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법의 약속
1497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쿠 다가마Vasco da Gama는 선단을 이끌고 희망봉을 거쳐 인도양으로 나아갔다. 그는 동양의 발전된 무역망에 합류하기 위해 항로를 개척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행은 상업과 기술이 광범위하게 발전하고 복잡한 통치 구조 및 법률이 존재하는 풍요롭고 세련된 아시아 세계에 유럽인들이 눈을 뜨는 계기가 됐다.
포르투갈인들은 인도 서부 해안의 캘리컷Calicut에 정박했는데 그곳에서는 매일 향료제도Spice Islands, 인도 대평원, 동아프리카, 아라비아만을 오가는 선박을 통해 곡물, 설탕, 향신료, 커피, 직물, 금속, 말 등의 교역이 이뤄졌다. 바스쿠 다가마는 이 거래에 참여하고자 캘리컷의 통치자인 자모린Zamorin의 궁정을 찾아가 무역을 청했는데, 선물이 그다지 눈에 차지 않았던 자모린은 그의 선단을 쫓아냈다. 그럼에도 포르투갈은 계속해서 인도행 선단을 보냈고, 현지인과 마찰을 겪는 등 우여곡절 끝에 인도 해안에 교역소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바스쿠 다가마와 동행했던 상인들과 모험가들은 중국 상인들이 가져온 물품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또한 이스파한과 델리에 있는 이슬람 궁정의 호화로움과 세련미에 매료됐으며, 기록으로 남겨진 고대 아시아 법률에 흥미를 느꼈다. 머나먼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서 중국 통치자들은 기원전 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법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자모린은 다른 힌두교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종교학자와 브라만에게 조언을 받았는데, 이들은 다르마샤스트라Dharmashastra라는 법전을 기반으로 했다. 이 수백 년 된 법률 텍스트는 인도 베다Vedas 시대의 철학과 의식 전통에서 기원한 것이었다. 이슬람 법률 전문가들은 7세기에 무함마드Muhammad의 계시에 근거한 광범위한 문언적 법체계를 따랐다. 술탄의 법정에서는 숙련된 판관들이 재판했고, 학자들은 법적 의견을 제시했으며, 법학자들은 고대 법률 텍스트를 두고 심오한 논쟁을 벌였다. 당시 유럽은 법적 정교함에서 이들과 비교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의 법은 여전히 로마 법학의 잔재가 남아 있는 이질적인 지역 관습과 법원의 집합체에 불과했다.
그런데 18세기 초에 이르자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중국에는 청나라라는 강력한 새 왕조가 들어섰고, 무굴제국의 황제인 샤자한Shah Jahan은 타지마할을 건설하고 인도 전역에 도로망을 확장했으며, 오스만제국은 오스트리아 지역의 빈을 위협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아시아 체제는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프랑스의 법철학자 몽테스키외Montesquieu는 중국의 정교하고 안정적인 법 제도에 감탄하면서도 이를 ‘전제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유럽 통치자들에게 그들의 정치체제는 가장 합리적인 원칙을 따르고 그들의 법은 사적 소유권의 우월한 체제를 장려한다고 믿게 했다. 그리고 산업적·군사적 성취가 아시아를 능가하면서 유럽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정치, 교육, 법률 체계가 세계 최고임을 확신하게 됐다. 그들은 이슬람 법률가들과 힌두교 브라만들의 복잡한 학문과 중국의 정교한 법전을 퇴보한 동양의 비합리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제도로 간주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존재하는 법체계 대부분은 18세기와 19세기에 유럽 국가들이 개발한 제도를 본뜨고 있다. 200년의 식민 통치 기간에 유럽 국가들은 자신들의 법을 전 세계에 전파하고 시행했으며, 국가 단위의 새로운 국제질서를 촉진했다. 오늘날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국가들은 민주주의, 인권, 법치주의를 옹호할 뿐만 아니라 법과 재판 체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인류 문명의 긴 역사 속에서 국가와 국가법state law 질서가 출현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에 불과하다. 