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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내가 아직도 살아 있음에 놀란다
어렸을 때 알고 지냈던 사람들과 뜻밖에도 종종 마주치곤 한다. 그들은 성인이 된 내 모습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열이면 열, 이 세상에 아직도 살아 있는 나를 보고 무척 놀란다. 하지만 세상의 예의범절에 익숙해 있는 그들은 놀라움을 숨기려 애쓴다. 덕분에 그들은 머릿속에 가장 먼저 스치는 ‘네가 아직도 살아 있었니?’라는 생각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대신, 잠깐의 피할 수 없는 침묵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그들을 놀라게 한, 그때의 나는 어떠했는가. 중학교 시절, 나는 철학 선생님이 해 준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 선생님은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긴 머리를 짧게 자른 후 욕조 속으로 깊숙이 몸을 담갔다. 그 순간, 순결해지는 것을 느꼈다. 선생님은 그 행위를 일종의 정화 의식으로 해석했다. 각종 의식과 의례에 관심이 많던 선생님의 수업 시간은 자주 진지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당시 너무나 진지하고 심각했던 열네 살 소년이었던 나는 그런 선생님의 수업을 깊이 음미했다. 나는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싶었다. 내가 그토록 배움에 열망했던 것은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철학 선생님은 내게 ‘리미널 페이즈Liminal phase’라는 단어를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서로 다른 두 세계 사이의 지점으로, 통과의례 중 가장 상처받기 쉽고 취약한 부분을 의미한다. 그것은 어른도 어린이도 아닌 시점에 이른 청소년, 아직 이 세상을 완전히 떠나지 못한 망자가 속한 세계다. 이 세계에서는 자칫 잘못하면 모든 것이 어긋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진정으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는 이 변화를 거쳐야 진정한 자아를 형성할 수 있다. 이 단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제자리걸음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옛 철학 선생님과 한 컨퍼런스에서 마주쳤다. 선생님은 뒤늦게 공부를 다시 시작해 고대 북유럽 신화와 요툰, 그리고 인간의 어둡고 흉악한 그림자에 관해 석사 논문을 썼다고 했다. 나는 당시 언어학 박사과정에 있으면서 특히 수사학에 집중해 공부하던 중이었다. 현실이 언어를 통해 어떻게 변하는가를 살펴보는 데 관심이 있었다. 선생님은 인간의 심리에 관한 역사, 우리가 더는 끌어안을 수 없는 인간의 사고방식에 관해 글을 쓰기도 했다. 그날, 선생님과 나의 세계는 어떤 면에서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고도 볼 수 있다.
옛 스승은 내가 박사학위를 준비 중이라는 사실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대학 도서관과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어머니의 도서 대출 카드를 이용해 시베리아 원주민의 샤머니즘에 관한 책을 빌려 읽었다. 덕분에 나는 대학의 학문적 분위기에 매우 익숙해 있었다. 또한 그것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만의 특별한 미래는 이미 그때 형성되었던 것 같다. 마치 책의 줄거리가 첫 문장에 의해 좌우되는 것처럼.
선생님은 내가 건강해 보였기에 매우 놀랐다고 말했다. 그것은 나의 언어가 아니라, 나의 신체와 관련된 또 다른 미래의 이야기를 의미했다.
어떤 표현은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좋아 보인다는 말. 건강해 보인다는 말. 내가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나는 옷을 정갈하게 입는 편이다. 나만의 스타일을 형성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나는 열여덟 살 때 재봉사가 만든 수제 코트를 입었다. 소맷단에 단추가 달려 있는 재킷과 목깃이 자연스럽게 접히는 옥스퍼드 셔츠를 선호한다.
