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여성은 어떻게 영웅이 되는가
오늘날 자신의 여성적 본성이 페르세포네처럼 지하 세계로 가버린 것 같다고 생각하는 여성과 남성들은 텅 빈 듯한 허전함을 느낀다. 틈이나 벌어진 상처와도 같은 이러한 공허감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상처에서 흘러나온 핏속에서 찾는 것이다. “그 자신의 피 말고는 어떠한 약도 없다.”라는 말은 연금술의 오랜 진리이다. 따라서 여성성의 상실에서 오는 공허감은 남성성과 결합하는 것으로는 치유할 수 없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여성 안의 각 부분들끼리의 통합, ‘어머니’와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을 이루었던 때를 기억해내거나 회복하는 방법을 통해 치유할 수 있다.
― 노어 홀Nor Hall, 《달과 처녀자리》
나는 주로 서른 살에서 예순 살 사이의 여성들과 심리 상담을 진행하면서, 직장에서 성공한 여성들이 내지르는 불만족의 절규를 들어 왔다. 이 불만은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는 느낌, 공허감, 팔다리가 잘려 나간 듯한 느낌, 심지어는 배신감이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다. 이 여성들은 전형적인 남성 영웅의 여정을 따르며 학문적, 예술적, 경제적 성취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이런 의문에 시달렸다. “도대체 이게 다 무엇을 위한 거지?”
성공이라는 환상 때문에 그들은 항상 과도한 일정에 시달리고, 피로에 지쳐 있으며,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고통받는다. 그리고 늘 자신이 올라탄 궤도에서 어떻게 내려오게 될지 궁금해한다. 성공을 향해 첫걸음을 뗐을 때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그들이 그렸던 청사진에 몸과 마음의 희생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이 여성 영웅들의 여정을 연구하면서 여성들 스스로 초래한 육체적, 정서적 상처에 주목했고 그들이 그런 쓰라린 고통을 겪는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모델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나는 여성 영웅의 여정이 남성 영웅의 여정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이해하고 싶은 열망을 품고 1981년에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을 찾아갔다. 그때 나는 여성 영웅이 거치는 여정의 각 단계가 남성 영웅이 거치는 여정의 여러 양상을 포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성의 정신적 발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 자신과 여성성의 내적 분리를 치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캠벨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캠벨이 여성은 여행을 떠날 필요가 없다고 말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모든 신화에서 여성은 전통적으로 ‘거기there’, 그 자리에 있습니다. 여성이 해야 할 일은 그저 사람들이 도달하려고 하는 곳이 바로 자신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신의 특성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여성들이 깨닫는다면, 유사 남성pseudo-male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을 것입니다.
캠벨의 대답에 나는 머리가 멍해졌고, 이내 깊은 실망감이 몰려왔다. 내가 아는 여성들과 나와 함께 일하는 여성들은 거기, 사람들이 도달하려는 그곳에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여성이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는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 앤 트루이트Anne Truitt는 《일기 : 어느 예술가의 기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성다움의 동굴에서 나는 아늑함을 느낀다. 말로 정확히 표현하기 쉽지 않은, 어떤 깊은 곳에 있다는 느낌은 나를 편안하게 한다. 나는 나를 편안하게 만드는 이곳을 내가 나만의 도피처로 삼을 거라고 직감했다. 남성들도 나로서는 오직 상상으로밖에 알 수 없는 남성다움의 동굴을 도피처로 느낄지도 모른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인정하는 견고한 통념이 있다. 하지만 여성다움이 나에게 ‘고향’ 같은 것이라고 해서 내가 고향에 머물러 있기만을 바란다는 의미는 아니다. 동굴 밖으로 전혀 나가지 않는다면 그곳은 퀴퀴하게 악취 나는 곳이 될 것이다. 나는 힘이 넘치고, 호기심이 매우 강하고, 무척이나 혈기 왕성해서 동굴 안에만 갇혀 있을 수가 없다. 동굴 안에만 있는다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의 모든 기능이 퇴화하거나 망가질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다하고 싶고 또 책임을 다하고 있다면, 자신이 갈망하는 것을 좇아야 한다.
오늘날 여성들은 탐색의 여행을 하고 있다. 이 여행은 여성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지 그리고 여성성에 난 깊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지를 배움으로써 자신의 여성적 본성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다. 온전하게 통합되고 균형 잡힌 전인全人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내면으로의 여정이다. 대부분의 여행처럼 여성 영웅의 행로도 쉬운 길이 아니다. 제대로 된 이정표도 없고 알아보기 쉽게 설명한 여행 책자나 지도도 없다. 몇 살에 여정을 시작해야 하는지도 정해져 있지 않다. 또 이 여정은 절대로 곧게 뻗은 일직선 도로를 따라가지도 않는다. 외부 세계는 이 여정을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방해하거나 간섭한다.
여성 영웅의 여정이라는 모델은 어느 정도 조지프 캠벨이 제시한 영웅의 탐색 모델에서 비롯했다. 하지만 각 단계별 용어는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여정의 각 단계를 보여주는 시각적 도표는 아주 여성적인 방식으로 내게 나타났는데, 어느 날 불현듯 내 등뼈에서 튀어나왔다.
