펴내며
근대 문학의 ‘장소들’이 보여주는
지난날 우리가 꾸었던 꿈
외부로 빠져나가는 하늘길이 막혀 있다시피 한 동안, 그러니까 자영업자들과 소상공인들이 계속되는 사회적 거리두기에 진절머리를 치고,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들의 노고에 보내던 격려의 박수마저 차츰 시들해지는 동안, 나는 하루의 꽤 많은 시간을 책을 읽으며 보냈다.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던 숙제 때문이었다. 비대면의 세월이 외려 기회로 다가왔다.
문학을 통해 아시아의 근대를 읽어보자는 게 내 오랜 관심이었는데, 이번에는 특히 한국 근대 문학사의 ‘풍경’이 내 주제였다. 어떤 논리적 맥락에 따라 그 시대의 숨은 의미를 찾아낸다든지 하는 것은 처음부터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나는 대체 우리 문학의 근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을 뿐이다. 당장은 말 그대로 풍경화였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이 제일 먼저 떠오르고, 이어 죄인처럼 수그리고 코끼리처럼 말이 없던 이용악의 두만강이나 어느 날 소설가 구보 씨가 하루 종일 돌아다녔던 식민지 서울의 도처처럼 우리 문학의 무대로서 뚜렷한 아우라를 지닌 ‘장소들’이 떠오른 건 당연한 절차였다. 전략 같은 건 없었다. 있다면 오직 하나, 나는 마치 A부터 Z까지 도서관의 책들을 모조리 읽자고 달려든,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 나오는 독서광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전략을 세웠다. 그러다 보니 때로 책은 읽지 않고 숫제 눈에 띄는 대로 지명에만 밑줄을 긋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헛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나는 물론 우리 문학의 근대를 꾸려온 선배 작가들이 실은 그 근대를 당혹으로 맞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건 결코 행복한 경험이 아니었다. 나라를 빼앗긴 수모에 가공할 물리적 폭력과 상상조차 힘들 만큼 끔찍한 빈곤이 언제까지고 그들을 쫓아다녔다.
그럼에도, 고백하건대, 코로나 시대의 내 독서는 더없이 행복했다.
가령 이런 장면:
이태준은 1930년대 중반에 쓴 장편 『성모』에서 지금으로선 꽤 낯선 교실의 풍경을 그려낸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철진이가 엄마에게 자기네 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아예 지리부도까지 펴놓고 침을 튀기는 것이었다.
“엄마? 우리 반에 글쎄 여기 이 제주도서 온 아이두 있구 또 나허구 같이 앉었는 아인 함경북도 온성서 온 아이야. 뭐 경상남도 진주, 마산, 부산서도 오구 평안북도 신의주, 그리구 저 강계서 온 아이두 있는데 걘 글쎄 자동차루, 이틀이나 나와서 차를 탄대…. 퍽 멀지, 엄마?”
지도를 거침없이 짚어가는 그 손가락이 퍽 부러울 뿐이다.
한설야는 고향인 함흥을 떠나 서울에 유학을 왔다가 말 때문에 멀미를 내고 만다. 서울 말씨를 쓰는 치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제주도에서 유학을 온 동급생하고는 어떻게 말을 섞어야 할지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태준의 등단작 「오몽녀」1925의 등장인물들은 마치 외국말과 다름없는 함경도 육진 방언을 친절한 각주 하나 없이 마구 토해낸다. 어디 말만 그러한가. 눈은 또 어떠한가. 서울에 내리는 눈은 눈도 아니었다. 한설야보다도 더 먼 함경북도 성진 출신의 김기림은 서울에 와서는 제 고향에서처럼 틱 틱 틱 하늘을 가득 채우면서 아쉬움 없이 퍼붓던 주먹 덩이와 같은 눈송이를 본 적이 없노라 했다. 김남천이 벗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다가 마주친, 고향 평안남도 성천의 눈 내리던 어느 밤의 풍경은 이제는 그때 그 자리를 함께했다는 어린 기생만큼이나 오직 아득할 따름이다. 나는 그런 드물고 귀한 풍경들을 하나하나 주워내서는 퍼즐처럼 무엇인가 커다란 그림을 짜 맞추는 내 작업에 꽤 보람을 느꼈다.
