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에 왔습니다
오십 년 인생에서
처음
내가 태어난 곳은 강원 영서에서도 북쪽에 위치한 화천군 상서면 산양리다. 내 고향을 말하면, 남자 어른들은 군대 생활을 거기서 했다는 말을 종종 한다. 내 고향은 화천읍에서도 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삼사십 분 달려가야 도착하는 시골이고 군부대 지역이었다.
겨울철 주말이면 엄마와 화천읍에 있는 목욕탕에 목욕하러 가고는 했다. 산양리는 목욕탕도 없는 ‘깡촌’이었던 거다. 목욕탕에 들어서면 사람이 가득했고, 뿌옇고 뜨거운 김이 가득했다. 여자 어른들의 부피감 있는 커다란 알몸으로 꽉 찬 목욕탕의 풍경은 어린 나에게는 조금 무서웠다. 엄마가 이태리타월로 내 몸의 때를 세게 밀면 아픈데도 군소리도 못 하고 견뎌야 해서 무서웠다. 당연히 목욕탕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 것은 목욕을 하고 나오면 바로 핫도그를 먹을 수 있다는 거였다. 비록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분홍 소시지가 겨우 들어 있는 밀가루 튀김 덩어리였지만 빨간 케첩을 구불구불한 모양으로 뿌려주는 핫도그 하나에, 고소하고 느끼한 기름 냄새에, 목욕탕에 대한 공포의 기억은 다 녹아 없어졌다. 엄마가 내 손에 들려주는 핫도그 때문에 목욕탕으로 가는 시련의 길에 매번 따라나섰다. 목욕을 끝내고 돌아올 때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버스에서 내 엉덩이가 놀이기구를 탄 듯 들썩들썩하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나는 기껏해야 일곱 살 정도 된 몸집 작은 어린이였으니 버스의 요동에 어른보다 더 심하게 엉덩이가 들썩였을 것이다.
내가 열 살이 되던 봄, 우리 집은 화천을 떠나 춘천으로 이사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춘천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산양리에 두고 온 친구들을, 산과 동네 거리를, 시골에서 뛰어놀던 때를 눈물 흘리며 그리워했다. 아침에 학교에 갔다가 아무 때나 무단 귀가하는 초등학생이 되었다. 다행히 학교와 집이 가까웠고, 또 다행히 좋은 담임 선생님을 만났다. 무단 귀가한 내가 집에서 놀고 있으면 선생님이 찾아와서 나를 데리고 다시 학교로 가고는 했다. 선생님의 친절한 마음 덕분에 춘천에 적응해, 중·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춘천에서 다니며 자랐다.
국어 교사를 직업으로 삼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도 춘천 인근홍천과 인제을 떠나지 않고 살다가, 2021년 강원 영동 지역인 삼척의 한 고등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태어나고 자란 지역을 50년 만에 처음으로! 벗어나게 되었다. 본 거주지와 가족을 춘천에 둔 채, 나 혼자 삼척에 왔다. 결혼하기 전에는 부모님과, 결혼 후에는 남편, 딸,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으니, 영서 지역을 떠나는 것도 처음, 혼자 사는 것도 처음이다. 그러니 삼척에 온 것은 내 인생의 큰 사건인 셈이다. 어떤 지역에서 내부인이자 외부인으로 살아 본, ‘첫 경험’이었다.
모든 것이
시작되는 저녁
3월 1일 자로 발령을 받고, 2월 마지막 날 초저녁 무렵 삼척에 도착했다. 짐을 대충 풀고 난 후, 저녁도 먹고 동네도 익힐 겸 시장까지 걸었다. 15분 정도 걸어가니 삼척중앙시장이 나왔다.
골목을 걷다가 작은 식당을 만났다. 대구탕, 곰칫국이라 쓴 투박한 나무 팻말을 가게 앞에 세워놓은 식당. 간판 조명이 희미했다. 식당 문을 조금 열고 들여다보니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를 쳐다본다. 주인 부부인가 보다. “혼자인데 먹을 만한 거 있나요?” 물어보니, 할머니가 “아휴, 혼자라도 밥은 먹어야지.” 한다.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서인지 손님은 없다. 좌식 테이블 대여섯 개가 전부인 작은 밥집이었다. “뭐 먹으면 좋을까요?” 물었더니, 할머니가 “다 좋은데. 오늘은 갈치찌개도 좋고, 대구탕도 좋아. 드시고 싶은 거 드셔.” 한다. 나는 대구탕을 주문했다.
자리에 앉으니, 할아버지가 방석 이야기를 세 번이나 한다. 상 밑에 방석 있다고, 방석 깔고 앉았냐고, 방석 깔고 앉아야 따뜻하다고. 지나친 방석 걱정이 푸근한 마음이려니 싶었다. 시골에 온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내 쪽으로 걸어오는데 깜짝 놀랐다. 허리가 90도 가까이 굽었다. 더구나 쟁반을 든 두 팔이 후들후들 조금씩 떨린다. 벌떡 일어나 쟁반을 받아야 할 상황이었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라 얼떨결에 앉아서 상을 받았다.
묵은지를 넣고 끓인 심심한 대구탕을 먹었다. 내가 먹어본 대구탕은 고춧가루 넣어서 칼칼하고 얼큰하게 만든 것이었는데, 이건 짜지도 맵지도 않다. 심심하게 끓인 김칫국에 대구 몇 토막을 풍덩 넣은 것만 같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사실 나는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매운 맛에 휘둘리는 느낌이랄까. 매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밥을 먹으면서 식당을 둘러보고는 슬며시 웃었다. 어르신 두 분이 돌보는 식당인데, 어디 한 군데도 흐트러진 구석이 없다. 상 아래에 놓인 방석 네 개는 접착제로 붙여 탑을 쌓은 양 가지런하다. 테이블마다 놓인 수저통, 냅킨통의 위치와 각이 완벽하게 통일되어 있다. 주방의 양념통들마저 설탕, 소금, 고춧가루 등의 작은 이름표를 붙인 채 줄과 간격을 맞춰 서 있다. 두 분이 이 작은 공간을 얼마나 부지런히 닦고 정리하는지 훤히 보였다.
두 분도 저녁 식사로 대구탕을 드신다. 밥집 한 지 오래되었다 한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손님이 없다, 매일 생선 사다가 국 끓이는 게 낙인데 이제 나이도 많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할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풀어놓으신다. 밥상만 달리했을 뿐 나는 두 분과 함께 밥을 먹는 기분이었다. 두 어르신의 즐거움, 자부심, 근심을 알게 되었다.
밤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두 분을 생각했다. 아마 두 분은 내일도 굽은 허리로 밥상을 닦고 흐릿한 눈으로 생선국을 끓일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손님이 없어도 쉬는 날 없이 식당을 열 것이다.
삶은 이런 것일까. 아침이 되면, 오래도록 해왔지만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는 일상을 이어가는 것, 삶의 공간을 부지런히 돌보는 것, 그래서 경건하고도 유쾌한 것. 나도 내일이 되면 낯선 학교에서 새롭고도 익숙한 일상을 이어갈 것이다.
높은 건물 드문 나지막한 삼척의 밤 풍경, 바람 없이 얌전한 삼척의 밤공기가 아직 이방인인 나를 안아주었다. 모든 것이 시작되는 저녁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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