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모나리자
천천히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희진은 생각했다. 사람의 일이란 정말이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고. 바퀴가 구를 때마다 생각의 바퀴도 함께 굴러갔다. 지난 초가을까지만 해도 청소년 글짓기센터 강사로 나가던 자신이 지금은 파리에서 자전거로 음식 배달을 하고 있는 거였다. 서울의 따릉이와 같은 공공 자전거 벨리브는 삼십 분까지는 무료여서 그동안에도 몇 번 이용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임무 수행을 위한 행보여서 페달을 밟는 발에 좀 더 힘이 실리는 느낌이었다. 마스크 밑에서 서서히 숨이 차오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는 조금씩 가속 페달을 밟았다. 실외 마스크 쓰기가 의무화되었지만 파리 거리의 행인들 중 절반가량은 쓰지 않고 있었다. 희진은 속도를 더 내기 위해 갑갑한 마스크를 벗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십팔만 원이나 되는 벌금도 부담이지만 남의 나라에 와서 규칙을 어기고 싶지는 않았다. 식당에 일이 밀려 있어 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마스크는 벗을 수 없고, 몹시 난처한 상황이었다. 가쁜 숨을 찾아가면서도 페달을 조금 세게 밟을 때면 등에 잠자는 아기를 업은 듯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등에 멘 상자 속의 내용물일 쏟아질까 염려 되어서였다.
“페달을 밟을 때 꼭 신경 써야 할 게 있어요. 등짝의 각도요.”
한식당 코스위티의 소년 배달부 아둠의 말이었다. 얼마 전 희진이 자전거를 타고 아둠의 배달길에 따라나섰을 때였다. 꼭 그의 무단결근에 대비해서는 아니었고 그저 지리를 익힐 겸 재미 삼아 따라나선 거였다. 그날 희진은 아둠이 배달 일에 세심하게 정성을 쏟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었다. 그만큼 자기 일에 진정인 아이가 웬일로 새해 첫날 연락도 없이 결근을 했다. 전화나 문자에도 답이 없어 하는 수 없이 희진이 대타로 나선 거였다. 늘 하던 테이블 세팅과 홀 관리, 그리고 홈페이지 업데이트는 오늘 하루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희진이 기행문 대필을 위해 파리에 온 것은 지난해 10월 초였다. 문창과를 다닐 때 소설작법 강사로 나왔던 소설가 H의 대필 제안을 받고서였다. 자신이 코로나에 걸려 출국이 어려워졌으니 대신 다녀오라는 얘기였다. ‘팬데민 속 문학 기행―작가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나’를 주제로 유럽의 여러 도시를 취재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코로나는 그녀에게서 일자리를 빼앗기도 하고 또 다른 일거리를 마련해주기도 하는 동전의 양면인 셈이었다. 대필이라는 것이 조금 씁쓸했지만 문창과를 졸업하고 나서 등단도 취업도 하지 못한 주제에 들어온 기회를 마다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항공료와 숙박비에 취재비까지 넉넉하게 책정되어 있었다. 문예지 측과는 이미 합의를 했다고 H는 말했다. 두 사람이 원고 내용을 협의하고 H의 최종 검토를 거친다는 전제하에 ‘공동 필자’로 명시하기로.
정기적으로 나가던 탈북 청소년 글짓기센터는 언제 다시 문을 열지 기약이 없었다. 말이 글짓기 강사이지 아이들이 쓴 글을 두고 첨삭 지도를 하며 대화를 나누는 상담사 같은 역할이었다. 하지만 교통비 정도만 지급되는 자원봉사 차원이어서 언제 그만둘까, 고민 중이었는데 코로나가 터진 거였다. 잘됐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짠하기도 했다. 제일 마음에 걸리는 아이가 철웅이었다. 웅이는 탈북 과정에서 입은 상처 때문인지 수업 중에도 갑자기 공포에 떨며 경련을 일으키고는 했다. 하지만 다시 글짓기센터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면 솔직히 꺼려지기도 했다.
가까운 곳은 걸어서 배달을 다 끝내고 마지막 목적지인 스트라스부르 생드니로 가는 길. 자전거로 오 분 거리여서 가뿐하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이었다. 단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정식으로 플랫폼에 등록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새해 첫날이어서 배달부를 구할 수가 없다며 주인이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았을 때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아둠과 함께 고객들 집을 다녀본 직원은 자신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만약 노동 허가증과 취업비자 없이 일하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큰 화를 당할 수도 있었다. 본인은 물론 업주에게도 근로소득세 포탈 혐의로 고액의 벌금이 내려진다고 했다. 아무튼 오늘은 어쩔 수 없었지만 배달부 역할은 이것으로 끝내야만 되었다.
그런 걱정 가운데서도 희진은 아둠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하나하나 머릿속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라는 말과 함께 촉촉이 젖어오던 유난히도 큰 눈. 이젤과 물감을 사주고 그를 교포 화가가 운영하는 청소년 미술학교에 데려가던 날, 아이의 기본 소양을 못 미더워하는 화가 J를 설득하느라 진땀을 흘리던 순간.