1983년 봄, 나는 ‘가족 조각family sculpting’이라고 불리는 심리 치료 기법을 연구하는 로스앤젤레스가족연구소의 대학원 과정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다. ‘가족 조각’은 함께 저녁을 먹는 일처럼 원가족 안에서 반복되는 전형적인 장면을 연극으로 재현한다. 동료 학생들이 나의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 역할을 맡아 저녁 식사 장면을 재연했고 나는 나 자신을 연기했다. 한때 내 가족들이 보여주었던 상황을 연기하며 조각품처럼 얼어붙어 있을 때 내 등뼈가 튀어나왔다. 꼼짝하지 않으려고 기를 썼지만 더는 그 자세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사흘 동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거실 바닥에 엎드린 채 그동안 나의 무리한 성취욕과 일 때문에 등한시해 왔던 내 가족의 고통과 그들이 겪었을 혼란을 떠올리며 울었다. 눈물 속에서 시계방향으로 순환하는 여성 영웅의 여정에 관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 여정은 내가 의존적이면서도 지나치게 통제하려 들고 분노로 가득 차 있다고 규정했던 여성성을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고는 독립, 명성, 돈, 권력, 성공이라는 열매를 얻으려고 남성 조력자들과 함께 외부로 향하는 남성 영웅의 여정을 떠났다. 그다음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메말라버린 듯한 느낌과 절망감으로 가득한 방황의 시기가 이어졌다. 메마름과 절망은 암흑의 여성성dark feminine이 존재하는 지하 세계로 내려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 암흑은 내가 ‘모녀 분리mother/daughter split’라고 이름 붙인 여성성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라고 요구했다. 지하 세계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여성적 가치를 재규정하고 승인하는 과정을 통해 여정의 전반부에서 익힌 남성적 기술과 여성적 가치를 통합했다.
그 이미지는 다음 쪽에서 보는 것처럼 완전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후로 여러 해에 걸쳐 조금씩 여정의 각 단계를 이해하는 일이 과제였다. 나는 내담자들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남성 중심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의 욕구를 더 면밀하게 관찰하는 과정을 거치며 천천히 더디게 나아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인정받기를 원했지만, 실은 그 사회가 많은 것이 결핍되어 있고 지독히도 파괴적이라는 것을 나를 비롯한 나와 같은 세대의 많은 여성들이 알게 되었다. 이 여정은 바로 그런 나와 또래 여성들의 관점에서 그려진 것이다. 우리는 서구의 우위를 되찾기 위해 남보다 더 뛰어나야 한다는 압박을 받으며 자란 포스트 스푸트니크* 세대였다.
*포스트 스푸트니크 세대Post-Sputnik 1957년 10월 소련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발사했다. 이후에 태어난 세대를 ‘포스트 스푸트니크 세대’라고 부른다.
나는 이른바 ‘아버지의 딸’이었다. 종종 어머니를 거부하면서 자신을 주로 아버지와 동일시하고, 아버지와 남성적 가치로부터 관심받고 인정받기를 갈구해 온 여자라는 뜻이다. 지금 제시하는 이 모델이 반드시 모든 세대, 모든 여성들의 경험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또 이 모델이 여성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남성들이 거치는 여정과 여성의 여정을 모두 다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모델은, 적극적으로 삶을 살고 이 세상에 이바지하기 위해 분투해 왔으나 한편으로는 발전 지향적인 우리 사회가 인간의 정신과 지구의 생태적 균형에 끼친 영향을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기술한다.
여러 단계를 거치는 이 여정은 순환적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이 여정의 여러 단계를 동시에 겪을 수도 있다. 예컨대, 나는 내 본성의 두 부분을 통합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모녀 분리의 문제를 치유하는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 여성 영웅의 여정은 발달과 성장과 배움의 일생 동안의 순환이다.
이 여정은 우리 여성 영웅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거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소명’이 들리는 시기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낡은 자아’가 더는 맞지 않을 때 여성 영웅은 자기 정체성을 찾아 모험을 떠난다. 어쩌면 젊은 여성이 대학에 진학하거나 직업을 구하거나 여행 또는 결혼으로 집을 떠나는 때일 수도 있고, 중년이 되어 이혼을 하거나 다시 일을 하게 되거나 학교를 다시 다니거나 직장을 옮기거나 빈 둥지에 직면할 때일 수도 있다. 혹은 단지 여성이 자신을 규정할 수 있는 자아감이 없다는 걸 알아차린 때일 수도 있다.
이 모험의 첫 단계는 대개 수동적이고, 다른 사람을 교묘히 조종하고, 비생산적이라고 규정된 여성성을 거부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흔히 우리 사회는 여성이 산만하고, 변덕스럽고, 지나치게 감정적이어서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고 말해 왔다. 하나에 집중하거나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여성들의 경향을 지배 문화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들 스스로 여성이 나약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의존적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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