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말
원효는 7세기 신라가 낳은 위대한 불교사상가이다. 그는 일찍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지만, 요석공주와의 인연을 계기로 환속한 이래 거사로서 생의 후반부를 살았다. 또한 진리를 찾아서 방대한 대승불전을 두루 탐색하고 대략 70여 부 150여 권의 저술을 남긴 동시대 최고의 저술가였으며, 사회적 약자들을 불교식으로 구제하는 데 헌신한 실천가였다. 그 자신은 신라를 벗어난 적이 없었으나, 그의 저술과 사상은 중국과 일본, 심지어 인도에까지 전해져서 동아시아 교학 불교가 정립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7세기 말~8세기 초 절정에 달한 동아시아 교학 불교를 이해하는 데서 실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그가 바로 원효이다.
필자가 처음 원효를 알게 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 이광수의 소설 『원효대사』를 읽으면서였다. 이 소설에서 이광수는 원효와 요석공주의 인연을 보살의 자비행으로 묘사하였다. 이보다 앞서 최남선도 장문의 글을 통하여, 인도의 서론적 불교와 중국의 각론적 불교에 비하여 조선은 이론과 실행이 융합된 결론적 불교라고 선언하고, 그것이 원효의 통불교에서 완성되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처럼 다른 관점에서 원효의 생애와 사상을 주목하였지만, 두 사람은 모두 원효를 민족의 위인, 민족의 상징으로 현창하고자 하였다. 실로 이 두 사람이 한국인의 원효 인식을 결정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이러한 근대적 원효 인식, 그것은 필자가 연구 주제로 원효를 정하였을 때 넘어야 할 큰 산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역사학의 관점에서 원효의 사상을 고찰한 연구는 드물었다. 무엇보다도 원효의 생애를 온전히 전하는 전기 자료가 단 하나도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 한계였다. 또 70여 부에 달하는 원효의 저술 가운데 1/10가량만이 전해지고 있는데, 저술 연대를 확정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편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먼저 석사학위논문에서 원효의 교판론敎判論을 검토하였다. 교판론은 원효 사상의 얼개에 해당하므로, 지금도 방대한 원효 사상으로 들어가는 최고의 입문이라 하겠다. 필자는 이 석사논문을 발판삼아 연구를 심화하고 확장시켜서 1995년 “원효의 사상체계와 대중교화”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학위 취득 후 박사논문을 그대로 출판하는 대신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용을 수정 보완하기로 하였다. 박사후연수과정을 시작으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학위논문을 소주제별로 수정 보완하거나 새로운 주제를 연구하여 발표하였다. 게다가 1999년 일반 대중을 위한 교양서로서 『원효』새누리출판사를 먼저 출판하면서 학술서 발간은 더욱 늦어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앞서 고친 글들을 또다시 수정해야 할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지금까지 학생들이나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원효에 대하여 강의할 기회가 적지 않았다. 그때마다 “원효 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연상되는가?”라는 질문으로 강의를 시작하곤 하였다. 가장 흔한 대답은 ‘해골물’과 ‘요석공주’였으며, 가끔은 ‘화쟁’이었다. 그 답을 통하여, 일반인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원효 이미지와, 그들이 좀 더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청중들의 궁금증은 원효 사상의 3대 핵심 개념인 ‘일심一心’, ‘무애無碍’, ‘화쟁和諍’과 관련이 있다. 물론 세 개념은 원효의 고유한 창안도, 원효만의 전유물도 아니다. 원효의 빛나는 독창성은 세 개념을 유기적으로 통합시켰다는 데 있다.
필자는 3대 개념을 중심으로 원효의 사상을 고찰하되, 그것의 불교사적 의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의 세 가지 관점에 유념하였다. 첫째는 기왕의 민족주의 내지 일국사적 관점을 탈피하여 연구 시야를 동아시아 불교로 확장하는 것이다. 한국에 전래된 불교는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고등 종교였으며, 한국은 중국, 일본 등과 상호교류하면서 동아시아 불교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위대한 사상의 탄생 과정은 그때까지 사상의 역사를 반복한다. 특히 원효는 동아시아 불교 교학의 절정기에 활동하였다. 그렇다면 원효 사상 또한 동아시아 불교사를 배경으로 접근할 때, 비로소 그 불교사적 의의가 온전히 드러나리라 기대된다.
둘째는 역사적인 관점이다. 원효는 주요 저서에서 일관되게 화쟁주의 관점을 견지하였는데, 이는 그가 사상적 갈등과 대립의 시대를 살았음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원효 화쟁의 역사성을 선명히 하고자, 7세기 중엽 현장玄奘에 의해 촉발된 신·구역 불교新·舊譯佛敎 사이의 갈등과 대립에 특별히 주목하였다.
마지막으로 환속한 이후 거사居士로서의 삶을 더욱 부각시킴으로써 원효의 역사적 실체에 다가가고자 하였다. 우리가 오랫동안 익숙해진 승려 모습의 원효는, 조선시대 이후에 굳어진 반쪽 이미지에 불과하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일련의 소소한 파계에 뒤이은 결정적인 파계 끝에 마침내 속세로 돌아와서 거사가 되었다. 거사란 세속적인 삶을 살면서 불교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인간형이다. 그중에서도 원효는 『유마경維摩經』의 주인공 유마거사維摩居士를 자신의 전범으로 삼았다. 확실히 원효의 사상과 실천은 거사의 관점에서 새롭게 발견되어야 한다.
일찍이 원효는 우리가 진리를 탐색하는 것은 어둠 속에서 코끼리를 더듬는 격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귀를 만진 이는 코끼리가 커다란 부채와 같다 하고, 다리를 만진 이는 둥근 기둥 같다 하고, 코를 만진 이는 뱀과 비슷하다고 여긴다. 그런 점에서 각자의 주장이 온전한 진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진리의 일면을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 책을 통하여 필자는 7세기 동아시아 불교의 거봉인 원효의 삶과 생각을 탐색하였으며, 원효의 불교가 ‘승속불이僧俗不二의 거사불교居士佛敎’를 지향하였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것이 원효의 진면목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지라도, 온전한 원효상으로 나아가는 올바른 방향이기를 기대해본다. 그리고 그러한 뜻을 담아 이 책의 제목을 ‘원효의 발견’이라 하였다. 그것은 원효가 발견한 불교적 진리이자, 필자가 발견한 원효이기도 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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