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쓸모없음의 쓸모에 관하여
구원은 연이은 재앙의 작은 틈 속에 버티고 있다.
―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다. 생산성이 우리의 가치를 결정하는 세계에서 우리의 1분 1초는 매일 사용하는 기술에 의해 포획되거나 최적화되어 경제 자원으로 활용된다. 소셜미디어상의 우리는 기꺼이 자유시간을 수치화하고 알고리즘 형태로 상호작용하며 퍼스널 브랜드를 구축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모든 경험을 능률화하고 네트워킹하는 데서 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외부 자극이 심하고 생각의 흐름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불안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산만한 화면 뒤로 사라지기 전에 이러한 불안감을 간파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 느낌은 시급하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많은 것이 휴대폰 밖의 우연과 방해, 뜻밖의 만남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기계론적 세계관이 없애려 하는 ‘비작동 시간off time’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물섬』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은 1877년에 이미 바쁨을 ‘활력 부족의 증상’이라 정의하고 “바쁨은 관습적인 일을 할 때를 제외하면 삶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 기운 없고 진부한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어쨌거나 우리의 삶은 한 번뿐이다. 철학자 세네카Seneca는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과거를 돌아보다 삶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깨닫는 공포를 묘사한다. 이는 한 시간 동안 페이스북에 푹 빠져 있다가 막 정신을 차린 사람의 모습과 매우 유사한다.
기억을 돌이켜 생각해보라. 무엇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 채 얼마나 많은 것을 삶에서 빼앗겼는지, 쓸모없는 슬픔과 어리석은 기쁨, 탐욕스러운 욕망, 사회의 유혹에 얼마나 많은 것을 소진했는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자신의 계절이 오기도 전에 이미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집단으로 넘어가면 이 위험은 더욱 커진다. 우리가 사는 복잡한 시대에는 복잡한 생각과 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복잡한 생각과 대화는 이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시공간을 필요로 한다. 무한한 연결의 편리함은 얼굴을 맞대고 나누는 대화에서 알아챌 수 있는 미묘한 차이를 아스팔트를 바르듯이 깔끔하게 덮으며 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정보와 맥락을 잘라냈다. 의사소통이 가로막히고 시간이 곧 돈인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순간은 많지 않으며, 서로를 발견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결과와 성과만을 중시하는 시스템에서 예술이 얼마나 살아남기 힘든지를 고려하면 문화 역시 위험에 처했다고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기술만능주의와 트럼프 문화는 미묘하고 시적이며 명백하지 않은 것을 견디지 못하는 공통된 취향을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용인되지 않는다. 사용하거나 착취할 수 없고, 어떤 결과물도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도널드 트럼프가 연방예술기금을 폐지하려 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초현실주의 화가 조르조 데 키리고Giorgio de Chirico는 20세기 초에 관찰처럼 ‘비생산적’인 활동의 지평이 점점 좁아질 것을 예건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점점 더 물질적이고 실용적인 쪽으로 향하는 우리 시대의 방향성 앞에서 정신적 기쁨이 삶의 목표인 사람들이 양지바른 곳을 요구하지 못하는 미래 사회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작가와 사상가, 몽상가, 시인, 형이상학자, 관찰자 등 수수께끼를 풀거나 비평을 하려는 사람은 시대에 뒤처진 인물이 되어 어룡이나 매머드처럼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은 그 양지바른 곳을 지키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끊임없이 우리의 주의를 빼앗으려 하는 관심경제attention economy, 인간의 관심을 희소자원으로 규정하고 이윤 창출에 활용하는 경제·소셜미디어가 관심경제의 대표적 사례이며, 이들은 중독을 일으키는 각종 기술을 사용해 최대한의 관심을 끌어내고자 한다―옮긴이에 맞서는 정치적 저항 행위의 일환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을 제안하는 현장 가이드다. 이 책은 예술가와 작가뿐 아니라 삶을 한낱 도구 이상으로, 다시 말해 최적화할 수 없는 무언가로 여기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내 주장의 바탕에는 명료한 거부가 있다. 현재의 시간과 공간,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로는 어쩐지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에 대한 거부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같은 플랫폼은 타인을 향한 관심과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를 활용하는 댐과 같아서,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욕망을 장악하고 방해하며 그로부터 이득을 취한다. 고독과 관찰, 사람들과 함께할 때 느끼는 단순한 즐거움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일 뿐 아니라 삶이라는 행운을 얻은 모든 사람이 가진 양도 불가능한 권리로 여겨져야 한다.
나는 자본주의적 생산성의 관점에 반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제안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종의 행동 계획이다. 나는 몇 가지 움직임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한다. 바로 1960년대의 ‘이탈’과 닮은 이탈 운동, 우리 주위의 것들을 향해 나아가는 횡적 운동, 땅을 향해 나아가는 하강 운동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대다수 기술이 우리의 자아 성찰과 호기심, 소속의 욕구를 이용해 가짜 목표물을 만들어낼 것이다. 대안으로써의 도피를 갈망할 때는 이런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만약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곧 자연임을 깨닫는다면 ‘자연으로 돌아가다’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증강혈실AR이 (오히려) 휴대폰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마침내 휴대폰을 내려놨을 때 우리 앞에 있는 것은 무엇또는 누구일까?
이 책은 신자유주의적 결정론이라는 불모지에서 모호함과 비효율이라는 숨어 있는 샘을 찾으려 한다. 이 책은 소일런트Soylent, 식사 대용으로 먹는 대체 식품―옮긴이의 시대에 먹는 네 가지 코스 요리다. 잠시 멈추거나 속도를 줄이라는 권유에 독자들이 위안을 얻길 바라지만, 주말의 조용한 휴식이나 창의성에 관한 이야기로 기결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내가 말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요점은 상쾌한 기분으로 일터에 복귀하거나 더욱 생산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생산성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주장은 명백히 반자본주의적이며, 시간과 장소, 자기 자신, 공동체에 대한 자본주의적 인식을 부추기는 기술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렇다. 나의 주장은 환경과 역사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기술에 침잠된 관심의 경로를 바꿔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에 더욱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자신이 역사의 일부이자 인간과 비인간이 모인 공동체의 일부라는 의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사회적 관점에서든 생태학적 관점에서든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궁극적 목표는 우리의 초점을 관심경제에서 거두어 공적이고 물리적인 영역에 옮겨 심는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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