당대의 많은 작가들에게 ‘장소’는 분명 문학적 상상력의 한 토대였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즐거운 회상만 뒤에 남기는 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노상 〈평양성도〉 따위 병풍 그림으로나 보던 것을 1909년에야 겨우 기차를 타고 가 처음 눈에 담을 때 최남선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그 잘난 우리 님’으로서 평양이, 1931년 화교 배척 폭동 당시 김동인이 직접 목격한 참으로 황망하고 또 처참하기 짝이 없던 그의 고향 평양하고는 도무지 같은 도시일 리 없었다. 이광수는 자하문 밖 산자락에 집을 짓고 또 파는 과정에서 세상사 큰 이치를 깨달았다고 썼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어려서 죽은 아들에 대한 추억까지 끌어내 조선인의 징병을 권장한 그가 보여준 쓸쓸한 뒷모습도 기억해야 한다.
나는 혼자서 북악을 거슬러가며 집으로 가는 길을 더듬었다. 전차도 훨씬 전에 끊겼으며, 큰길은 전선에 울리는 바람소리와 나 자신의 구두소리뿐이었다.
내 마음은 봉일의 추억으로 꽉 차 있었지만, 그게 꼭 슬픔만은 아니었다.
“군인이 될 수 있다. 군인이 될 수 있다고.”
나는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목소리를 높여, “군인이 될 수 있다”고 외쳐보았다.
이광수의 그 군인이 대체 누구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게 될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이 책을 쓰게 된 내 최초의 관심이 우리 ‘땅’에 대한 것 이상으로 우리 ‘문학’에 대한 그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밝혀야 한다. ‘도쿄 편’이 이를 설명해준다. 도쿄—엄밀한 의미에서는 ‘동경’이라는 기표—는 싫든 좋든 우리 근대 문학의 자궁 같은 곳이었다. 사실 우리의 근대는 수신사를 파견하던 시절 이후 도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근대 문학사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 거의 대부분의 주요 작가들 역시 도쿄를 통해 어떤 형태로든 문학과 인연을 맺게 된다. 가령 최남선이 처음 가서 보고 기겁한 도쿄는 서울에서 말 그대로 대롱으로만 보던 것하고는 전혀 딴판 세상이었다. 그런 충격과 경탄이 『소년』의 발간으로, 또 거기 실은 우리 문학사 최초의 신체시로 이어졌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아직 학생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 이광수 역시 『소년』과 그에 이은 『청춘』의 주요 필진이었다. 두 사람은 도쿄에서 처음 맺은 인연을 한 40년 좋이 이어간다. 그 인연의 절정 또한 도쿄를 빼고 말할 수 없다. 1944년 그들이 새삼 도쿄까지 건너가 나눈 대담의 기록이 실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조선을 대표하는 두 지성인은 도쿄에서 공부하는 조선의 청년 학도들을 향해 “조선이란 점에 너무 집착하는 모습”을 벗어나 “대동아의 중심이자 중심인물이 된다는 기백”을 지닐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같은 지면에서 그들은 처음 도쿄에 와 문학에 눈을 뜨던 시절부터 새삼 회상을 이어나가는 가운데, 몇십 년을 ‘국어일본어’로 글을 써오긴 했으나 ‘외국인’으로서 흉내 내기가 가능할지 근본적으로 의문이라는 속내 또한 솔직히 드러낸다.