하지만, 선생님이 의미했던 바는 이런 것들이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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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말이 함축한 의미는 그날 저녁 늦게야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사실에 관한 놀라움. 나와 함께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던 어느 작가와의 만남도 다르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우리는 브리스톨호텔의 한 홀에 마주 섰다. 친구의 눈빛은 부드러웠지만, 목소리에는 주저함과 어둠이 담겨 있었다. 친구는 학창 시절에 모두가 내가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고? 나는 전혀 몰랐던 일이었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도 없다.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질문의 대답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의식 속에 자리를 잡았던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형체 없는 것이 만들어 낸 그림자였다. 그 개념 속에서 유일하게 형체를 지닌 것은 나의 신체뿐이었다. 나는 당시 휠체어를 타고 다녔으나, 운동장에서는 목발을 짚고 다니기도 했다. 쉬는 시간이 되면 다른 아이들과 함께 무리를 지어 서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는 선생님들에 관한 이야기를 했고,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그런 학교였고, 나는 그 학교 학생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내게 특별한 비극적 오라가 드리워져 있다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단지 나의 언어로 그것을 표현할 수 없었을 뿐이다. 이제 나는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시도해 보려 한다.
나는 일반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나는 어렸을 때 살았던 그 도시에 지금도 살고 있다. 나는 현재 학자이며, 학자였던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나의 삶은 당신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 나는 이다라는 여성과 결혼해 자식을 낳았다. 이다는 글을 쓰는 작가이다. 나의 아들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내 눈을 다시 그대로 물려받았다. 아들의 얼굴에서는 아버지의 어렸을 때 얼굴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내 삶을 지탱해 주는 ‘실’과 같다. 마치 직물의 씨실과 날실처럼.
어린 시절에 알고 지냈던 사람들과 마주칠 때면, 이 촘촘하게 엮인 직물에 균열이 생긴다. 기억은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불투명하지만 익숙한 이미지, 성인이 될 때까지 나를 따라다녔던 또 다른 미래에 관한 상상의 이미지들, 내가 사는 삶은 잠시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들로 대치된다. 그것은 유령처럼 스쳐 지나간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으레 예의를 갖춘 듯한 인사치레를 늘어놓는다. “참 좋아 보이네요.” 여기서 ‘참’이라는 단어는 예의상에 지나지 않는 말에 정점을 찍는다. 즉, 일어나지 않았던 일,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까지 모두 포함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건강이 훨씬 좋아졌나 봐?”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고 잘라 말한다. 여전히 휠체어를 사용하며, 가끔 두 발로 걸을 때도 있다고. 건강은 더 나빠지지도, 더 좋아지지도 않았다고.
“하지만 예전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걸?”
기억은 우리에게 속임수를 쓴다. 우리의 예상이나 기대가 더해질 때 훨씬 더 그러하다. 과거는 그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들로 채워진 과거. 우리는 바로 그 과거를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
“벌써 세상을 떠난 줄 알았어.”
나는 사람들의 예상과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간 내 편이 되어주었던 존재는 누가 뭐라 하든 묵묵하고 온전하게 자신만의 삶을 살아왔던 나의 신체뿐이었다. 나의 신체는 내가 어떤 병을 타고났는지, 어떤 진단을 받았는지 모른다. 오히려 그것이 좋은 일이다.
영화 〈스타워즈〉의 한 솔로Han Solo는 “내게 확률에 대해 말하지 말라”라고 했다. 이것은 어른이 된 나의 모습이다. 이것은 아버지가 된 나의 모습이다. 이것은 나의 아들이다. 아들의 눈은 내 눈을 닮았지만, 나의 병을 물려받진 않았다. 아들은 여러 면에서, 내게 일어나지 않았던 일의 결과로 생긴 존재이기도 하다.
*
미지의 세상 속으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구멍 뚫린 배를 타고 항해 중이다. 우리가 죽어 가는 동물이라는 것도 모른 채.
비잔틴을 꿈꾸는 우리는 차오르는 물을 힘껏 퍼내며 함께 항해하고 있다.
우리는 아르고 배의 선원들, 우주비행사들, 모험가들, 탐험가들이다. 우리는 함께 여행 중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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