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5월의 어느 저녁,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미국인 에버렛 휴스Everett Hughes는 어느 독일인 건축가의 집을 방문했다. 때는 1948년, 독일의 다른 많은 지역과 마찬가지로 프랑크푸르트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연합군이 나치에 대항해 공중전을 벌이며 집중 폭격한 대로를 따라 허물어져가는 저택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야말로) 동네 전체가 통째로 파괴되어 있었다. 폭격이 일어나기 몇 주 전 휴스는 일행과 함께 차를 몰고 분화구처럼 땅이 숭숭 팬 도심을 돌아다니며 전쟁의 참화를 비켜간 상점가나 주택가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얼마 안 가 그들은 탐색을 포기했다. “어딜 가든 지붕이 날아가거나 아예 무너진 집이 최소 한 채는 있었고, 흔히 절반이나 그 이상이 무너진 상태였다.” 휴스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휴스는 전쟁 피해를 조사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시카고대학교의 사회학자로, 한 학기 강의를 하러 이 도시에 온 것이었다. 1897년에 태어난 그는 저널리스트 출신이자 부커 T. 워싱턴Booker T. Washington의 보좌관을 거쳐 시카고 사회학파를 공동 창립한 로버트 파크Robert Park의 제자였다. 파크가 창시한 시카고학파는 ‘인간 생태’ 연구에서 직접 관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문학을 좋아하며 예리한 관찰력의 소유자였던 휴스는 겉보기엔 제각각인 사소한 사건들의 세부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경향을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딜 가든 일기장을 들고 다니며 떠오르는 생각을 적었고 그런 단상 중 여럿이 학술 연구로까지 발전했다.
휴스는 프랑크푸르트 시절 기록한 일기에서 이 도시의 진보적인 지식인과 교유한 일에 대해 이들의 “전반적인 생각과 태도와 소양은 서양 여느 국가의 진보적인 지식인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날 건축가의 집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도면으로 가득 찬 널찍한 작업실에 앉아 차를 홀짝이며 과학, 예술, 연극에 관해 담소를 나누었다. “세계 모든 나라의 지식인이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 독일인 교사가 말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엔가 그가 미군정 시절 프랑크푸르트에서 본 미국 병사들은 매너가 좀 없더라는 말을 꺼냈다. 이에 휴스는 좀 더 껄끄러운 화제를 던져보기로 했다. 그는 전쟁 중에 많은 독일 병사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느냐고 교사에게 물었다.
“저는 그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우리 국민이 부끄럽습니다.” 건축가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일에 대해 몰랐어요. 한참 나중에 알게 됐죠. 그리고 우리가 당시 어떤 압박을 받았는지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당에 가입해야 했어요. 입단속을 해야 했고, 시키는 대로 해야 했어요. 압박이 엄청났습니다.”
“그래도 부끄러움은 그대로입니다만.” 건축가가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식민지를 잃고 국가적 명예를 실추한 참이었어요. 그때 나치 놈들이 나타나서 그 감정을 이용했죠. 게다가 유대인들, 그들이 문제였습니다. (…) 이 최하층 인간들은 이가 끓고, 더럽고, 가난하고, 지저분한 카프탄튀르키예, 아랍 등 지중해 동부 지방 나라들에서 착용하던 긴 상의-옮긴이 차림으로 게토를 뛰어다녔거든요. 첫 전쟁 후에 여기로 와서 믿을 수 없는 방법으로 큰돈을 벌었죠. 좋은 자리란 자리는 전부 유대인들이 차지했어요. 의사, 변호사, 공무원 열 명 중 한 명이 유대인이었다니까요.”
건축가는 여기서 이야기의 흐름을 놓쳤다. “제가 어디까지 말했죠?” 휴스는 그에게 유대인이 “전부 차지했다”는 이야기까지 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요, 그 얘기.” 건축가가 말했다. “물론 유대인 문제를 그렇게 해결해선 안 되었죠. 하지만 문제는 문제였으니까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어요.”
휴스는 자정 직후 건축가의 집을 나섰다. 그러나 그날의 대화는 그의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그는 북아메리카로 돌아온 뒤 몬트리올 맥길대학교 강연에서 그날 건축가와의 대화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로부터 14년 후인 1962년 맥길대학교 강연을 바탕으로 쓴 글을 학술지 《소셜 프라블럼스Social Problems》에 기고했다. 이때는 나치 체제하에서 펼쳐지고 대량학살로 절정에 달했던 공포의 행렬을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이론이 나와 있었다. 여기에는 독일인 특유의 ‘독재적 성격’ 탓이라는 설명도 있었고, 아돌프 히틀러의 광신주의 탓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그러나 휴스는 다른 요인에 주목했다. 그 일에 관련된 자들은 광신자도 아니었고 딱히 독일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히틀러 시대의 범죄자들은 그저 총통의 명령에 따라 잔악한 짓을 저지른 게 아니었다.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의 ‘대리인’이었다. 프랑크푸르트의 건축가 같은 선량한 사람들은 나치의 유대인 박해에 대해 깊이 따져 묻지 않았다. 그들에겐 유대인 박해가 어떤 면에서는 만족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Holocaust’ ‘유대인 말살Judeocide’ 등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표현하는 용어가 여럿 나와 있었으나 휴스는 보다 평범한 표현을 선택했다. 그는 유대인 학살을 ‘더티 워크dirty work’라 표현했다. ‘불결하고 불쾌하지만 점잖은 사회 구성원들이 아주 모를 수는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독일에서 ‘열등한 족속’을 제거하는 것은 나치에 찬동하지 않던 지식인마저 동조했다. 휴스는 ‘유대인 문제’에 관한 건축가의 생각에 대해 프랑크푸르트에서 다른 대화들을 나누며 결론을 내렸다. 휴스는 그 건축가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자신을 그들유대인과 명확히 분리하고 그들은 문제라고 호명했다. 그런 그가 제 손으로는 하지 않을 더러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고는 또 그 일이 부끄럽다고 표현했다.” 이것이 더티 워크의 본질이다. 선량한 사람들은 비윤리적인 행위를 대리인에게 위임한 뒤 책임을 편리하게 회피한다. 더러운 일을 떠맡은 사람들은 무슨 불량배가 아니라 사회로부터 ‘무의식적 위임’을 받은 이들이다.
나치가 사회의 위임을 받았다는 추론은 근래 들어 점점 더 많은 증거로 뒷받침되고 있다. 가령 역사학자 로버트 겔라틀리Robert Gellately가 2001년에 쓴 《뒤받쳐진 히틀러Backing Hitler》에서 밝혔듯, 유대인을 비롯해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 나치의 폭력은 평범한 독일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고 그 일에 협조한 사람도 많았다. 이 점에서 휴스가 1962년에 《소셜 프라블럼스》에 발표한 〈선량한 사람들과 더러운 일Good People and Dirty Work〉은 선견지명으로 쓰인 글이었다. 그러나 휴스는 이런 사실을 밝히려고 글을 쓴 게 아니었다. “내가 유대인 문제에 관한 나치의 ‘최종 해결책’에 다시 주목하는 것은 독일인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언제나 숨어 있는 위험들에 우리의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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