“얘는 프랑스어에다 영어도 잘해요. 파리에 와서 삼 년 동안 좋은 양부 밑에서 필요한 건 거의 다 배운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 감수성도 풍부하구요. 받아주시면 제가 아이들 루브르 데려가는 자원봉사 해드릴게요.”
화가와의 오랜 실랑이 끝에 어렵사리 아둠은 미술학교 입학이 허락되었다. 희진은 화가와의 약속대로 아둠을 포함해 아프리카와 동남아 등에서 이민 온 청소년들을 데리고 루브르로 갔다.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인파로 붐볐다. 그중에서도 드농관 일층 모나리자 전시실은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기였다. 사람들은 모나리자 앞에 마치 경배하는 듯한 자세로 서서 좀처럼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팬데믹 시대에도 아름다움을 향한 인간의 갈망은 막을 수가 없는 듯했다. 희진은 아이들을 데리고 몇십 분을 서 있었지만 줄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한 시간을 기다려 마침내 그림 앞에 섰을 땐 일행 중에서 자신과 아둠과 남아 있었다. 뒤돌아보니 다른 아이들은 기다리다 지쳤는지 줄에서 빠져나가 멀리서 멀뚱멀뚱 사람 구경만 하고 있었다. 모나리자 앞에 서 있는 동안 희진은 아둠에게 그림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뭔가 손입견 없이 자신의 눈으로 그림을 볼 수 있도록.
그러고 나서 얼마 후 희진은 전시회에 초대되었다. 아둠이 미술학교에 자신을 보호자로 등록했기 때문이었다. 아둠의 그림 앞에 선 희진은 가슴속에서 잔잔한 파동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검은 모나리자를 그릴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거기에는 검은 피부에 큰 눈과 도톰한 입술, 그리고 불거진 광대뼈를 지닌 새로운 모나리자가 서 있었다. 야윈 얼굴에 군살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홀쭉한 몸매의 여인은 손에 곡괭이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밭에서 돌을 캐내다가 잠시 허리를 편 듯한 모습이었다. 여인은 머리에 흰색의 스카프를 꽁꽁 동여매고 겨자색 바탕에 청색 줄무늬가 찍힌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희진의 눈은 마디가 툭툭 불거지고 갈고리가 다 된 그녀의 손에 가서 한참을 머물렀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녀의 표정이었다. 웃을 듯 말 듯 신비롭고 아련한 다빈치의 그림과는 달리 아둠의 것은 깊고 고요한 눈에 슬픔과 우수가 어려 있었다. 온갖 시련을 다 겪은 뒤 그저 담담하게 주어진 일을 하고 있는 일상 속 여인의 모습이었다. 곁에 있던 화가 J가 말을 건넸다.
“희진 씨와 같이 루브르에 다녀오고 나서 수업 시간에 그린 거예요. 박물관에서 본 걸 그려보라고 했더니 마당에 있는 피라미드를 그린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모나리자를 그렸어요. 모두가 하얀 모나리자였죠. 아둠만 빼고요. 이 친구에게는 아마도 콩고에서 본 익숙한 광경이었나 봐요. 여자들이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모습이죠. 어쩌면 마음속으로 어떤 바람을 갖고서 그렸는지도 모르겠어요. 여인들에게 좀 더 나은 삶이 오기를. 어쨌든 이 그림을 보면 일단 마음의 안정은 찾은 것 같아요. 그래서 자긍심이 되살아나 자신의 모나리자를 그린 게 아닐까요? 양부 집에서 쫓겨나면서 마음을 많이 다쳤을 텐데. 정말 궁금해요. 무엇이 아이에게 그런 자긍심을 갖게 했는지.”
그날 숙소를 돌아오는 길에도 희진은 J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무엇이 아이에게 그런 자긍심을 갖게 했는지.’ 그것이 무엇인지는 희진도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며칠 뒤 누구를 모델로 그렸느냐고 물어본 적은 있었다.
“그냥 엄마랑 동네 아주머니들요.”
아둠의 대답을 들으며 희진은 생각했다. 검은 모나리자의 얼굴에 어린 수심은 어쩌면 오랜 내전의 그림자일지도 모른다고. 그렇다고 아둠이 그 아픈 역사를 알고 있었을까?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태어나기 수십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희진의 마음은 전시회 때의 그 뿌듯함과는 달리 오로지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둠은 어디서 새해를 맞고 있을까. 혹시 그 악명 높은 새해맞이 ‘제야의 불놀이’에 가담한 것은 아닐까. 설마 어제 알자스의 작은 도시, 스트라스부르로 가진 않았겠지. 십여 년 전 최초의 자동차 연쇄 불놀이가 시작되었던 곳. 아니면 파리 시내 어느 주차장이었을까. 결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새해 첫날의 무단결근은 수상쩍게 여겨졌다. 오늘 아침 티브이 화면에서 화염에 싸인 자동차들을 보자 의심의 그림자는 더욱 커져만 갔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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