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1981년 9월 9일 보안사 요원들에게 납치된 나는 35일간 불법 구금되었다. 그 뒤 서울구치소, 광주교도소, 대구교도소, 대전교도소에서 15년을 갇혀 지냈고, 1996년 8월 15일에 석방되었다. 스물다섯 살이던 내가 마흔이 되어 감옥 밖으로 나왔다.
일본에 살면서는 유치장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었건만, 모국에 온 지 5년 만에 간첩죄,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이라는 어마어마한 죄명을 뒤집어썼다. 단지 모국과 모국어를 알고 싶다는 일념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국에 와서 공부한 게 다였다. 사형 구형에 무기형을 선고받고서, 나 자신이 정말 그렇게 엄청난 죄를 지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따져봐도 내가 죄를 지었다고 판단할 수 없었다.
나를 비롯해 간첩으로 조작당한 사람들이 경험한 바로 말한다면, 간첩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한국에서는 정보·수사기관에 재수 없이 걸리면 아무나 간첩이 된다. 수사관이 ‘너는 간첩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간첩이 된다. 간첩이 뭔지 몰라도, 간첩 행위를 한 게 없어도, 수사관에게서 간첩 혐의를 받는 것만으로 간첩이 된다.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알 만한 내용을 국가 기밀이라고 한다면, 누구라도 간첩으로 만들 수 있다. 이렇게 필요에 따라 간첩을 만들어 내니, 간첩이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재일 교포 간첩단 사건은, 현실성도 타당성도 없는 선전용 영화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아무것도 아닐 일상적인 일을 극대화하고 왜곡해 마치 대단한 일처럼 꾸며서 만든 선전 영화, 즉 정권 안보를 위해 수사기관이 상부 지시에 따라 조작하기 쉬운 재일 교포를 잡아서 꾸며 낸 일대 사기극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폭행과 협박을 받으면 견디지 못하고 굴복하게 된다.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계속 받으면 자포자기하게 되어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다. 악랄한 고문 기술자들은 사람을 극한 상태로 몰아 교묘하게 사건을 꾸며 냈다. 사람이 사람을 학대한다니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도대체 어쩌다 이런 참담한 사회가 되었을까. 이제는 이런 슬픈 세상, 이런 가혹한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본권이 보장된 세상,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감옥은 현실 사회의 모순이 여실히 드러나는 곳이다. 한 사회의 문제점이 집약된 공간이 바로 감옥이다. 감옥을 들여다보면 사회의 실상을 잘 알 수 있다. 고문, 조작 간첩, 북한 파견 첩보원, 유격대, 비전향 장기수, 통일혁명당, 남민전, 오송회, 재일교포, 양심수……. 분단 사회라서 생기는, 분단 사회라서 조작이 가능한 사건들로 무수한 사람이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서 살아야 했다. 한편으로 일반수로서는, 빈부 격차가 심한 한국 사회에서 가장 배고프고 힘없는 사람들이 감옥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내가 감옥에서 지낸 15년은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 책을 통해 그 많은 사람이 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어떻게 감옥살이했는지, 당시 한국 사회의 속살은 어떠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5년 동안 잊지 않고 끊임없이 기억하려 했던 이야기를 석방 이듬해인 1997년부터 2년간 기록했다. 옥중에서는 기록을 남길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은 거의 모두 내 기억에 따른 기록이다. 몰래 기록해 보관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발각되면 몰수당해 위험이 컸다. 1987년 6월 민주화 투쟁 이후 감옥 안에서도 집필이 허가되었지만, 검열받아야 했기에 나는 기록하지 않고 기억했다. 감옥에 갇힌 내게는, 기록보다는 기억이 무난했다. 옥중에서 보고 듣고 겪은 일을 언젠가는 책으로 쓰려고 중요한 내용은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갇힌 공간이었지만, 그 안에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각자 어떤 삶의 길을 걸어왔는지 가능한 대로 기회를 만들어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려 애썼다. 어떤 일을 잘 기억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 일을 몇 번이고 거듭 생각하는 것이다. 운동 시간에 운동장을 달릴 때나 방에서 요가 운동을 할 때 늘 중요한 일을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세상으로 돌아온 지 26년이 지났다. 그사이에 나는, 보통은 20대에 시작하는 직장 생활을 마흔에서야 시작해야 했다. 내 나이대 다른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될 무렵 나는 생활 기반을 마련하려 분주히 노력해야 했다. 그사이에 나는, 내가 한 번도 인정하지 않은 내 죄가 무죄임을 밝히려고 재심을 신청했고, 2017년에야 무죄판결을 받아 냈다. 그래서 15년 동안 기억했던 이야기, 그것을 기록해 놓고 다시 20여 년을 묵힌 이야기를 이제야 꺼내 놓는다.