처음에는 서울과 도쿄에 북방 편을 보태 총 세 권을 써내자 했다. 남한의 다른 지역들은 일찌감치 제외했다. 가령 삼남 지역이라면 기왕에 나온 책들이 적지 않은 데다, 내가 특별히 무엇을 보탤 재주와 능력도 없다고 판단했다. 반은 농담이지만, 그곳을 고향으로 둔 많은 동료 작가들이 보낼 지청구와 핀잔도 조금은 겁이 났다. 같은 이유에서, 적어도 서울에 대해서만큼은 내 나름의 이야기를 들려줄 필요가 있었다. 특히 도쿄에 대해서 쓰기로 작정한 이상 그 짝으로서도 반드시 잘 써야 한다고 다짐했다. 서울 대 도쿄, 우리 문학사라는 링에서 벌어지는 두 도시의 흥미진진한 대결을 나 스스로 고대했다. 나머지 하나는 당연히 휴전선 너머 금단의 땅이었다. 북한, 북녘, 북쪽, 북방 따위로 이름부터 골치가 아파도, 사실 그곳을 빼곤 처음부터 이 책을 쓰자고 덤벼들 이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일단 ‘북방’이라는 이름을 염두에 두고 시작했다. 하나, 작품들은 물론 여러 가지 관련 자료들을 두루 찾아내 읽는 동안 욕심은 점점 커졌다. 그곳 출신 작가들이 먼저 애를 태웠다. 문학사의 한 귀퉁이에 이름 석 자를 겨우 올린 작가들일수록 건 몸이 달아 내 소매를 세게 잡아끌었다. 놀랍게도 그들이 신문, 잡지에 쓴 원고지 몇 장짜리 수필 하나에서 전혀 뜻밖의 보물을 발견할 때가 많았다. 만주로 이민을 떠나는 동포들의 가긍한 처지를 기록한 이찬의 짧은 산문 한 편은, 시인에게는 미안한 말이겠지만, 그가 쓴 어떤 시 못지않게 깊은 울림을 전해주었다. 지금 우리가 쉽게 접하기 어려운 지역일수록 한두 사람의 작가가 남긴 드문 자취에 눈이 번쩍 뜨이곤 했다. 가령 이정호의 개마고원과 강계, 김만선의 신의주 따위가 그러했다. 고향이 그곳이든 아니면 어쩌다 한번 지나는 여행길이었대도 작가들은 이리 수군 저리 소곤 애타는 마음을 드러냈다. 결국 북방 편을 한 권에 담아내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옮겨야 할 이야기도 많거니와 우리의 눈길을 벗어나 점점 더 아득히 사라지는 그 땅에 대해서 좀 더 넉넉히 지면을 나누는 것이 의무인 양 내 어깨를 눌렀다. 이제 누구든 쉽게 통일을 해서 뭘 하느냐고 말하는 게 대세가 되었다. 사실 통일은 사서 고생일지 모르고, 해도 당장 땅장사에 난개발이 크나큰 시름이리라. 남녘 땅 사람들의 이런 심리적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휴전선 너머는 21세기도 이렇게나 시간이 흘렀는데 여전히 철옹성이다. 진달래꽃이 피고 지던 소월의 그 영변이 이제는 끔찍하게도 핵으로만 기억된다. 이럴진대 100년 전 백석이 함흥 영생고보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는지, 또 제 고향 평안도에 가서는 다시 이름도 생소한 팔원 땅에서 추운 겨울날 손등이 죄 터진 주재소장 집 가련한 애보개 소녀를 만났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가 무슨 대수란 말인가.
하더라도 그게 미국도 중국도 일본도 아닌, 바로 우리 땅이고 우리 문학이었다. 나는, 쓸데없이 근심이 많아선지, 나마저 외면하면 그 땅과 그 문학이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초조했다. 게다가 그 땅은, 어지간히 넓기도 해라! 나는 마침내 황해도를 포기하는 대신 평안도와 함경도를 따로 떼어내는 것으로 내 초조를 달랬다.
물론 근대 문학의 ‘장소들’은 내가 다룬 범위보다 훨씬 더 넓다. 예컨대 우리 문학사의 ‘북방’만 해도 비단 휴전선 이북에서 압록강, 두만강 두 강 이남까지로 제한되지 않는다. 산해관 너머 중국은 물론, 하얼빈이라든지 시베리아, 심지어 중앙아시아의 차디찬 초원에도 우리 작가들이 남긴 발자취가 생생하다. 오직 내 능력과 여건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다. 다음을 기할 수밖에.
