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조의 시대
나에게 그 회사를 추천해준 사람은 수영 언니였다. 언니는 구로공단역이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바뀌기 전부터 구로에 살았고, 직장도 그곳에서만 구했다. 대학 시절 매일 산책하던 천변을 지금까지도 매일 걸었다. 언니의 꿈은 웹툰 작가였지만 회사에서 요구하는 그림을 그리는 어시스턴트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다소 수위가 높은 성인 웹툰을 그려야 했다. 언니는 그 일을 시작한 지 반년 만에 탈모약을 먹기 시작했다.
내가 경리직으로 지원한 회사 역시 웹툰과 웹소설을 제작하는 회사였다.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였고, 언니 말로는 동종 업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회사라고 했다. 역에서 회사로 걸어가는 길에 테크노타워, 포스트, 밸리 등의 이름이 붙은 거대한 건물들이 잇따라 보였다. 그리 삭막한 풍경은 아니어서 짧게 안도했다.
관리팀 차장은 사십대 후반의 남자였다. 그는 내 이력서를 들여다보며 고심하더니 이직과 퇴사가 잦은 이유를 상세히 설명해보라고 했다. 그것부터 묻는 것을 보니 이번에도 떨어질 게 분명하다고 직감했다.
첫 번째 직장에 다닐 때 엄마가 수술을 하셨는데 제가 간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차장은 곧바로 다른 가족은 없는지 물었다. 없다고 답하려다가 흠칫 놀랐다. 실은 없는 게 아니지 않은가. 이력서에도 적혀 있듯 충조는 분명히 존재하는 인물이었다. 가족으로 볼 수 있는지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오빠가 있는데 멀리 살아요.
차장은 그러면 간병인을 쓰지 그랬느냐고 집요하게 물었다. 첫 질문부터 파고드는 것을 보니 여간 깐깐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고, 벌써부터 그와 함께 일하기가 싫어졌다. 차장은 두 번째 직장에선 왜 이런 거냐고 물었다.
6개월 근무하고 경영 악화로 퇴사를 권고받았는데, 그 뒤에 아르바이트생으로 다시 일해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을 받아서 반년 동안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했습니다.
잘라놓고 알바로 썼다고요?
차장은 나를 멍청한 여자애로 보는 듯한 눈길을 던지더니, 세 번째 직장에선 왜 이런 거냐고 물었다.
통근 시간만 네 시간 가까이 걸려서 어쩔 수 없이 퇴사했습니다.
차장은 이렇게 먼 회사를 생각 없이 들어간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했다. 합격한 곳이 그곳밖에 없어서였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러자 차장은 네 번째 직장에선 또 왜 이런 거냐고 물었다. 이력서에 쓰여 있는 그대로였다. 더 설명할 것도 없었다.
경영 악화로 퇴사를 권고받았습니다. 대답을 마치고 곧바로 짤막한 손톱만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있는 동안 내가 누군지, 이곳은 어디인지 헷갈렸다. 순간적으로 현재를 상실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압박 면접인 걸까? 그건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눈앞의 저 남자는 그런 소식을 혼자서만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세 달 만에 그랬다고요? 마지막 직장도 경영 악화로 퇴사했다고 되어 있는데?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회사가 망한 것이 내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요즘엔 그런 회사가 많다고 덧붙이려다가 말았다. 차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희망 연봉을 물었다. 그리고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했다. 우리가 원하는 사람은 같은 업무를 오랫동안 해줄 사람인데, 알고 오셨죠?
물론 알고 왔다. 이제껏 모든 걸 직설적으로 물어놓곤 자기에게 불리한 상황이 오니 예의를 차리며 우회적으로 묻고 있었다. 나는 잘 알고 왔노라고 답했다. 이젠 놀라지도 않는다. 업무의 난도가 높지 않고, 10년이 지나도 똑같은 업무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많은 돈을 줄 수 없다. 연차가 쌓이면 승진은 가능하지만 그걸 바라면 위험해지게 될 것이다. 너를 자르고 신입을 뽑아도 급여 정산 정도는 충분히 맡길 수 있다. 너는 그걸 알고 있어야 한다. 거의 모든 회사에서 들어온 말이었다.
