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종이에 가치를 부여하다
사민필지. 세계 지리서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인데 사람마다 볼 만한 책이니 학문상에 유의하는 이는 이 책을 종로책전에서 사시압. 값은 여덟 냥.
이 문구는 국내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 창간호1896년 4월 7일에 실린 책 광고다. 내용인즉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책을 구입하려면 종로책전에 가서 여덟 냥에 사라는 것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학교인 육영공원에서 외국인 교사로 일한 호머 헐버트가 1889년에 한글로 집필한 세계 지리 교과서이다. 1895년에는 당시의 교육부인 학부學部에서 이 책의 한문본을 펴냈는데, 앞서 인용한 광고는 바로 이 한문본을 선전한 것이다. 개항 이후 국제질서가 재편되던 시국에 세계 각국과 교류하는 데 필요한 지리 정보를 모아 펴낸 책이라 큰 호응을 받았다.
아마도 《독립신문》 창간호에 실린 『사민필지』 홍보문은 국내 최초의 책 광고일 것이다. 근데 광고 말미에 등장하는 ‘종로책전’에 눈길이 간다. 여기서 종로책전이란 서울 종로에 위치한 서점을 말한다. 이곳의 정체는 두 달 뒤 같은 신문에 실린 또 다른 광고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대동서시. 종로 대동서시란 책사冊肆는 예수교 성경과 공업·화학·천문·지리·산학·외학 등 서書와 학부 책과 팔월사변 보고서를 파오니 첨군자는 사 보소서.
1896년 6월 23일자 《독립신문》은 갑오개혁 이후 사회 변화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등장한 ‘대동서시’를 알리고 있다. 대동서시는 1894년에 탁사 최병헌이 종로에서 운영한 서점의 이름이다. 최병헌은 한국 기독교 역사의 초창기에 활약한 인물. 그리고 이 서점이 앞서 인용한 광고에 언급된 종로책전으로 추정된다. 대동서시는 기독교 서적을 비롯해 각종 신서적과 학부에서 발행한 학교 교과서를 팔았다. 광고에 언급된 ‘팔월사변 보고서’도 흥미롭다. 이 책의 정확한 명칭은 『개국 504년 팔월사변 보고서』로, 조선이 건국한 지 504년째 되는 1895년에 벌어진 을미사변명성황후시해사건의 진상을 세상에 알리고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해 펴낸 16쪽짜리 소책자다.
사실 대동서시는 몇 번의 부침을 겪었다. 1886년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는 일본인 거주지인 서울 서대문 밖에 서점을 차린 적이 있다. 그가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벌인 지 1년이 조금 넘은 때였다. 이후 그는 종로에 새로 가게를 얻어 대동서시를 차렸다. 서대문 밖 서점을 연 지 4년이 지난 1890년이었다. 운영 실적이 부진해서였는지 아니면 최병헌을 책임자로 두고 확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펜젤러는 1894년에 대동서시를 새로 단장했다. 광고에 등장하는 대동서시는 그가 두세 번의 고군분투 끝에 최병헌에게 운영을 맡긴 서점이다.
지물포에서 태동한 근대의 서점
19세기는 서양의 제국주의 세력이 동아시아를 침략한 서세동점의 시대였다. 서세동점이 야기한 변화는 지식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 형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근대 인쇄술의 유입은 책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만들어서 책의 희소성을 감소시켰다. 이전의 책이 대개 성현의 탁월한 지혜를 담은 일종의 정전canon이었다면, 더 이상 책은 희귀하지도 않고 성스러운 대상도 아니었다. 성현의 말씀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와 맞바꿀 수 있는 상품이 되었다. 책을 둘러싼 새로운 기술의 유입이 책에 대한 사회적·문화적 인식을 바꾸는 계기로 이어진 것이다.
근대 서점은 이러한 변화와 맞물리면서 출현하는데, 이때의 서점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보통 서점 주인의 이름 뒤에 서포書鋪, 서사書肆, 책사冊肆, 서관書館, 서시書市 등이 붙는 식이었다. 서점 주인들은 판매에서 오는 경제적 이윤을 바라고 책 장사에 뛰어들었지만, 각종 서적의 출판과 판매를 통해 문화 발전에 기여하려는 동기도 품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서점의 목적이 ‘영리’인지 ‘계몽운동’인지에 따라 취급하는 책의 종류가 조금 달랐다는 사실이다. 상업적 영리를 목적으로 한 경우 신구서적을 가리지 않고 팔았다. 반면에 계몽운동에 방점을 둔 경우 서양의 근대 지식을 보급하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전파하기 위해 주로 신서적을 판매했다. 이처럼 근대 서점은 상업적 욕구와 계몽적 욕구가 공존하는 양태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에는 왜 서점이 발달하지 못했을까. 조선 전기까지 책은 개인 문집이나 족보를 편찬하는 경우에만 만들어졌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책이 매우 값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지식인들에게 기본적인 책이었던 『대학』이나 『중용』도 중간 품질의 면포綿布 서너 필을 주어야 살 수 있었다. 면포 서너 필의 가격은 논 두세 마지기 소출에 해당할 정도였다. 종이 값이 비싸니 책이 비쌀 수밖에 없었고, 이는 책 유통에 결정적인 장벽이었다. 심지어 조선 시대에는 서적 품귀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니 책의 판매와 유통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이와 더불어 책을 가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보물로 여기는 문화도 서점의 발달을 가로막는 데 큰 몫을 했다. 양반들에게 책을 사고파는 행위는 불경스럽고 무식한 짓이었다. 게다가 조선은 금속활자 기술이 일찍이 발달한 나라였지만, 중기까지는 국가가 인쇄를 엄격히 통제하고 책의 제작과 유통도 독점했다. 철저히 정치가 지식을 지배했기에 유교 이념을 담은 중국 고전을 필요한 이들에게 찍어서 나눠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니 책을 쓸 사람도 별로 없었고 책을 집필할 이유도 마땅치 않았다.
그나마 중종 시대1506~44에 서점 설립에 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타지만, 기묘사화1519가 터지면서 물 건너가고 말았다. 이후 어득강이라는 사람이 중종에게 세 차례에 걸쳐 서점 설립을 건의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러다가 대중문화가 꽃피면서 민간에서 펴낸 방각본이 인기를 얻고 책을 돈 받고 빌려주는 세책점도 등장하지만, 독자적인 서점의 설립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근대 인쇄술의 유입과 함께 다양한 서구 사상과 지식이 들어오기 시작한 19세기 후반에 서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당시 신서적은 조선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주었다. 이를 통해 얻은 근대 지식은 억압적인 지배 질서에 맞서 싸우는 데 필요한 저항의 논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1899년 지방관의 학정을 분통히 여긴 황해도 장연군 주민들은 『법규류편法規類編』을 비롯한 법률 서적을 구입해 주야로 통독한 후 항거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법규류편』은 당시의 방대한 근대 법령을 엮은 책이다. 관리의 학정에 맞서 싸우고자 책을 통해 법률 지식을 익히려 했던 모습은 지식의 유통이 이전과 다른 경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시사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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