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고종과 함께 한 근대 도서관의 유적
근대近代, late modern period는 서양 역사상의 시대 구분이다. 근세early modern period 다음이며, 현대 이전이다. 역사, 철학, 예술사 등 근대의 시작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견해차가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르네상스 이후인 17세기, 18세기부터라고 본다. 근대는 봉건제도가 끝나고 전개되는 시대인 만큼 개인의식, 자본주의 및 시민사회의 성립이 특징이다. 즉 봉건사회를 극복한 근대 사회는 개인을 존중하며,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의 모습을 갖는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의 ‘근대’란 무엇이며 그 시점은 언제부터일까? 다음은 조선왕조 사회 전반에 대한 다양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국사의 특성을 연구한 에드워드 와그너Edward Willett Wagne의 주장이다.
근대화라는 용어는 본질적으로 ‘서구화’라는 개념과 동일한 어감을 갖는다. 즉 ‘근대화’라고 부르는 과정이 서구 세계에서 발생한 하나의 과정이며 서구 문명의 발전단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최근의 한 단계라는 사실이다. 단순하게 말한다면 비서구의 전통사회가 서구화되는 과정, 다시 말해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서구 형태를 모방하여 비서구의 전통사회를 탈피하고 서구와 같은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이다… 일제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을 근대화하려는 노력은 자연히 매우 늦어졌고 방해받았다. 한국에서 근대화 과정이 시작된 것을 언제쯤으로 헤아려야 할까? 1864년? 1876년? 1894년? 1910년? 1945년? 1948년? 이는 모두 기념비적인 연도이므로 이 가운데 어떤 해를 근대화가 시작된 기점으로 삼아도 괜찮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화가 시작된 연도를 1960년이나 1961년으로 보는 것이 아직도 더 적절한 것 같다. 한국은 근대화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실패도 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와그너의 주장〔에드워드 와그너 지음. 이훈상·손숙경 옮김. 2007.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 서울: 일조각. 396〕은 일리가 있다. 다만 우리나라는 서구의 근대를 직접 받아들이진 못했다. 개항과 조약을 통해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고 통상을 통해 그들의 문명과 문화를 받아들였지만 대부분 영향을 미친 것은 일본이었다. 물론 일본이 한국의 근대화를 주도하게 만든 것도 서구였다. 이 과정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주의 세력 간 침탈과 이해관계속에 전개되었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최종 정리되었다. 당시 조선이 주도권을 갖고 근대화를 추진하기에는 그 동력도 기반도 부족했다. 이런 배경 하에 우리나라에서의 ‘근대’의 의미나 시기를 전제 조건 없이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여러 관점에도 불구하고 역시 쉬운 선택은 ‘개항’을 기준점으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관점을 반영하여 1876년을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의 기점으로 하고, 이 시기를 세분해서 1876년부터 한일병합이 이루어지는 1910년까지를 개화기로 하였다.
근대의 문을 연 고종
고종 시대는 조선 시대 마지막 왕조기다. 조선 후기와 개화기, 근대를 잇는 역사적 과도기로서 우리나라 왕실도서관의 전근대적 상황과 근대를 지향하는 면모를 시대적 변화와 함께 돌아볼 수 있다. 특히 고종대에 존재한 왕실도서관과 개인도서관 역할을 한 상당수 건축물과 그 흔적이 되는 기록물이 현존하고 있어 이를 통해 근대로 향하는 왕실도서관의 변천 과정을 밝혀낼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까지 여러 타 분야 학계에서 고종 시대사 속에 왕실도서관을 대표하는 ‘규장각奎章閣’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고, 문헌정보학계 서지학 분야에서도 연구가 지속되었다. 다만 고종대 왕실도서관 전체 현황에 대한 조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변천 과정은 부분적으로만 연구되었다. 고종대 왕실도서관은 물론 모든 도서관은 당대의 문화와 사회를 보여준다. 이 글 역시 고종대 왕실도서관은 고종과 그 시대적 상황, 즉 당대 국내외의 정치 상황, 사회 제도적 환경, 그리고 기술과학이 포함된 건축사적 측면까지를 포함하여 통시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기본 시각에서 출발했다.