차장은 다시 압박 면접으로 돌아가, 더존 프로그램은 당연히 쓸 줄 알죠? 라고 물었다. 예상하지 못한 말은 아니었으나 예상하지 못한 자신감 하락이 찾아왔다. 나는 떳떳하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 다녔던 회사들은 세무사 사무소에 자료를 넘기는 방식이었습니다.
차장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은 여긴 왜 왔냐고 묻고 있었고, 나의 얼굴은 나를 왜 불렀냐고 묻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한 채 헤어졌다.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는 강렬하고도 반가운 예감이 들었다.
텅 빈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로 향하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의 전화는 시간대를 가리지 않고 석양처럼 슬픈 기운을 몰고 왔다.
― 미조야, 조금 전에 집주인이 찾아왔어.
나는 알겠다고 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엘리베이터 벽면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니 유적지에 돋아난 누런 잡초 같은 안색이었다. 이런 몰골로 잘도 면접을 봤다. 아니면 면접을 봐서 이런 몰골이 되었나. 어쨌든 지금은 집 문제가 우선이므로 그것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작년에 골목에 현수막이 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각오는 했다. 재건축이 시작되면 주인에게서 무슨 말이 있을 거라고 미리 귀띔을 해두었는데도 엄마는 몹시 당황한 목소리였다. 이곳을 떠나면 반지하로 가야 한다는 걸 엄마도 알고 있는 것이다.
5천만 원으로 서울에서 전셋집을 구하겠다고? 수영 언니는 내 잔에 소주를 따라주다가 놀란 어조로 물었다. 오늘도 성인 웹툰을 그리다가 온 언니는 지난번 보았을 때보다 낯빛이 더욱 어두웠다. 새로 시작한 작업이 이전에 맡았던 것보다 더 심각한 내용이라고 했다. 변태적이고 가학적인 성행위를 즐기는 남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웹툰이었고, 그걸 그리며 언니는 매일 힘들어했다. 사장은 대박이 확실한 작품이라고 어시들을 독려했지만 거의 모든 어시가 여성이었기에 분위기는 언제나 좋지 않았다. 다들 힘들어했다. 작업을 하다가 엎드려 우는 동료도 있었고, 우울증 약을 먹는 동료도 있었다.
받아들여. 어딜 가든 마찬가지야. 어머니께도 그렇게 말씀 드리고. 언니는 언니다운 해결책을 내놓았고, 나는 대답 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게 가능하면 고민도 안 했겠지.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는 언니도 알았다. 충조의 잘못도 있었고, 엄마의 잘못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론 내가 잘해야 되는 문제로 귀결되었던 지난날을 언니도 다 알았다.
언니는 좋겠다. 언니 엄마는 어딜 가든 혼자서도 잘 사시잖아.
언니는 손을 내저었다.
우리 엄마는 너희 엄마보다 나이가 훨씬 많잖아. 혼자 사는 노인한텐 집주인들이 집을 잘 안 주려고 해.
왜?
언니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고독사할까봐.
나는 언니가 있는데 왜 고독사를 하겠냐고 묻지 못했다. 언니 역시 어묵 국물을 휘저으며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우리의 엄마들이 고독사할 가능성을 점쳐보고 있었다. 언젠가 우리는 K-장녀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고 캐리어를 끌고서 훌쩍 떠나버릴지도 모른다. 취하면 가끔 그런 얘기를 했다. 내가 아는 섬이 있는데, 거기 가서 같이 살자. 물고기나 잡아먹으면서. 언니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우리가 그 비린 것들을 매일 먹을 수 있을 리가 없다고 반박했다. 언니는 지금도 밤 9시만 되면 KFC 1+1 치킨을 먹기 위해 집을 나서지 않느냐고 덧붙이면서. 그런 말을 하며 우리는 함께 웃었다. 편의점 맥주와 스낵 봉지를 부려놓고. 우리의 낙이 네 캔의 맥주를 기막히게 잘 조합게 골라오는 것뿐일지라도 함께 있는 자리에선 자주 웃었다. 마주 보고 웃다 보면 더 많이 웃게 되었다. 그런 밤이면 언니는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만 있으면 괜찮을 거 같아. 외딴 섬이어도, 와이파이가 없어도.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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