하게 들어 올려 흰색 내복 바지를 슬쩍 내보이는 짓은 넥타이를 매지 않고 숙녀들 앞에 서는 짓 못지않게 망측한 짓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 시절에 faux col[가짜 목깃]을 벗고 있는 경우에는, 심지어 파리 16구의 지저분한 아파트 건물―프닌이 레닌화化한 러시아를 탈출해 프라하에서 대학교 공부를 완료하고 나서 15년을 산 곳―을 관리하는 타락한 수위 마담 루가 집세를 받으러 왔을 때도 순결한 손으로 목 단추를 가리던 조신한 프닌이었다. 그것이 송두리째 바뀐 것은 ‘신대륙’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였다. 지금은 일광욕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스포츠 셔츠와 슬랙스를 즐겨 입고, 다리를 교차할 때는 공들여, 일부러, 버젓이 맨살의 정강이를 노출하는 쉰두 살의 그였다. 동승자가 있었다면 바로 그 모습을 봤겠지만, 그때 객실에는 한쪽 구석에서 자고 있는 군인과 반대쪽 구석에서 아기에 열중하는 두 여자를 제외하고는 프닌 혼자뿐이었다.
이제 비밀을 밝혀야 할 때가 왔다. 프닌 교수가 기차를 잘못 탔다는 사실. 그는 그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고, 이미 프닌의 객실을 향해 한 칸 한 칸 다가오고 있는 차장 역시 모르고 있었다. 때마침 프닌은 그 순간 자기 자신에게 아주 대단한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크레모나―1945년부터 프닌의 학계 자리가 되어준 웬델에서 서쪽으로 약 2백 베르스타 떨어진―에서 열리는 금요 야간 강연회의 연사로 우리 친구를 초청한 ‘크레모나 여성 클럽’ 부회장―주디스 클라이드 양―이 가장 편한 기차 정보―1:52 PM 웬델 출발, 4:17 PM 크레모나 도착―를 알려주었는데, 프닌이 (시간표, 지도, 카탈로그를 지나치게 좋아하고, 종류별로 수집하고, 때마다 공짜라는 상쾌한 기쁨과 함께 마음껏 챙기고, 본인의 일정을 스스로 짜는 데서 유별난 자부심을 느끼는 수많은 러시아인 중 하나였으니) 한동안의 연구 끝에 더 편한 기차―2:19 PM 웬델 출발, 4:32 PM 크레모나 도착―의 비고―금요일 한정 운행이라는 것, 2:19 PM 크레모나 정차라는 것, 종점인 도시도 감미로운 이탈리아 지명인데, 한참 더 가야 하는 훨씬 더 큰 도시라는 것을 알려주는―를 찾아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가 5년 전 열차 시간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 사이에 차편이 부분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프닌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가 러시아어를 가르치고 있는 웬델 대학은 인공 정원 캠퍼스 중앙의 인공 호수,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학관들 사이의 연결 통로, 면식 있는 교원들이 등장하는 벽화아리스토텔레스와 셰익스피어와 파스퇴르로부터 넘겨받은 지식의 횃불을 기괴한 형체의 젊은 농민 남녀에게 넘겨주는 장면, 거대하고 활기차고 한창 번창하는 독문과학과장 하겐 박사가 의기양양하게 대단히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대학 안의 대학”이라고 부르는 학과를 특징으로 내세우는 다소 고루한 학교였다.
그 학년도1950년의 가을 학기에 러시아어 과목 수강현황을 보면, 중급 수강생은 한 명통통하고 성실한 베티 블리스, 상급 수강생도 한 명출석부의 이름으로 존재할 뿐 한 번도 실제로 나타나지 않은 아이번 덥, 가장 인기 있는 초급은 세 명민스크에서 태어난 조부모를 둔 조세핀 말킨, 천재적 기억력으로 열 개의 언어를 이미 처리했고 앞으로 열 개를 더 매장하겠다는 의욕에 넘치는 찰스 맥베스, 러시아어 알파벳을 떼면 『안나 카라마조프』를 원서로 읽을 수 있다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들은 나른한 아일린 레인이었다. 교사로서 프닌의 실력은 미국 학계에 흩어져 있는 엄청난 실력의 러시아 숙녀들―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의 학생들에게 그 어렵고 아름다운 언어를 마법처럼 자기가 아는 만큼 주입하는 데 성공하는 그들, 정규 교육을 전혀 받지 않는 상태로, 직감과 수다스러움, 그리고 일종의 모성적 탄성에 의지해, 볼가강의 노래들과 레드 캐비아와 차茶로 분위기를 조성하는 그들―과 경쟁하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한편 교사로서 프닌의 위치는 현대 언어학의 높은 학관들―음소들의 금욕적 결사체 같은 그곳, 성실한 청년들이 언어 자체를 배우는 대신 언어 교수법의 교수법합리적 항법이기를 멈추고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떨어지는 폭포수 같은 것이 되어버린 항법, 모종의 정교한 기계에 의해서만 구사되는 밀교적 방언, 예컨대 기초 바스크어 같은 언어를 생성하는 도구가 도리지도 모르는, 어떤 공상적 미래의 항법을 배우는 신전 같은 그곳―에 접근하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프닌은 가르치는 일에 아마추어의 태도, 가벼운 태도였던 듯, 수업을 할 때는 웬델보다 훨씬 큰 학교 슬라브어과 학과장러시아어를 한심할 정도로 못하는, 하지만 무명 노동의 생산물에 본인의 존함을 너그러이 빌려주는 덕망 높은 사기꾼이 펴낸 문법책의 연습 문제들에 의지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프닌에게는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는 고풍스러운 매력―하겐 박사그의 확고한 보호자가 뚱한 이사들 앞에서 내세운 주장에 따르면, 국내 현금을 쓰는 것이 아깝지 않은 정교한 외제―이 있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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