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사람들
TWO STONES 카페의 밤새 켜져 있는 붉은 네온 간판과 미다스 유통 체인점의 거대한 황금 손가락이 교차되는 골목에서 어른거리던
딱따구리들의 그림자를 나는 잊을 수 없어, 그렇지, 거기서 어슬렁거리던
딱따구리들이 골목 안으로 한 노파를 끌어들였을 때, 그리고 잠시 후 고통에 찬 늙어빠진 후두를 타고 올라오는 숨 가쁜 비명을 들었을 때, 아,
그 노파는 이미 볼품없이 찢긴 상한 고깃덩이에 불과했다. 딱따구리들의 손아귀에서 마침내 골목 밖으로 던져진 노파의
센 머리카락은 마치 은빛 광섬유 다발처럼 보도블록들 위로 펼쳐졌고
흰 저고리는 보잘것없는 비늘 조각처럼 한쪽 어깨에서 벗겨져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처음 알았지, 그때
염색용 헤어스프레이를 뿌려놓은 듯 붉게 물들어가던 그 모습에서, 그 광섬유 다발과 찢어진 비늘 조각에서, 그 비린내 나는 고깃덩이의 모습에서,
피는 얼마나 붉은가, 살갗은 얼마나 흰가, 또 흰 살갗과 붉은 피는 얼마나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는지, 그래,
바로 세상의 모든 혈관들 밖에서. 노파의 목전에 닥친 죽음 앞에서.
그리고 노파는 비 온 뒤 마구 덜컹거리는 포석들을 차근차근 그러잡으며 왈칵 핏덩이와 위액을 토해내고 있었다. 거기,
거기에서, 나의 퐁텐블로에서.
노파에게 힘이 남아 있다면, 새벽의 아스팔트 차도를 기어 건너와 내 발치까지 당도할 수 있으련만. 그러면 나는, 더 자세히 볼 수도 있었다. 노파의 은발을 자근자근 물들여가는 피. 기다렸다는 듯이 피를 빨아올리는 건조한 은빛 머리카락들. 가까운 곳에 파출소가 있었지만 나의 생각은 거기에까지 달려가지 못했다. 그저 이제 막
차도로 몸뚱이를 내려서는 노파를 더 잘 보기 위해 목을 빼었을 뿐. 그때, 보았던가, 허리께에서 마치 나를 부르듯이, 나의 퐁텐블로를 불러 세우듯이.
아주 천천히 흔들리며 솟아오르던 그것. 손목이 뜯어진 그 늙은 팔뚝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떨면서,
파르르 경련하면서 경고등처럼, 붉은 경고등처럼 파르르, 경련하면서.
그리고 골목 안에서는 딱따구리, 그 빌어먹을 것들이 느릿느릿 어깨를 흔들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딱따구리들은,
이미 푸르스름하게 내려 거리를 흘러 통과해가기 시작한 새벽빛을 언짢아하듯, 비틀거리는 몸을 더럽기 그지없는 빌딩 벽에 기대고 몇 분을 더 거기에 머물렀다. 나는 알고 있었지,
그것들은 아직은 추운 새벽 날씨 때문에 타액과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얼굴로 끊임없이 훌쩍, 훌쩍거리고 있었고.
하지만 누군가 그 훌쩍거림들이 그 어떤 죄책감이나 저지른 일로 인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반박할 것이다. 이봐,
저들이 누군지 알아? 어디에서, 무엇으로 태어났는지 알아? 저들의 태생을 알아?
아이들처럼 순수하고 무심한 딱따구리들의 발치에는 몇 점의 핏덩이가 흙탕물과 함께 끈끈이처럼 굳어가고 있었고, 하지만 딱따구리들은 여전히
그저 지루하고 의미 없는 심심하다는 표정으로, 추위에 떨며 타액과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된 얼굴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느린 걸음으로 골목 너머로 사라졌던 거야. 그래,
그 새끼들이 돌아왔어, 난 저 빌어먹을 것들을 알아, 저 빌어먹을 것들의 태생을 알아, 그리고
딱따구리들이 오래전에 잊힌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낸 바로 그 골목 높은 곳에선 여전히
미다스 유통 체인점의 거대한 황금 손가락과 TWO STONES 카페의 두 쪽으로 갈라진 붉은 네온 간판 입술이 파르르 스파크를 일으키며, 경련하며 새벽 하늘을 뚫고 솟아올라 있었다.
*
잠에서 깨자마자 우리는 갑자기, 격렬한 외로움을 느꼈다……
창밖 거리는 새벽 비에 젖어 온통 검푸르게 빛난다. K는 워드프로세서의 액정 모니터에 찍힌 글의 첫 문장을 읽는다. 침침하고, 할로겐 스탠드 불빛엔 잘 읽을 수 없다. K는 손을 뻗어 형광등을 켤까 잠시 망설이다 창 쪽으로 다시 돌아선다. 뭘까? 손으로 이마를 짚는다. 열로 부풀어 오르는 듯하다. 혹처럼 부풀고……
폭발할 것처럼 아파온다. K는 잠시 기우뚱 비틀거렸다가 바로 선다. 뭘까, 무엇이 내 워드프로세서에 저 글을 찍어놓고 갔을까? K는 물끄러미 제 손가락들을 내려다본다. 열 손가락 끝마다 감당할 수 없을 만치 육중한 무엇들이 매달려 있는 듯하다. 지겨워…… K는 중얼거린다, 지긋지긋해……
그리고 K는 잠시, 서서 웃는다. 뻣뻣하게 튼 두 뺨에 흘러내리는 두 줄기 물기가 느껴진다. 혀로 입술을 적신다. 갈라진 틈새들이 짜릿짜릿하게 아파온다. 손가락은 아직 얌전히들 붙어 있다. 하지만, 하고 K는 생각한다. 그것들이 발작하기 시작할 때……
K는 워드프로세서를 돌아본다. 손가락들이 다시 발광하기 시작할 때, 마구, 자판 위 80개 키 위에서 발광하기 시작할 때, 미친 듯 그것들이 춤추기 시작할 때……
K는 고개를 젓는다. 뭘까, 무엇이 내 워드프로세서에 저것을 찍어놓고 갔을까? 다시 손가락들을 내려다본다. 열 손가락이 나직이 뭔가에 대해 속삭이듯 꿈틀한다. 다시 고개를 젓고 창밖을 향한다. 창밖 열 지은 수은등들이 가는 빗줄기들 속에서 뭔가에 질린 듯한 표정으로 가볍게 떨고 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