프롤로그
― 모국으로
가족
아버지는 경상남도 양산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부터 스무 살이 조금 넘을 때까지 서당에서 한문과 동양의학을 공부했다. 어머니는 경상남도 울산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다. 한자는 몰랐으나 편지를 쓸 만큼 한글을 익혔다. 여성이 글을 배울 기회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두 분은 결혼해 큰형을 낳고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처음에는 홋카이도에서 살았고, 동북 지방과 나고야로 여러 번 이사하면서 점차 남쪽으로 내려왔다. 나고야에서 살 때 전쟁이 끝났다. 부모님은 고베에 정착했고, 나는 그곳에서 6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57년, 갓 태어났을 때 내 몸무게는 약 680그램이었다. 열달에 훨씬 못 미쳐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다른 아기처럼 숨을 쉬며 울어야 하는데 울지도 않았다. 의사는 어머니에게 아기가 인큐베이터에 들어가도 살 가망성이 없다며 포기하고 했다. 그런데 분명 죽는다던 내가 아무 치료도 받지 않았는데 죽지 않고 살아났다. 그 뒤 알레르기성 비염에 걸려 코가 자주 막히는 것 말고는 비교적 건강하게 자랐다.
아버지는 일본에 와서도 계속 한문으로 된 동양의학 서적을 연구했다. 자주 한약을 만들었고, 몸이 안 좋은 사람에게 가끔 침을 놓아 주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동양의학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러다 보니 어려서부터 의학에 관심을 두었고 건강을 조심했다. 이런 관심이 나중에 감옥에서 생긴 만성병을 스스로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일본의 조선인 차별 정책 탓에 취직이 제대로 안 된 아버지는 장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밀주 막걸리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전기 제품 등을 분해하는 고물상 하청업을 하기도 했다. 부모님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7남매를 학교에 보내고 학비를 다 마련해주었다.
큰형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일꾼으로 일했다. 몇 년 뒤에는 조총련 효고현 가와니시 지부 조직부장을 맡았다. 조총련 일꾼은 봉급이 아주 형편없어 생활이 어려웠다. 나중에는 조총련에서 비상근으로 일하면서 고물상을 함께했다.
둘째 형은 대학교에 재학하던 1960년대 초, 귀국선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으로 갔다. 그 당시 재일 교포들의 생활은 아주 어려웠다. 가난한 생활에서 벗어나려고 많은 재일 교포가 북한으로 갔다.
셋째 형은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며 구두 도매상 종업원으로 일하다, 20대 중반 구두 도매상을 직접 경영했다. 1970년대에 장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서 아버지에게 생활비를 보태 주어 집안 살림살이가 좀 나아졌다. 형이 독립할 때 아버지가 자금을 마련해 준 데 대한 보답이었다.
넷째 형은 일본 국립대학교 농과대학 육종학과를 졸업했지만, 일본 기업에 취직하지 못하고 셋째 형 가게에서 오랫동안 함께 일했다. 일본 사람이라면 국립대학교를 졸업한 뒤 당연히 좋은 기업에 취직했지만, 교포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거의 그러지 못했다.
누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주고베 한국 영사관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한 적이 있었다. 한국말을 몰랐지만, 그래도 할 만한 일이 있었다. 영사관 일 말고도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회사의 정사원으로 일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지내다가 재일 교포 남성과 결혼해 아들 둘을 낳았다. 자형은 아주 좋은 사람으로, 내가 출소한 뒤에도 나에게 잘해 주었다.
다섯째 형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구두 관련 회사를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한때 구두 도매상을 경영하다 부도를 막지 못해 어려움도 겪었지만, 나중에 구두 소매 가게를 운영했다.
아버지는 민족의식이 강한 분이어서 일제강점기에 일본식 이름인 통명을 강제로 쓰게 할 때를 빼고는 쭉 본명인 한국 이름을 썼고, 우리 7남매 또한 일본 학교에 다니는 내내 본명을 썼다. 일본식 이름을 따로 짓지도 않았다.
해방되면서 형식적으로는 통명 쓰기가 해제되었다지만, 재일 교포들은 일본식 이름을 계속 썼고, 자녀에게도 여전히 일본식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는 민족 차별이 심한 일본 사회를 사는 데 필요한 방어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본명으로 일본 학교에 다니니 누구든 내가 한국인임을 단박에 알았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걸 알고는 어색하게 대하는 일본 학생도 있었다. 자연스레 나는 어려서부터 ‘차별’을 알게 되었고, 이런 태도와 분위기가 영 못마땅했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본명을 쓰게 했지만, 우리말을 가르치지는 않았다. 두 분은 우리말로 이야기하면서도 우리에게는 일본어를 썼다. 민족 차별이 심한 일본 사회에서 일본 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이 언어 문제로 더 피해를 볼까 염려했던 듯하다.
그래서 나는 한국말을 거의 몰랐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민족의식이 싹텄던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모국어를 공부했다. 우리말을 본격적으로 배우고자 모국의 대학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1977년 3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문교부에서 선발한 장학생으로 5년간 모국 유학길에 올랐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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