돌이켜보면 버겁고 험한 여정이었지만, 내가 어떤 길잡이도 없이 무작정 길을 떠나온 건 아니었다. 내 머릿속 항로에는 꽤 오래전부터 한 권의 책이 등대처럼 빛을 던져주고 있었다. E. 사이덴스티커의 『도쿄 이야기』. 저명한 일본학자로서 그는 『일본문학사』를 쓴 도널드 킨과 더불어 일본 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흔히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번역해 그가 일본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번역가로 알려졌지만, 내게는 『도쿄 이야기』의 저자로 각별한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1923년 도쿄를 잿더미로 만든 관동 대지진으로부터 시작되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때는 아직 도쿄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처지에서도, 도쿄가 어떤 도시인지 그 지리적·역사적 배경까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에도에서 도쿄로 환골탈태한 거대 도시의 이면을 읽어내기 위해 자신이 특히 좋아한 한 사람의 작가에게 많은 걸 기댔는데 그것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나는 그때 나가이 가후가 누군지도 몰랐지만, 그 후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온 그의 소설들과 산문집을 통해 새삼 그가 일본 근대 문학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나가이 가후는 평생 박쥐우산을 들고 도쿄의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볐다. 하지만 산책자로서 그의 발길이 닿은 곳은 사실 도쿄가 아니었다. 그는 변화와 미래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에도의 흔적만을 고집스럽게 찾아다녔을 뿐이다. 그의 그런 괴벽에 별로 관심이 없더라도, 가령 대지진이 휩쓸고 간 제국의 수도를 바라보면서 그 처참한 폐허가 실은 끝 모르고 내닫던 교만과 탐욕의 결과로서 자업자득의 천벌이라 그가 질타할 때, 그 목소리1923년 10월 3일 일기에는 충분히 귀를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다.
아쉽게도 나는 썩 마음에 드는 그런 식의 서울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없었다. 호암 문일평이나 조풍연, 이규태 같은 이들의 노작勞作에 문학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했더라면 하는 게 내 아쉬움이었다. 어쨌거나 일을 저질렀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한다는 눈총이 왜 아니 두렵겠는가. 하더라도 전문 연구자가 아니라 소설가라서 외려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집필 과정에서 스스로 배운 바가 적지 않다. 더러는 지난날 선배 작가들이 꾸었던 황홀한 꿈을 함께 꾸었고, 훨씬 많이는 그들이 시도 때도 없이 맞닥뜨렸던 간난신고에 더불어 눈물을 훔치고 더불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도 역사책에 남은 굵은 고딕체 사건들 사이로 빠져나간 장삼이사 갑남을녀들의 무수한 삶의 편린들이 그들의 펜 끝을 통해 훌륭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보고 감개에 젖기도 했다. 알고 보니,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은 장소들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던 것이다.
전체를 관통하는 제목을 감히 『한국 근대 문학 기행』이라 붙였다. 대상이 되는 시기를 한국 문학의 ‘근대’로 국한했음을 거듭 밝힌다. ‘고대’는 아예 내 능력 밖이고, ‘현대’에 대해서도 뭐라도 말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
당장 가까운 벗들과 함께 서울을 여기저기 누비면서 ‘서울편’, 즉 『한국 근대 문학 기행: 서울 이야기』에 대한 품평부터 듣고 싶다. 도쿄로 가는 하늘길이 열렸으니 내가 활자로만 더듬었던 지역도 두 발로 천천히 짚고 다닐 기회가 생길 것이다. 가령 동아시아 3국의 근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 이광수와 나쓰메 소세키와 루쉰이 짧게나마 한 도시 한 하늘 아래 지냈다는 건 어쨌든 의미 있는 문학적 ‘사변’이 아닐 수 없다. 그 사변의 뜻을 독자들과 더불어 새기고 싶다. 그래도 내 가장 큰 꿈은 따로 있으니, 휴전선 너머 동해를 오른쪽으로 끼고 내달리는 함경선 기차를 타고 북상하면 띄엄띄엄 정거장마다 나와 이제나저제나 하고 어리숭한 후배 작가를 기다리고 있을 한설야, 이북명, 안수길, 김기림, 최서해, 김광섭, 현경준, 최정희, 이용악 같은 선배 작가들을 만나고, 또 문산에서 끊어진 경의선 철도를 이어나가면 마침내 평양은 물론이고 성천, 개천, 정주, 삭주, 구성, 희천, 강계, 초산, 벽동, 의주 따위 이름조차 낯설고 그래서 더 아름다운 고장들을 두루 만나는 것!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선, 지난날 우리가 꾸었던 꿈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살피고 묻는 것으로 시작하는 도리밖에 없다.
이래저래 ‘이야기’가 답이다.
내 무모한 용기에 대한 격려와 함께 교만과 무지에 대해서도 많은 질정을 부탁드린다.
2023년 봄
김포에서 김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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