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재발명하기
오직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 어떻게 사랑을 지속할 것인가이다.
― 톰 로빈스, 『딱따구리가 있는 정물화』
이 책은 사랑 ― 낭만적 사랑 ― 에 관한 책이다. 사랑은 많이 예찬되고, 종종 조소와 비판을 받으며, 사람들이 절박하게 찾고 갈망하지만, ― 결과적으로 ― 많이 오해받고 있는 감정이다. 생각과 기대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오해는 실제 행동에서는 실망과 비극을 낳는다. 우리는 사랑에 관해 역설적인 견해를 키워왔고, 그 결과 지속하는 사랑은 모호하고 힘들며, 심지어 미스터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덧없는 경험일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사랑을 정의하면서, 왜 사랑이 지속되지 않는지 ― 가끔은 아주 쓰라리게 ― 의아해한다. 우리는 사랑을 “느낌”이라고 주장하면서 느낌처럼 덧없는 것이 거품처럼 사라진다고 불평한다. 우리는 사랑을 열정이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열정적인 것이 사라진다고 실망한다. 우리는 연애를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새로운 것은 결국 낡는다고 반대한다. 우리는 “젊은 사랑”을 찬양하면서 왜 우리가 나이들어서 하는 사랑에는 곤란을 겪는지 의아해한다. 이와 함께 우리는 사랑을 지속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식으로 사랑을 이상화한다. 이를테면 사랑보다 자아와 더 많이 연관되는 감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데도 우리는 사랑이 온전히 이타적이어야 한다고 배운다. 또한 사랑에서 우리를 매혹시키는 가치와 사랑을 움직이는 덕성 사이에는 실질적인 갈등이 존재하며, 이 갈등은 지속할 수 있는 사랑과는 상충相衝하는 연애와 낭만적 매혹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가장 나쁜 것은 사랑이란 역사를 통틀어 발명되고 재발명되는 것임에도 우리는 사랑이 영원하다고 배운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실제로 사랑은 언제나 열린 질문이며 개인적 책임의 문제이지만, 우리는 사랑이 진정으로 발견되기만 하면 사실상 보증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사랑을 지속할 수 있을까? 사랑은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 자신의 토대를 세우는 감정적 과정이라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사랑은 일시적인 느낌이나 열정이 아니며, 최초의 끌림과 젊은 첫사랑이라는 한정된 용어로 생각되어서도 안 된다. 또한 사랑을 과도하게 길들이거나 이상화해서도 안 된다. 사랑이 지속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사랑을 오해하고, 사랑에 관심을 잃고,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직업적 커리어career와 반복되는 일상으로 사랑을 질식시키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랑이 자신을 중요한 것으로 인정할 때, 사랑이 자신의 어려움에 직면할 때, 사랑이 열정이 아니라 과정으로 자신을 이해할 때 지속된다. 이 책은 어떻게 사랑이 지속되는가를 다루는 책이지만, 무엇보다 먼저 사랑이 무엇인가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은 우리 대부분이 마주했거나 마주하게 될 가장 환희에 찬 ― 또한 종종 가장 고통스럽고 파괴적인 ― 경험이다. 사랑은 오랫동안 종교적 경험으로 여겨졌는데, 이런 생각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의 본질은 진정한 종교의 본질만큼이나 다루기 힘들고 신학적인 문제가 되어 버렸다. 플라톤이 “에로스”라고 불리는 범박泛博한 가정의 신을 신적인 위상으로 격상시키고 그것을 일반적인 인간의 사랑과 확연히 구별한 다음부터 사랑에 대한 과도한 이상화와 성관계 및 그 변형 형태에 대해 보다 덜 천상적이고 더 평범한 사실 사이에는 해소할 수 없는 긴장이 존재해왔다. 사랑은 너무 자주 “신적인” 것으로 찬양되어 왔으며, 사랑의 화려한 측면은 인간의 욕망과 감정의 한계를 넘어서는 ― 무한히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면 ― 용어들로 설명되어왔다. 오늘날 우리가 사랑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사이에서,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사랑의 효용성과 “진정한 사랑”의 희소성과 어려움 사이에서 분열되어 왔다. 우리는 기적을 원하고 기적을 당연한 것으로 기대한다.
