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는 책
그 책에 대해 소문을 듣거나 기적적으로 필사본을 직접 읽은 자들은 예외 없이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자는 오로지 마르타 수녀뿐이라고 확신했다.
그녀는 죽은 자들뿐만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과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나 문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책을 쓰지 않았다.
2년 전 자신을 종교재판소로 불러들였던 첫 번째 책을 쓰지 않은 것처럼.
그 재판에서 그녀가 얼음보다 더 단단하고 매끈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펜을 쥔 손가락만 겨우 움직여서, 대주교가 들이민 종이 위에 “앞으로 교회의 승인을 받지 않은 글은 절대로 쓰지 않겠다”라고 적었다는 이야기도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가 문맹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부모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 사실을 미리 알아차렸다면 그녀의 부모는 결코 딸을 수도원으로 보내지 않았을 것이고, 수천 권의 책과 수백 가지의 악기와 기이한 천체관측 기구로 가득찬 방에서 그녀가 혼자 지낼 수 있도록, 그녀의 후원자를 자처한 부왕까지 동원해 대주교의 허락을 받아내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라틴어를 가르치지 않았건만 『마태복음』을 술술 읽어내려가던 세 살짜리 딸의 모습을 그녀의 부모는 똑똑히 기억했다.
딸의 멈추지 않는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 주일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수도원의 서고를 드나들 때만 하더라도 부모는 딸의 운명을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딸의 호기심은 곰팡이처럼 거의 모든 사물과 현상에 스며들었다.
제발 밤이 느리게 오기를, 제발 폭우가 너무 오래 이어지지 않기를, 제발 겨울이 빨리 지나가기를, 제발 양초의 심지가 오래 타지 않기를, 제발 초경이 빨리 찾아오기를, 그럴 수 없다면 제발 수도원의 서고가 모두 불타기를 그녀의 부모는 기도했다.
남장을 해서라도 기어이 대학교에 다니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열다섯 살의 딸 앞에서 부모는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결혼을 하느니 차라리 죽음으로 순결을 지키겠다고 맞서는 열여덟 살 딸을 살리려면 수녀가 되는 걸 허락해야 했다.
자신들의 외동딸이 무덤 같은 수도원에 갇혀서 평생 산송장처럼 살아가게 될까봐 부모는 전 재산을 털어 책과 악기와 천체관측기구를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악기는 살아 있는 자들을 이해하는 데 사용됐다.
천체관측 기구를 통해 그녀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거의 하루종일 수도원의 독방에만 머물렀고 미사 시간에도 말석에 앉아 침묵을 지켰으나, 자신의 명성을 숨길 수는 없었다.
특히 그녀가 썼다는 시와 노래 가사는 신자들에게 구원자의 존재를 증명하고 구원에 이르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사용됐다.
성직자들 역시 그녀의 명석함이 『성서』에 내포돼 있는 논리적 모순들을 명쾌하게 해결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 마르타 수녀가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문맹이라니.
펠리페 수사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르타 수녀가 첫번째 책 때문에 혹독한 필화를 겪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펠리페 수사는 그 책의 저자가 그녀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재판 내내 그녀가 일관되게 보여준 냉정함은 감동과 함께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영혼은 어떤 책보다도 더 심오한 것이 아닐까.
그뒤로 오랫동안 그녀를 주의깊게 관찰한 펠리페 수사는 마침내 숨겨진 진실에 도달했다.
누군가가 책에게 말을 걸 때만 비로소 책은 대답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책이 대답을 하는 것은 아니고 위대한 책들만 반응을 하는데, 그 방식은 찰나의 영감과 영원한 침묵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문자에 담기지 않고 여백에 담기기 때문이다.
위대한 영혼을 소유한 자들만 책의 침묵을 듣고 이전 세대의 진리에 감응할 수 있으나, 그것을 이후 세대에 고스란히 전달할 수는 없다.
그 대신 책과 독자와 화자와 등장인물과 저자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독서를 통해 독자뿐만 아니라 책의 운명도 바뀐다는 것이다.
마르타 수녀는 결코 말하지 않는 책이었으나, 그녀만큼 고귀한 영혼을 지니지 못한 자들이 자신의 불순한 의도대로 그녀를 읽고 해석했기 때문에 그녀의 운명은 매 순간 누란지위에 처하고 말았다.
다행히 첫 번째 책은 불태워졌고, 그녀의 운명은 수도원의 독방에 방부 처리됐다.
하지만 여백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 안에서 쉴새없이 진실이 요동쳤다.
그녀가 언제든 책을 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종교재판소는 언제든 그녀를 소환할 수 있고, 또다시 의심받은 성직자를 기다리는 건 화형대의 화염뿐이다.
고귀한 영혼을 지닌 자의 명예를 지켜주고 그를 기억하는 것도 수도자의 사명이다.
그래서 펠리페 수사는 자신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녀의 비밀을 지켜주겠노라고 십자가 앞에서 맹세했다.
자신의 부주의한 처신이 그녀와 그녀의 부모는 물론 그녀를 후원하고 있는 부왕에게까지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대주교는 부왕의 압력에 굴복해 마르타 수녀에게 수천 권의 책과 수백 가지의 악기와 기이한 천체관측 기구를 허락하긴 했지만,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마르타 수녀를 대중 앞에서 희생시킬 것이다.
그리스도의 적이 여자의 형상으로 태어난다는 믿음을 대주교는 단 한순간도 의심한 적이 없다.
그는 고양될 수 있는 영혼은 오직 남자에게만 깃들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남자의 형상으로 이 땅에 왔다는 논리를 신봉했다.
그래서 대주교는 남자로 부활하지 못한 여자를 바리새인처럼 혐오했고, 성직자나 신자 앞에서 강론할 때마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느님이시라’『고린도전서』 11장 3절.라는 문장을 즐겨 인용했다.
대주교의 메시지에 위협을 느낀 일부 수녀들은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붕대로 얼굴 전체를 가린 채 미사에 참석하거나, 방바닥을 혀로 핥고 생리혈을 자신의 몸에 발랐으며, 하녀들에게 채찍을 쥐여주고 속옷 차림으로 침대 위에 엎드리기도 했다.
성령에 의해 태어난 그리스도처럼 자신 역시 어머니의 타락한 육신을 거치지 않은 채 태어났다고 믿은 대주교는 열두 살에 수도원에 들어간 뒤로 지금껏 단 한 번도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신상과 관련된 소문 중에는 그가 귀족인 아버지와 하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어려서 어머니를 살해하려 했다가 실패하자 수도원으로 도망쳤다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세상의 절반인 여자를 혐오하는 자에게 대주교라는 직분은 철갑옷 같았다.
하지만 혐오를 설파할수록 결핍은 더욱 커져갔다.
그리하여 매일 밤 대주교의 방으로 적그리스도가 몰래 찾아왔다가 계명성과 함께 사라졌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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