고종대 왕실도서관은 ‘규장각’이라는 중앙관서 직제에 속해 있지만, 실제 도서관의 역할을 ‘규장각’이라는 하나의 관명과 조직으로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이는 ‘규장각’이라는 이름의 왕실도서관 역할을 한 전각뿐만 아니라 고종의 개별 서재와 도서 수장처 기능을 한 다양한 전각이 있었고, 이러한 전각들이 경복궁, 창덕궁, 경운궁덕수궁에 걸쳐 설립되면서 시공간적 변화와 함께 그 기능도 변화했기 때문이다. 특히 규장각 기능의 변화는 당대의 정치·사회적 상황에 따른 대응의 의미도 있어서 보다 다면적이고 복합적 관점이 필요하다. 이미 세계문명사는 ‘도서관’이 책을 수장하고 열람하는 공간만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왔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우리나라 도서관사의 영역도 정치제도, 사회·문화사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고종 시대는 근대화에 앞서 국내외적으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러하기에 이 혼란의 역사 속에서 ‘규장각’이라는 직제하에 정의된 왕실도서관의 변천 과정을 연대사적 정리와 함께 통시적으로 그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 답하고자 필자는 먼저 고종대의 왕실도서관과 개인도서관 역할을 한 고종의 서재와 도서 수장처 현황을 조사했다. 다음, 조사한 현황을 바탕으로 고종대 초기부터 대한제국 시기 황실도서관까지 이어지는 변천 과정과 그 의미를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각종 서목 등 당시의 다양한 사료와 연결하여 살펴보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경복궁, 창덕궁, 경운궁으로 이어지는 왕실도서관의 시공간적 변화와 양상을 왕궁별로 도식화하여 정치·사회적 의미를 통시적으로 살펴보고자 했다.
그러면 고종은 어떤 사람인가? 먼저 살펴보자.
고종은 조선 후기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이다. 재위 기간은 1863년부터 1907년까지이며 영조의 현손인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다. 흥선군과 익종비 조대비의 묵계 아래 후사가 없던 철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고종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 야욕이 가속되는 가운데 대내적으로는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외척 연합의 대립,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격화하는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가야 했다. 열강들 사이의 외교적 노력과 대한제국 수립 선포 등으로 자주권을 지키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이어 일본의 강요로 퇴위했고 1919년 승하했다.
‘고종’을 설명하는 이 간단한 요약문에서 볼 수 있듯이 고종은 왕실 계보 상, 정통성이 부족했고,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서 10여 년간 대원군의 강력한 섭정하에 있었다. 이때 시행된 소위 서원철폐나 동포제로 대표되는 대원군의 개혁정치는 유림의 반발을 샀고, 대원군에 대항한 문중 내부의 세력도 명성황후를 정점으로 세력 대결에 가담했다. 결국 1874년 청에 의해 대원군이 축출되었지만, 독자적인 정치 기반을 갖지 못한 고종은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일족과 결탁해서 정국을 운영해야 했다. 또한 친정이 시작되면서 맞이한 1876년의 개항과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 속에 이루어진 개화 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다. 1882년의 임오군란과 청나라 군대의 개입, 1884년의 갑신정변, 1894년의 동학혁명과 이를 계기로 발생한 갑오개혁, 청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 이어진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1896년의 고종의 아관파천, 1897년의 대한제국 선포, 1904년 러일전쟁 등으로 한반도의 정세는 숨가쁘게 이어졌다.
이렇게 고종대의 역사는 조선시대 후기와 개화기로 연결된 격변기로서 정치 사회적으로 국내외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많았다. 실제 도서관 분야에서도 전통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중국은 물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된 일본, 그리고 당대의 제국주의 세력인 러시아와 미국 및 유럽을 통해서 근대로 향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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