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절실한 질문, 뭐하며 살지?
― 진정한 존재감 느끼는 ‘보시’의 일을 찾다
경옥은 “이제 뭐하며 살죠?”라고 물었다.
누구나 어느 지점에서 한 번은 하게 되는, 정답이 없어서 더 궁금한 질문.
이때, ‘사는 것’은 무엇이고, ‘한다’고 하는 그것은 무엇일까?
선문답이 아니다. 아니 선문답이다.
나는 그 질문을 이렇게 돌려주었다.
“경옥 님에게 산다는 것은 어떤 건가요?”
그녀는 즉답을 미루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60년대생으로 50대 후반인 그녀는 경제 성장 시대를 열심히 살면서 그 혜택을 제대로 누린 운 좋은 여성이라 할 수 있었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어렵지 않게 대기업에 취업했다. 무난하고 성공적인 진장 생활을 했고, 같은 직종에서 두 번 회사를 옮기면서 부장 직책까지 맡고 정규직을 마감했다. 빅데이터 관련 업무를 맡은 경험을 살려 관련 연구소에서 계약직으로 5년간 더 일하고 지난해 봄에 은퇴했다. 가족은 결혼해서 독립해 나간 아들이 하나 있고, 저축과 연금으로 노후의 경제 문제는 큰 걱정이 없었다.
그런데도 은퇴 후 1년이 지나가는 지금 그녀는 삶에 활기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뭘 해도 마음 한편에 허전한 느낌이 있습니다. 꽉 차오르는 순간이 없다고나 할까요? 하루하루 그냥 시간만 보내는 기분입니다.”
“은퇴 이전에는 어땠나요?”
“물론 직장을 다닐 때도 매일 신나거나 성취의 열정에 사로잡히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젊은 한때를 빼고는요. 그래도 아침이면 또 어떤 하루가 될까 기대도 있고, 일을 시작하고 끝내는 자잘한 만족과 기쁨이 있었죠. 무엇보다 마음이 평화롭고 단단하다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지금은 그때와는 확실히 달라요. 공허하다고나 할까, 마음을 붙잡는 뭔가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저에게 산다는 건 마음의 균형을 잡고 무엇엔가 순간순간 몰입하는 것인 듯하네요. 요즘의 생활은 알맹이가 빠져 있어요.”
그녀는 요즘의 일상이 몰입의 즐거움이 없는, 허전하고 공허한 시간이라고 강조해서 말했다.
성공한 워킹우먼인 그녀의 스토리를 보면 분명 나름대로 은퇴 후를 잘 준비했을 텐데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은퇴 후 어떤 생활을 기대하고 준비하셨어요?”
“은퇴 준비를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돈을 모으는 것 외에는 구체적인 준비가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더라고요.”
그녀의 은퇴 준비는 이런 것이었다고 했다. 첫 번째는 돈 쓰는 압박에서 자유로울 것. 일상의 해결은 물론이고, 가끔은 해외여행도 할 수 있고,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선뜻 지갑을 열 수 있을 정도의 경제 능력을 갖추는 것이 목표였다. 열심히 일하고 크게 낭비하지 않은 덕에 경제 독립은 가능했다. 다음으로는 정서의 독립. 혼자서도 잘 지내서 아들이나 주변의 누구도 귀찮게 하지 않을 것. 외롭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건강 관리와 취미를 위한 투자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꾸준한 운동은 물론이고 음악회와 전람회를 다니면서 식견도 넓혔고 동호회 활동도 했다.
은퇴를 앞두고 그녀가 맨 먼저 기대한 건 매일 출근하지 않는 생활의 여유와 편안함이었다.
‘느긋하게 일어나 시간에 쫓기지 않고 가벼운 건강식으로 아침을 만들어야지. 거실에는 클래식 음악을 잔잔하게 틀어놓을 거야. 창으로는 화사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겠지. 그리고 동네를 산책하는 거야. 멋진 카페에 가서 향이 좋은 커피에 달콤한 케이크를 먹을 수도 있겠지. 거기서 느긋하게 책을 읽자. 오후에는 친구를 만나거나 문화 생활을 하는 거지. 점심 후에 잠시 낮잠을 자는 것도 좋아. 저녁이면 드라마에 빠져 다른 세계를 유람하자. 요즘 화제가 되는 K무비도 제대로 즐긴 적이 없잖아.’
늘 바쁘게 살아온 그녀에게 이런 생활을 그리는 건 즐거운 상상이었다. 짜릿한 흥분이 느껴지는 생활은 아닐지라도 지루한 일상이 되리라는 염려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느긋한 일상이 계속된다는 건 늘어진 고무줄이 달린 속옷을 입는 것처럼 나른한 일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서너 달은 편안하고 산뜻했어요. 평일 조조 영화를 관람한다든지, 아무 날이나 좋아하는 연주회에 갈 수 있다든지, 내키면 항공편을 예약해 제주도의 멋진 펜션으로 날아가 풍광을 즐기며 맛집을 찾아가도 되는 생활이 화사하고 능력자 같았어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로 하루의 시간을 채운다는 게 맥 빠진 일상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6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일없이 먹고 쓰는 일로 하루를 보내는 유한마담 같은 생활은 성실함을 첫 번째로 꼽아온 그녀의 가치 철학을 건드리기도 했다.
그래서 다른 은퇴자는 뭘 하나 찾아보았다. 그동안의 바빴던 시간을 보상하듯 소비하며 즐기고 사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이사를 하고 차를 바꾸고 해외여행 계획을 짜면서 아늑하고 고민 없는 삶을 살 수 잇다는 데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 여건이 되지 않는 이들은 그녀의 고민을 사치로 여겼다. 손주를 돌보느라 하루하루가 바쁘다는 친구는 그녀에게 꼭 해야 할 일이 없는 게 얼마나 편하냐고 되물었다. 그 친구는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손주를 봐주고 있었다. 작은 옷가게의 월급 사장으로 일하는 다른 친구는 피곤한 얼굴로 그녀를 팔자 좋은 푸념이나 하는 철없는 친구로 여겼다.
“남이 부럽다고 해도 본인이 아니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지요. 자신이 원하는 삶이 뭔지 찾으려는 열정이 보기 좋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기 다른 인생이 있고 각기 다른 질문이 있다. 나는 그렇게 진심으로 그녀를 격려하며 그녀가 원하는 삶을 찾기 위한 여정에 힘을 보탰다.
경옥은 하루에 몇 시간씩 아르바이트라도 해볼까 하여 진지하게 일을 찾아보았다고도 했다.
“생활의 리듬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한나절이라도 바쁘게 일을 하면 집에서 쉬는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질 것 같아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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