유럽인들은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오래된 법체계를 폐기했으며, 로마인들 역시 판례에 따라 판단하기도 했다. 즉,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법체계 대부분이 취하는 형태에서 필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역사를 통틀어 법 대부분은 현대 국가에서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법과는 매우 달랐다. 우선, 법이 항상 영토의 경계를 인정한 것은 아니다. 종종 법은 상인이나 종교학자를 통해 새로운 땅으로 전파됐으며, 그곳에서 일반적으로 지역 관습 및 규칙과 공존했다. 더욱이 법과 종교가 구별되지 않는 경우도 흔했다. 특히 힌두교, 유대교, 이슬람교 전통에서 법적 규칙은 도덕적·종교적 지침과 차이가 없을 정도로 융합됐다. 그러다 보니 고대의 많은 법, 심지어 아주 최근의 법도 효율성·권위·효능이라는 명백한 기본적 요건을 무시하기도 했고, 역사적으로 많은 판관이 통치자들의 법을 무시했으며, 많은 법이 집행되지 않았다. 이처럼 사회를 원활히 운영하는 데 이바지하는 바가 거의 없었던 매우 비현실적인 규칙들도 값비싼 양피지에 조심스럽게 쓰이거나 석판에 새겨졌다. 역사가들은 고대법이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계속해서 의아해했는데, 때때로 고대법은 더 오래되거나 더 큰 문명을 모방하려는 시도에 불과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바스쿠 다가마가 마주친 중국 무역상, 인도반도 지역의 왕, 이슬람 술탄은 고대 법체계의 규칙을 존중했다. 그들의 법은 4000년 전에 처음 등장한 이래 반복적으로 채택된 기술의 최신 예일 뿐이었다.
가장 오래된 법은 지금의 이라크 지역인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있는 비옥한 땅인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들어졌다. 기원전 3000년 우르Ur의 왕은 백성들에게 정의를 약속하는 선언을 하고, 서기관들에게 점토판에 법전을 기록하라고 명령했다. 몇 세기 후 중국 중부 지역의 호전적인 지도자들은 대나무 조각과 청동 그릇에 표의문자를 새겼는데, 여기에는 범죄와 처벌에 대한 긴 목록이 적혀 있었다. 그들의 후계자들은 팽창하는 제국의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규율을 부과하기 위해 같은 방법을 채택했다. 한편 갠지스 평원에서는 인도 학자들이 베다의 고대 지혜를 바탕으로 의례에 관한 문서를 만들었다. 기원후 초창기에, 브라만은 힌두법의 기본 텍스트인 다르마샤스트라를 만들기 위해 야자수 잎에 산스크리트 문자를 새겼다. 그들의 후계자들은 남아시아 전역을 여행하면서 캘리컷의 자모린과 같은 통치자들에게 자신들의 의례를 따르고 다르마샤스트라를 법전으로 채택하라고 설득했으며, 신도들을 도덕적인 길로 인도하고자 했다.
메소포타미아, 중국, 인도에서 발전한 기본 법체계는 언어, 논리, 목적 면에서 각각 다르다. 메소포타미아 왕들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보통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규칙을 제시하면서 백성들에게 정의를 약속했고, 중국 통치자들은 확장되는 영토에서도 규율과 질서를 세우기 위해 범죄와 형벌 체계를 확립했으며, 힌두교 브라만은 종교적 전통의 우주적 질서인 다르마dharma의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고자 했다. 이 세 가지 법체계는 각각의 고유성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모든 법이 채택한 형식에 영향을 줬다. 오늘날 세계를 주도하는 법체계들은 이 세 가지 법이 가진 요소를 모두 결합하고 있는데, 이는 현대 국가의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 세기 동안은 이런 성과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 기간에 법적 기술은 세계곳곳에서 왕들과 통치자들에게 제각기 다른 야망을 심었다. 그리고 군주, 회의, 마을 사람들, 부족민들에게는 법적 기술이 훨씬 더 지역적인 맥락에서 받아들여졌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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