그리고 기적은 항상 일어난다. 미국에서만 매일 밤 6천 명의 10대들이 새롭게 사랑의 행위 ― 아직 사랑의 기술이 아니라면 ― 속으로 입문한다. 미국에서만 매일 6천 명이 이혼하고, 6천 개의 사랑이 법적으로 종료된다. (이 수치는 톰 파커Tom Parker의 『하루 만에』에 나온다.) 이 수치는 사랑과 이혼의 상관 관계를 보여주는 통계이다. 이 수치는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수치는 선거 여론조사와 성공 타율이라는, 진리를 파악하는 20세기 고유의 통계적 언어로 사태를 정확히 맞추고 있다. 우리가 놀라는 것은 사랑의 신비가 아니라 그 낯익음이며, 사랑이 압도적으로 보여주는 범속함이다. 사랑은 이따금 등장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강타하는 희귀한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느낌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들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가족은 그렇게 불운하지 않으며, 이들의 사랑도 비극적이라기보다는 안락하고 희극적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지속하는 일에 가장 많이 곤란을 겪는 이들은 사랑에 가장 적합하고, 사랑에 대해 가장 사려 깊고 양심적인 생각을 갖고 있으며, 인생 전반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들인 것 같다.
우리의 당면 문제와 역설은 우리가 사랑에 집착하면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사랑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더 이상 성찰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행복과 마찬가지로 사랑은 사랑을 너무 압박하지 않는 사람들, 사랑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않는 사람들, 안달복달하며 사랑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 쉽게 다가온다. 우리는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에 너무 많은 것들을 쑤셔넣고, 우리가 실망할 수밖에 없는 “진짜”를 너무 많이 요구한다.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몇 주 후에 (혹은 몇 년 뒤에) 사랑이 끝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은 사랑이 가능하다는 증거 ― 이를테면 환희, 진심 어린 헌신, 서로가 공유하는 흥분과 신뢰, 누군가와 진정으로 나누는 경이로움 같은 것 ― 를 마련해준다. 그러나 너무나 자주 사랑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이보다 훨씬 더 자주 사랑은 시작되지도 않는다. 그에 따라 우리는 당연히 실망하고 환멸과 비통함에 빠진다. 우리는 배반의 감정과 함께 사랑 자체가 환영이고 환상일 뿐이며, 사랑은 선동이거나 장치이거나 음모라고 서둘러 결론 짓는다. 이런 결론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더 유행하고 더 파괴적인 것은 사랑은 괜찮지만, 남자와 여자는 괜찮지 않다고 결론짓는 것이다. 이런 식의 대응은 지혜의 수준으로 들어올려진 좌절이자, 정치성의 수준으로 격상된 유아적 분노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비난을 계속할 수는 없다. 몇 주나 몇 달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찾는다. 우리는 무엇을 찾고 무엇을 갈망하는가? 우리가 찾으라고 배웠던 것이 정말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인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권위 있는 사랑 개념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 반대로 나는 사랑은 사적이고 개인적이며, 그에 따라 우리 각자는 자신의 욕구와 환경에 맞게 사랑을 재발명하는 일에 기여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환희에 가득차고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낭만적 연애와 안정되고 행복한 결혼 중 어느 것이 나은가?와 같은 질문에 최종적인 해답을 내놓을 수는 없다. 언쟁하는 커플, 사랑을 돌려받기보다는 짝사랑을 더 좋아하는 낭만주의자, 다른 방식으로는 해결하지 못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섹스를 이용하는 커플, 흥분과 성적 열정보다 고요함과 정숙함을 더 좋아하는 커플을 비난할 독단적인 이유는 없다. 내가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가능할 뿐 아니라 이런 형태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요인과 심층구조를 탐구하는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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